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계고승전-벽암 각성전

원문
曹溪宗師碧嵓覺性禪師傳 諱覺性 湖西報恩人 姓金 母曺氏 無子 齋禱北斗 夢古鏡有娠 萬曆乙亥十二月丁亥生 孝于親 不喜戱 九歲失怙 旣沒喪 忽遇過僧 傾心學禪 阿孃重離 旋感悟 之華山 禮雪默 師十四薙髮 受具于寶晶 師從浮休 入俗離山 歷德裕伽耶金剛等山 日閱貝葉 自是相隨不暫離 壬辰松雲倡義 旅軍關東 爲休徃問 避寇于山 必手經問難 癸巳松雲薦休于朝 檄致陣上 師亦杖釰 從天將破賊 海中漢人 盛贊之 庚子結夏七佛禪院 休病讓講於師 師辭不獲 登座討論 玄風丕振 丙午喪母謝徒 修齋薦福於俗離迦葉窟 盖業于休門二十餘年 入室傳法 自撰三箴云 恩不忘 面不愧 腰不屈也 飛走猶化 況㝡靈衆園 其剏修大者 華嚴松廣雙溪也 餘可略也 光海時休師爲妖所誣 偕入京 光海見二師 奇之放還 留師奉恩寺 爲判禪敎都㧾攝 仁祖朝徵師領緇 築南漢城 三年訖 賜報恩 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號并衣鉢 丙子在智異山 聞車駕幸南漢 乃鳴鼓 泣諭衆 衣戎衣 檄召衆 來赴者數千 相率而北 聞賊退痛哭而南後 命使日東 不敢辭 行中路 以病甚 請還山 庚辰八月 孝宗卽位 授以㧾攝印 裨衛赤裳史閣 坐化僧風 同年冬移居松廣寺 居無何 還栖華嚴 而己亥夏 孝宗卽位二十年賓天 秋九月奉諱哀叫 以酬國恩 庚子一月十二日 戒門徒曰 吾當行也 勿樹碑 爲門人請偈 於是 掇手寫曰 大經八萬偈 拈頌三千卷 足爲兼二利 何須別爲頌 悠然而化 奉而闍維 三南傾寺 七衆塡谷 三舍利 一靈骨 超然騰空 藏諸石鍾于四處 所著諸▼(弓*二) 不煩 壽八十六 夏七十二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조계종사 벽암 각성 선사전(曹溪宗師碧嵓覺性禪師傳) 휘는 각성(覺性)이고 호서 지방 보은(報恩) 출신이며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어머니는 조씨(曺氏)인데 아들이 없어서 북두성에 기도를 드렸다. 고경(古鏡)을 보는 꿈을 보고 임신을 하였는데, 만력 을해년(1575, 선조 8) 12월 정해시에 낳았다. 선사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였고 유희를 즐기지도 않았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상을 마치고 나서 홀연히 지나가던 스님을 뵙고는 온 마음을 기울여 좌선을 공부하였다. 이어서 고모[1]고모 : 원문은 ‘阿孃’으로 어머니를 가리킨다. 그러나 뒷부분에는 39세에 어머니를 여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는 달리 번역하였다.까지 돌아가시자 깨침으로 관심을 돌려서 화산으로 가서 설묵(雪默) 스님에게 참례하였다. 선사 나이 14세 때 머리를 깎고 보정(寶晶)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부휴 선수(浮休善修)를 따라서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덕유산과 가야산과 금강산 등을 유력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매일 대장경을 열람하였는데, 이로부터 항상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잠시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송운(松雲) 대사 사명(泗溟)이 의병을 일으켜서 관동 지방으로 나아가 부휴 선수에게 찾아가서 자문을 구하였고, 부휴 선사가 산속에서 왜적을 피하고 있었을 때도 반드시 소식을 전하여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자문을 구하였다. 이듬해 계사년(1593, 선조 26) 송운 대사가 부휴를 조정에 천거하여 진상(陣上)에 나아가자 선사도 무기를 들고 명나라 장군을 따라서 바다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이에 한인(漢人,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城))이 선사를 무척 찬탄하였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칠불선원(七佛禪院)에서 여름 안거를 지냈다. 부휴 선수가 병을 얻어 선사에게 논강(論講)을 미루자 선사가 부득이 사양하지 못하고 법좌에 올라 논강을 하여 깊고 오묘한 불법의 도리(玄風)를 크게 떨쳤다. 병오년(1606, 선조 39)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대중살이에서 물러나 속리산 가섭굴에서 천복(薦福)을 수재(修齋)하였다. 선사는 부휴의 문하에서 20여 년을 수행하고 입실하여 정법안장을 전수받았다. 이에 스스로 세 가지 잠언(三箴)을 지어서 말했는데, “은혜를 잊지 않는다, 체면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아첨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날짐승과 길짐승도 교화하였거늘 하물며 가장 신령하다는 승가대중(衆園)이겠는가. 선사가 중창하고 중수한 큰 사찰만 해도 화엄사·송광사·쌍계사 등이 있는데, 나머지 것은 생략한다. 