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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고승전-취미선사전

원문
曹溪宗師翠微禪師傳 諱守初 字太昏 翠微其號也 姓成 系出昌寧 本朝名臣成三問之傍裔也 萬曆十八庚寅六月初三日 生於京城 兒戱必佛事 坐如入定僧 賦鳩之歲 喪考妣 依兄嫂 及志學 形未交 忽梵僧疾呼來何遲 吿兄以夢 求出家 以手窒口曰 勿出此語 才浹旬 踰城走雪岳 依敬軒落髮 丙午南抵頭流 首謁浮休 具尸羅 時碧嵓以小長老 居第一座 一日休師謂嵓曰 異日大吾道者必此沙彌 吾耄以付汝 好將護之 旣冠 遍叅區宇 有靑襟四五 以烏爲韻請詩 師立唫 其末云 平生無長物 唯有竹枝烏 一日嵓陞座 師遶三匝 設禮問難 嵓曰 何處得一擔紝婆子來師云 欲放下無着處 嵓以休之囑密指顯說印曰 宗門準的 崇禎己巳 衆請出世 乃開堂于玉川之靈鷲 相國張維遣琉璃珠一串 壬申被請關北 悟道雪峯 嶺外禪學 自此始矣 航海欲西遊未果 丁丑之太白 明年南還 省碧嵓嵓罷歸方丈 癸未請移七佛 衆盈三百壬辰自珎原 回錫智異 丙甲自寶盖之盤龍 有內翰申公 稱弟子云 己亥冬 以嵓老病 歸侍華嚴 明正月嵓順寂 移住曹溪大道場 前後一紀 寺有四大殿 闕像 命工塑之 四殿實六軀凡諸繪畫 其數幾千華嚴殿 八相殿藥師殿 觀音殿 丙午施絳紗于九月元淨 明年憩錫于黃崗深源 秋七月遷于妙香 閱拈頌偈 承春高下盡嬋妍 雨過喬林叫杜䳌 如服一杯降氣湯 胷次灑落 乃掩卷歎曰凡諸文字糟粕 豈有餘味也 至是據坐談柄 門風峭峻 明年一月 將歸嶺北二月甲申 移入五峯之三藏 四月己巳示疾 府伯洪公問藥 師却之曰 死生有數 藥安用爲 六月乙酉 靧浴更衣鳴楗訣衆曰 吾生七十有九 坐六十有五 何所嫌哉 勿塔勿銘 有索偈者 師曰勿撓定心 後三日丁亥 齋罷 念無量壽佛十聲 跏趺合爪而坐化 經七日闍維 六郡畢集 頂骨爆出 覺屹等 奉歸雪峯碧松臺 乞三七日 獲舍利二枚明年三月七日 安塔于五峯雪峯曹溪三處 門徒海蘭敏機喆照廣泐性聰等爲之首 壽七十九 夏六十五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조계종사 취미 선사전(曹溪宗師翠微禪師傳) 휘는 수초(守初)이고 자는 태혼(太昏)이며 호는 취미(翠微)이다. 속성은 성(成)씨인데 본은 창녕으로 조선 시대 명신인 성삼문의 방계 후손이다. 만력 18년 경인년(1590, 선조 23) 6월 3일에 경성에서 태어났다. 놀이에는 반드시 불사(佛事)를 흉내 냈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선정에 들어 있는 스님의 모습과 같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형과 형수에게 의지하였고, 지학(志學)의 나이에는 어떤 범승이 “어찌 이리도 늦었는가?”라고 버럭 나무라는 꿈을 꾸었다. 이에 형에게 꿈을 이야기하고 출가의 허락을 구하였지만, 형은 손으로 선사의 입을 막고 “그런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 성벽을 넘어 설악산으로 도망가서 경헌(敬軒) 스님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았다. 병오년(1606, 선조 39) 17세 때 남쪽의 두류산에 이르러 부휴 선수(浮休善修)에게 예배를 드리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 벽암 각성(碧巖覺性)은 소장로(小長老)로서 제일좌로 있었다. 어느 날 부휴가 벽암에게 말했다. “훗날 크게 깨치는 사람이 나온다면 반드시 이 사미가 그 주인공일 것이다. 이 늙은이가 그대에게 부촉하니 잘 이끌고 보호해 주거라.” 20여 세에는 방방곡곡을 두루 참방하였다. 선사에게는 네댓 명의 도반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烏)라는 글자를 가지고 운을 삼아서 시를 청했다. 