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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고승전-용암선사전

원문
曹溪宗師龍嵓禪師傳 姓崔 父時先 母朴氏 諱振秀 字土定號龍嵓 順天松光壯安人 同治七年戊辰六月一日生 容儀素潔 眉瞳秀澄人稱玉骨美男 八歲入學 日所學夜必誦 十三通史畢 爲數者所敎 父母許以出家 十四投曹溪之桂月禪師祝髮戒受於法雲大師 十八哭恩師 三喪禮行 二十三庚寅 就錦溟和尙講下學經叅華性浩鵬 六十七年閱盡經籍 三十丁酉冬 建幢於普照闌若 得印月大師法印 住廣原社 丁未行㧾攝任 戊申避兵亂 遊歷四山 至梁山之通度寺禮佛宗之戒壇廟 數月結緣 向梵魚禪院 結臈安居 明年禮法宗之經閣 自方丈之啞房 抵華嚴 禮舍利塔而還本住甘露社 而處世間而不廢念誦 處衆閙而不失綱紀 心不違䂓繩 性不染情愛 俯仰常恐出家之本意 晨夕每念淨土之事業 敎育雲仍 勤修㝠路者 是無乃世出世之隱居衲僧耶 壬戌冬行大雄殿奉香任 甲子再行之不倦也 戊辰冬偶以微疾在床 有上足曰海隱 侍湯擧行 不愧三平及王孟未過云尒 庚午一月二日奄然歸眞 門徒會集 茶毘掛眞于方丈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조계종사 용암 선사전(曹溪宗師龍嵓禪師傳) 속성은 최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시선(時先)이며 어머니는 박씨이다. 휘는 진수(振秀)이고 자는 토정(土定)이며 호는 용암(龍巖)으로 순천군 송광면 장안 출신이다. 동치 7년 무진년(1868, 고종 5) 6월 1일에 태어났다. 용모가 깨끗하고 깔끔하였으며 눈썹과 눈동자가 수려하고 맑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옥골미남이라 불렀다. 8세 때 입학하였는데 낮에 배운 것은 밤에 반드시 암송하였다. 13세 때 『통사(通史)』를 마쳤다. 점술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였다. 14세 때 조계산으로 가서 계월 선사(桂月禪師)에게 머리를 깎았고, 법운 대사(法雲大師)에게 계를 받았다. 18세 때 은사가 입적하자 곡을 하고 3년 동안 복제를 하였다. 23세 경인년(1890, 고종 27) 금명 화상(錦溟和尙)의 강원에 나아가서 경전을 배웠고, 화성(華性)과 호붕(浩鵬)에게 참문하면서 6, 7년 동안 모든 경전과 불교 전적을 열람하였다. 30세 정유년(1897, 고종 34) 겨울에 보조난야에서 건당을 하였고, 인월(印月) 대사의 법인을 얻어 광원사(廣原社)에 주석하였다. 정미년(1907)에 총섭에 나아갔고, 무신년(1908)에는 병란을 피하여 사산四山을 유력하다가 양산 통도사에 있는 불종(佛宗)의 계단묘(戒壇廟)에 참례하고서 수개월 동안 결연을 한 후 범어선원(범어선원)으로 가서 안거를 보냈다. 이듬해 법종(法宗) 스님의 경각(經閣)에 참례하였고, 방장산의 아자방(亞字房)으로부터 화엄사에 나아가서 사리탑에 참례하고 조계산의 감로사(甘露社)로 돌아왔다. 세간에 있으면서도 염송을 그만두지 않았고, 대중이 많은 시장에 있으면서도 기강을 잃지 않았으며, 마음에는 규승(䂓繩)을 어기지 않았고, 성품에는 정애(情愛)에 물들지 않았으며, 일상의 기거동작에서도 항상 출가의 본의를 생각하였고, 아침저녁으로 매일 정토의 불사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먼 후손(雲仍)[1]먼 후손(雲仍) : 아래로 8대손인 운손(雲孫)과 7대손인 잉손(仍孫)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을 교육함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왕생의 길을 닦아 준 사람이었으니, 곧 세간과 출세간에 은거하는 납승이었다. 임술년(1922) 겨울에는 대웅전에 나아가서 향 사르는 소임을 받들었다. 갑자년(1924)에 다시 대웅전에 나아가서 향 사르는 임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무진년(1928) 겨울에는 가벼운 병을 보여 병상에 있으니 해은(海隱) 상족이 탕약을 시봉하였는데, 삼평(三平)과 왕상(王祥)과 맹종(孟宗)도 그를 능가하지 못할 만큼 부끄러움이 없었다. 경오년(1930) 정월 2일에 조용히 입적하였다. 문도들이 모여 다비를 하고 방장산에 진영을 모셨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관련주석
  • 주석 1 먼 후손(雲仍) : 아래로 8대손인 운손(雲孫)과 7대손인 잉손(仍孫)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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