광해군 시대에 부휴 선사가 요승(妖僧)에게 무고를 당하자 부휴 선사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광해군이 두 선사를 보고 훌륭하게 여겨 방면해 주고 선사를 봉은사에 주석하도록 하고, 1624년에는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㧾攝)에 제수하였다. 인조 시대에는 선사를 불러서 승려들을 통솔하여 남한산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3년에 걸쳐 공사를 마치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와 함께 의발(衣鉢)을 내려 주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에 지리산에 있다가,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북을 치고 눈물로 대중을 설득하여 군복을 입고 격문을 돌려서 불러 모으자 모여든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이들을 이끌고 북쪽(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벌써 적군에게 패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다시 남쪽(지리산)으로 내려왔다.[2]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국임을 선언하면서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벽암 각성은 이때 화엄사(華嚴寺)에 있다가 호남의 승군 3천 명을 일으켜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였다. 이후에 일본으로 가는 사신에 임명되자 사양하지 못하였는데 행로에 병이 도져서 산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경진년(1640, 인조 18) 8월에 효종이 즉위하자 총섭으로 제수를 받아서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사각(史閣)을 지켜 냈고(裨衛)[3]1640년 8월에 호남관찰사 원두표(元斗杓)의 진언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바로 앞에서 언급된 일본에 가는 사신으로 임명받은 것은 1641년으로서 규정도총섭을 제수받은 다음 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행장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아울러 승려의 가풍을 진작하였다. 또한 같은 해 겨울에는 송광사로 옮겼는데 얼마 안 있다가 다시 화엄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해년(1659) 효종 즉위 10년에 왕이 승하하자 그해 가을 9월에 왕의 죽음(奉諱)에 대하여 슬프게 울음으로써 국은(國恩)에 보답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 1) 정월 12일 문도들에게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제 갈 것이다. 비를 세우지 말라.” 이에 게송을 요청하는 문인들을 위하여 손으로 직접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大經八萬偈  대장경 팔만 사천의 게송과 拈頌三千卷  염송 삼천의 게송만 있으면 足爲兼二利  깨침과 교화에 다 충분한데 何須別爲頌  어찌 다른 게송이 필요하랴 그러고는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다비식을 하였는데 삼남 지방의 모든 사찰에서 칠부대중(七部大衆)이 와서 계곡을 가득 메웠다. 사리 3과와 영골 1매를 수습하였는데 갑자기 허공으로 치솟았고, 결국 네 곳의 석탑에 안치되었다. 저술한 여러 책들은 내용이 번잡하지 않았다. 세수 86세이고, 법랍은 72년이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관련주석
  • 주석 1 고모 : 원문은 ‘阿孃’으로 어머니를 가리킨다. 그러나 뒷부분에는 39세에 어머니를 여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는 달리 번역하였다.
  • 주석 2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국임을 선언하면서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벽암 각성은 이때 화엄사(華嚴寺)에 있다가 호남의 승군 3천 명을 일으켜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였다.
  • 주석 3 1640년 8월에 호남관찰사 원두표(元斗杓)의 진언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바로 앞에서 언급된 일본에 가는 사신으로 임명받은 것은 1641년으로서 규정도총섭을 제수받은 다음 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행장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관련기사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