선사는 먼저 금(唫) 자를 내놓더니, 마지막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平生無長物   평생 동안 사치품이란 없었는데 唯有竹枝烏   오로지 하나 대지팡이뿐이라오[1]대지팡이뿐이라오(竹枝烏) : ‘죽지오(竹枝烏)’를 오죽(烏竹)으로 만든 지팡이라는 의미 이외에 ‘대나무 지팡이(竹枝)뿐이라오(烏)’라는 시구로 활용한 재치를 보인 글이다. 어느 날 벽암이 법좌에 오르자, 선사가 법좌를 세 바퀴 돌고 나서 예배하고 질문드리니, 벽암이 말했다. “어디에서 한 동이를 얻었기에 베 짜는 노파가 찾아온 것인가?” 선사가 말했다. “내려놓고자 하나 집착거리가 없습니다.” 벽암이 부휴 선수에게서 전승받은 부촉을 은밀하게 지시하고 나서 그것을 설법으로 드러내어 인가하고 말했다. “그대야말로 종문의 표준이로다.” 숭정 2년 기사년(1629, 인조 7)에 대중의 청익을 받아들여 출세하고, 이에 옥천(玉川)의 영취사(靈鷲寺)에서 개당하였다. 상국(相國) 장유(張維)가 유리주(琉璃珠) 한 꾸러미를 보내 주었다.[2]당시 상국인 장유(張維)가 희고 상인(希古上人)으로 하여금 북한산에 절을 짓게 하고 특별히 취미 수초 선사를 강주로 청하였다. 그러나 선사가 이를 굳이 사양하고 춘파(春坡)를 천거하니, 선사를 더욱 존경하게 된 장유가 자거염주를 선물로 보낸 일화를 말한다. 임신년(1632, 인조 10)에는 관북(關北)에 초청되어 설법을 하다 『설봉어록(雪峯語錄)』을 읽고 오도(悟道)하였는데, 선사에게 있어서 영외(嶺外)의 선학(禪學)[3]영외의 선학 : 선학은 선의 종지(宗旨)·수행·교화 등을 의미한다. 영(嶺)은 대유령(大庾嶺)으로 강서성 임안부 대유현의 남쪽에 있는, 강서와 광동의 경계가 되는 산인데, 예로부터 그 북쪽을 영북이라 하고 남쪽을 영남이라 하였다. 선종사에서 영남은 조계 혜능으로부터 비롯된 남종선을 상징하고, 영외는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중 내지 종파 이외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지금 여기에서 영외는 철령(鐵嶺) 이북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중국을 가리킨다.에 대한 관심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유학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 15)에 태백산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다시 남쪽으로 돌아와서 벽암을 모셨는데 벽암 선사가 그만 방장산으로 돌아갔다. 계미년(1643, 인조 21)에는 초청을 받아 칠불암으로 옮겼는데 대중이 300명을 넘었다. 임진년(1652, 효종 3)에는 진원(珍原)으로부터 지리산으로 돌아와서 주석하였다. 병신년(1656, 효종 7)에는 보개산(寶蓋山)으로부터 반룡산(盤龍山)으로 갔는데 내한(內翰) 신 공(申公)이 제자를 자처하였다. 기해년(1659, 효종 10) 겨울에 벽암 노사께서 병에 걸리자 화엄사로 모시고 돌아왔다. 이듬해(1660, 현종 1) 정월에 벽암이 입적하였다. 이에 선사는 조계대도량(曹溪大道場)으로 옮겨서 전후 12년 동안 주석하였다. 사찰 내에 네 곳의 대전(大殿)이 있었는데 불상이 없어 장인에게 명하여 주조하도록 하였다. 네 곳의 대전에는 실제로 여섯 구의 불상을 비롯하여 많은 탱화가 있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이었다.(네 곳의 대전은 곧 화엄전·팔상전·약사전·관음전이다.) 병오년(1666, 현종 7) 9월에 원정(元淨)으로부터 강사포(絳紗袍)를 보시 받았다. 이듬해(1667, 현종 8)에 황강(黃崗)의 심원사(深源寺)에 주석하였다. 