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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열전-동진 대사전

원문
洞眞大師傳 師名慶[1]「慶」海東佛祖源流作「度」{編}。甫。字光宗。姓金氏。靈巖鳩林人也。父良益。作閼粲釋[2]「釋玄可書」甲本正誤表曰衍字。玄可書。母朴氏。咸通九年。相月七月㢤生三日明[3]「三日明」甲本正誤表作「明三日」。。 夜夢白鼠御[4]「御」甲本正誤表作「銜」。靑琉璃珠一顆而來[5]「來」甲本正誤表作「采」。。遂人語曰。此物。是稀代之奇珎。乃玄門之上寶。懷須護念。出必輝光。因有娠。虔心齋戒。如來出世之月四月二十日誕生。師志在其親。心期即佛。父母乃曰。人所欲者。天所從之。遂泣而許。直徃夫仁山寺落來。 因棲學藪。未樂禪山。迅足空留。宅心尙住。魂交之夕。金仙摩頂提耳。乃授之方袍曰。汝其衣之。所以衛身而行乎。且此地。非心學者。栖遲之所。去之。不亦宜乎。師即以形開。因以警戒。以爲送之。將行時。不可失。昧爽。坐以待旦。挈山裝鳥逝。乃詣白鷄山。謁道乘和尙。請爲弟子。修菩薩道。人[6]「人」甲本正誤表作「入」。如來家。覩奧之眼曾開。知幾之心旣悟。以爲非智。無以護其法。非戒。無以防其違。年十有八。禀具於月遊山華嚴寺。復徃白鷄山。辭大師。師因謂曰。汝其志。不可奪。勢不可遏。汝以吾爲東衆[7]「衆」甲本正誤表作「家」。丘。末如之何。遂笑而聽去。自爾。遊有泛覽。學無常師。歷謁聖住無染大師。崛山梵日大師。 談柄纔揮。玄機了見。遂於景福元年壬子春。出山翽翽。並海飄飄。爰傾入漢之心。乃告凌波之客。許之寓載。忻以同行。已過秦橋。旋臻漢地。雲心訪道。浪跡尋師。乃詣撫州踈山。謁匡仁和尙。仁若曰。格汝鯨海龍子耶。大師。玄言遂颺。秘說爰諮。許以昇堂。因以入室。方資目擊。旣得心傳。仁公大喜。因謂曰。東人。可目語者。惟子。誰令執手傳燈。因心授印。自是。僧之眞者。必詣。境之絕者。必搜。去謁江西老善和尙。和尙。乃欲聽其言。觀其行。因謂曰。白雲鎖斷行人路。答曰。自有靑山路。白雲那得留。和尙。以大師。捷對不覊。颺言無碍。乃送之曰。利有攸徃時然後行。適値歸舟。因而東還。天祐十八年夏。達全州臨陂郡。而屬道虛行之際。時不利之初。奧[8]「奧」甲本正誤表作「粵」。有州尊都統㼼大[9]「大」甲木正誤表作「太」次同。傳萱。統我于萬民堰也大[10]「傅」作「傳」{甲}次同。傅。本自善根。生於將種。方申壯志。雖先擒縱之謀。曁謁慈顏。倍贍依[11]「依」下甲本正誤表有「歸」。之志。乃歎曰。遇吾師而雖晩。爲弟子。以何遲。避席拳拳。書紳慥慥。遂請住州之离地。南福禪院。大師曰。鳥能擇木。吾豈瓠[12]「瓠」甲本正誤。表作「匏」。瓜。乃以白鷄山玉龍寺者。是故師爲樂道之淸齋。乃安禪之勝踐[13]「踐」甲本正誤表作「蹟」。。雲溪空在。枕流最宜。遂言於*大傅。許之。移而住焉。義恭大王。奉以遺風。繼之先志。注精心而亹亹。祈法力以孜孜。奄棄人間。已歸天上。文明大王。陟岡致美。莅阼重光。聯華弘天竺之風。握鏡照海邦之俗。仍飛鳳筆。佇降象軒。越三年。龍集協申[14]「申」甲本正誤表曰衍字。洽四月二十日。大師將徃[15]「徃」甲本正誤表曰衍字。徃盥[16]「盥」甲本正誤表作「▼((輿-車)*木)」。浴已訖。房前命衆。悉至于庭。乃遺戒曰。我旣將行。衆其好住。言畢入房。倚繩床趺坐。儼然而示滅于玉龍上院。存父母體。八十春。入菩薩位。六十二夏。翌日。奉遷神座於白鷄山合龍[17]「合龍」甲本正誤表作「龕」次同。。權施石戶封閉。文明大王。聞之。震悼。恨不憗[18]「▼(辶*(來+攵))」甲本正誤表作「慦」。遺。乃使駛吊以書曰。故玉龍禪和尙。片月遊空。孤雲出峀。乘桴西泛。掬瑤[19]「瑤」甲本正誤表作「珤」。東歸。慈風。吹萬里之邊。禪月。照九天之外者。惟實吾師矣。故追謚洞眞大寺[20]「寺」甲本正誤表作「師」。。塔號寶雲。仍令國工。攻石封層墜[21]「墜」甲本正誤表作「塚」。。越二年。門人等。開合龍覩。形面如生。乃號奉色身。竪塔于白鷄山東之雲巖崗。遵遺命也。厥有傳法大弟子。泉遵禪師等。遂抗表。請幼婦之文辭。紀先之事業。制曰可。豈悟號弓。逐値勒石。顯德五年。金廷彥撰文。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동진대사전(洞眞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경보(慶甫)이고 자는 광종(光宗)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 구림(鳩林)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양익(良益)이고 벼슬은 알찬(閼粲)이며 어머니는 박씨이다. 함통(咸通, 당 의종의 연호) 9년(경문왕 8, 868) 상월(相月) 음력 7월 재생명(哉生明) 초3일 밤에 그의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하얀 쥐가 푸르스레한 유리구슬 하나를 물고 와서 마치 사람처럼 말을 하였다. “이 물건은 이 세상에서 아주 보기 드문 기이한 보배입니다. 이는 곧 현문(玄門)[22]현문(玄門) : 불교 또는 도교를 말한다.의 최상의 보배입니다. 틀림없이 부처님의 호념(護念)이 따를 것이고 밖에 나오면 반드시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아이를 잉태하니 임신 기간에 경건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재계(齋戒)하였다. 선사는 여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달 4월 20일에 태어났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어버이 섬기는 일에 뜻을 두었으나 마음은 부처가 되겠다고 기약하였다. 