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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고승전-대우선사전

원문
曹溪宗大愚禪師傳 父諱漢柱 贈吏曺判書 姓金 故駕洛國王之裔 母光山金氏 贈淑夫人 夢鶴吐靑珠 布裳受之 娠而生於谷城郡木寺面酉峙里 卽光緖元年乙亥八月八日也 骨相端正 面光鮮白 眉宇純粹 十一歲乙酉 移于順天郡松光洛水里 仍入學 了史書等 十四戊子 忽有出家志 辭親投松廣寺 拜龍湖大師零染 叅華性禪師得戒 名錦秋 于時父母 寓於谷城郡石谷面龍頭里 二十一乙未 叅月華淸昊 學中科 三十一乙巳 拈香竪幢恩室下 號大愚 丙午春發足遊方 以方丈之七佛 泉隱之三日華嚴之塔殿 爲安居之所也 又戊申夏在海印禪院 時有一夢 白眞珠三斗自天注下 以長杉布而受之 無一枚落地 藏軍持中 然未能貫線爲恨 解夏還本寺三日庵過臈 明治四十二年己酉 義兵之亂 佩印數月 乃辭曰 此非佛子所行 隱居方外 辛亥八月十三日哭嚴父喪 壬子四月八日 受具戒於錦溟禪師 自是無碍出入 丙辰行本山法務任 戊午行監務任 退居禪院 更提叅念 乙丑四月恩在病 一日强呼大愚以雙杖并授之 汝知否 愚答曰 一是傳心 一是傳產之表也 恩搏膝呵呵師之知解 皆如此也 後二十八日 哭恩父 三年服終 亦未忘偏慈之獨居每每觀親 數數幹護 無毫末之苦念唯恐慈體之不寧 此乃至孝之心滿身故也 然所做日用 靜閙一如 每到夜靜 堅拂喚主曰 眞珠三斗何時貫 着得心頭切莫忘 盖不忘日用者 此類也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조계종 대우 선사전(曹溪宗大愚禪師傳) 아버지의 휘는 한주(漢柱)로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성은 김씨로서 옛날 가락국왕의 후예이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서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는데, 학이 푸른 구슬을 토해 내자 치마를 펴서 그 구슬을 받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곡성군 목사면 유치리에서 낳았다. 이때가 곧 광서 원년 을해년(1875, 고종 12) 8월 8일이었다. 골상은 단정하고 얼굴빛은 선명하고 희었으며 눈썹의 언저리는 순수하였다. 11세 을유년(1885, 고종 22)에 순천군 송광면 낙수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입학을 하고 사서史書 등을 마쳤다. 14세 무자년(1888, 고종 25)에 홀연히 출가할 마음을 내어 부모를 작별하고 송광사에 가서 용호(龍湖) 대사에게 참례하고 먹물 옷을 입었다. 그리고 화성(華性) 선사에게서 계를 받고 이름을 금추(錦秋)라 하였다. 그때 부모는 곡성군 석곡면 용두리로 옮겨 살았다. 21세 을미년(1995, 고종 32)에 월화(月華)와 청호(淸昊) 법사에게 참문하여 중과(中科)를 배웠다. 31세 을사년(1905)에 향을 사르고 은사의 조실에서 건당을 하였는데 호를 대우(大愚)라 하였다. 병오년(1906) 봄에 제방의 유행을 시작하였다. 곧 방장산의 칠불암과 천은사의 삼일선원과 화엄사의 탑전 등이 안거했던 장소이다. 또한 무신년(1908) 여름에 해인선원에 있었다. 그때 꿈을 꾸었는데 하얀 진주 서 말(斗)이 하늘에서 쏟아지자 이에 장삼을 펴서 그것을 받았는데 하나도 땅에 흘리지 않았고, 그것을 물병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아직 실에 꿰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여름 안거를 마치고 삼일선원으로 돌아와서 겨울 안거를 보냈다. 명치 42년 기유년(1909) 의병의 난 때에 수개월 동안 완장을 찼지만 이에 사양하고 말했다. “이것은 불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방외에 은거하였다. 신해년(1911) 8월 13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곡을 하였다. 임자년(1912) 4월 8일에 금명(錦溟) 선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걸림이 없이 출입하였다. 병진년(1916)에 송광사에서 법무의 소임을 맡았다. 무오년(1918)에 감무의 소임을 맡았다. 이후에 선원으로 물러나 앉았다가 다시 염불수행을 시작하였다. 을축년(1925) 4월에 은부(恩父)가 병에 걸렸다. 어느 날 큰 소리로 선사(大愚)를 불러서 양손으로 짚는 두 지팡이를 주면서 말했다. “그대는 이것을 알겠는가?” 대우 선사가 답했다. “하나는 심법(心法)을 전승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법(身法)을 전한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이에 은부는 무릎을 잡고 껄껄 웃었다. 선사의 지해(知解)가 모두 이와 같았다. 이후 4월 28일에 은부가 입적하자 곡을 하였다. 그리고 3년 동안 복제를 마쳤다. 이 또한 홀로 계신 어머니의 독거 생활을 잊지 못하여 매번 친히 찾아뵙고 자주 간호를 하면서도 터럭 끝만큼도 고생한다는 생각이 없고 오직 어머니의 옥체가 편안하지 않을까를 염려할 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효심이 온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는 고요하거나 시끄럽거나 일여(一如)하였다. 그래서 밤이 되어 고요해지면 불자를 치켜세우고 자신의 주인공을 불러 말했다. “진주 서 말을 언제 꿸 것인가? 이것을 염두에 두고서 절대 잊지 말거라.” 무릇 일상생활에서 잊지 않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종류들이었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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