가을 7월에 묘향산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염송(拈頌)』에 수록된 게송을 열람하였다. 承春高下盡嬋妍   봄을 맞은 산과 강은 모두가 아름다운데 雨過喬林叫杜䳌   비가 그친 교목 숲에는 두견새 울어 댄다 如服一杯降氣湯   강기탕을 달여 한 잔을 쭉 들이켜니 胷次灑落 가슴이   상쾌하고 시원해 이내 책을 덮네 이에 탄식하여 말했다. “무릇 모든 문자는 술지게미와 같은 것인데 어찌 다른 맛이 있겠는가?” 이에 이르러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설법을 하여 문풍이 엄격하였다. 이듬해(1668, 현종 9) 정월에 장차 영북(嶺北)으로 돌아갈 것이라 고하고, 2월 갑신(甲申)일에 오봉(五峯)의 삼장사(三藏寺)에 들어갔다. 4월 기사일에 병기가 나타나자 부백(府伯)인 홍공(洪公)이 문약(問藥)하러 찾아오니 선사는 거절하고 말했다. “생과 사는 운명이지요. 그런데 어찌 약을 쓰겠습니까?” 6월 을유일에 회욕(靧浴)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서 목탁을 쳐서 대중에게 이별을 고하여 말했다. “나는 79년을 살아왔는데 65년을 출가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무엇이 불만이겠는가? 그러니 탑도 세우지 말고 비명도 새기지 말라.” 어떤 사람이 게송을 요구하자 선사가 말했다.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후 3일이 지난 정해일에 재를 마치고서 무량수불을 10성(聲) 염(念)하고 가부좌하여 합장한 채로 좌화(坐化)하였다. 7일이 지나서 다비를 하는 자리에 여섯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정골사리가 튀어나오자 각흘(覺屹) 등이 이를 받들어 설봉(雪峯)의 벽송대(碧松臺)로 모시고 돌아갔다. 21일에 걸쳐 사리 2매(枚)를 얻었다. 이듬해(1669, 현종 10) 3월 7일에 오봉산과 설봉산과 조계산의 세 곳에 탑을 세우고 안치하였다. 문도 중 해란(海蘭)·민기(敏機)·철조(喆照)·광륵(廣泐)·성총(性聰) 등이 상수제자들이다. 세수는 79세이고, 법랍은 65년이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관련주석
  • 주석 1 대지팡이뿐이라오(竹枝烏) : ‘죽지오(竹枝烏)’를 오죽(烏竹)으로 만든 지팡이라는 의미 이외에 ‘대나무 지팡이(竹枝)뿐이라오(烏)’라는 시구로 활용한 재치를 보인 글이다.
  • 주석 2 당시 상국인 장유(張維)가 희고 상인(希古上人)으로 하여금 북한산에 절을 짓게 하고 특별히 취미 수초 선사를 강주로 청하였다. 그러나 선사가 이를 굳이 사양하고 춘파(春坡)를 천거하니, 선사를 더욱 존경하게 된 장유가 자거염주를 선물로 보낸 일화를 말한다.
  • 주석 3 영외의 선학 : 선학은 선의 종지(宗旨)·수행·교화 등을 의미한다. 영(嶺)은 대유령(大庾嶺)으로 강서성 임안부 대유현의 남쪽에 있는, 강서와 광동의 경계가 되는 산인데, 예로부터 그 북쪽을 영북이라 하고 남쪽을 영남이라 하였다. 선종사에서 영남은 조계 혜능으로부터 비롯된 남종선을 상징하고, 영외는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중 내지 종파 이외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지금 여기에서 영외는 철령(鐵嶺) 이북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중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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