그의 부모는 어느 날 그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꼭 하고 싶어 하면 하늘도 따르는 법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님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곧바로 부인산사(夫仁山寺)로 가서 머리를 깎고, 배움의 숲에 깃들어 미처 선(禪)이라는 산을 즐거워하지 못했다. 빠른 발(迅足 : 禪)이 허공에 머물러도 마음이란 집(宅心 : 敎)에 오히려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금선(金仙, 부처님)이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귀를 잡아당겨 방포(方袍, 가사)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는 이 옷을 입어라. 그 이유는 몸을 보호하여 수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곳은 마음을 닦는 이가 깃들어 있을 곳이 아니니 이곳을 떠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이에 놀라서 꿈을 깬 스님은 꿈속에서 들었던 말로 인하여 ‘장차 떠나가야 할 때이니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먼동이 틀 때까지 앉은 채로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이 되자 행장을 꾸려 가지고 철새처럼 길을 떠나 곧 백계산(白鷄山)으로 가서 도승(道乘, 道詵) 화상을 배알하고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였다. 그 후 보살도(菩薩道)를 닦고 여래의 집(如來家)으로 들어가 심오한 이치를 보는 눈이 일찍 열렸으며, 기미를 아는 마음을 이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슬기롭지 못하면 부처님의 바른 법을 지킬 수 없고 계율이 아니면 인간의 그릇된 행동을 막을 수 없다.’ 그러고는 18세 때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백계산(白鷄山)으로 가서 도승 대사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니 대사가 이렇게 말했다. “너의 그러한 뜻을 빼앗을 수 없고 형세를 막을 수 없구나. 너는 나를 동쪽 마을에 사는 공구(東家丘)[23]동가구(東家丘) : 유가(儒家)의 성인으로 추앙받던 공자孔子(이름은 丘)도 그가 살던 마을에서는 도리어 알려지지 않아서 그저 동쪽 마을 어느 집에 사는 공구(孔丘)라고 불리었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말. 즉 도승(道乘)은 자신을 공자에, 동진을 마을 사람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로만 알고 있으니 어찌 해 볼 길이 없다.” 대사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웃으면서 그가 떠나겠다는 것을 허락하였다. 스님은 그때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배웠는데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성주사(聖住寺)[24]성주사(聖住寺) : 충청남도 보령군에 있던 절.의 무염(無染) 대사, 굴산사(崛山寺)[25]굴산사(掘山寺) :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 있던 절. 847년(문성왕 9) 굴산 조사(崛山祖師) 범일(梵日)이 창건하여 전교하던 곳. 국보로 부도(제127호)와 당간지주(제128호)가 있다.의 범일(梵日) 대사를 차례로 배알하여 법문을 들었다. 말의 자루(談柄)를 겨우 휘두르기만 해도 현묘한 기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니, 마침내 경복(景福) 원년 임자(진성여왕 6, 892) 봄에 펄펄 나는 새처럼 산을 나와 나부끼는 바람처럼 바닷가에 이르렀다. 이에 중국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파도를 능멸하며 바다를 다니는 어느 나그네에게 간청하여 그에게서 배를 같이 타고 가자는 허락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이윽고 진(秦)나라 다리를 건너 한(漢)나라 땅에 이르러 구름 같은 마음으로 도가 높은 이를 찾아 방문하고 유랑하며 스승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주(撫州)에 있는 소산(疎山)으로 가서 광인(匡仁) 화상을 배알하니 광인 대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오라. 그대가 경해(鯨海)[26]경해(鯨海) : 동해(東海)를 이르는 말이며, 여기에서는 당시 신라 땅을 지칭해서 한 말이다.의 용의 새끼인가?” 동진 대사는 현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 말을 드날리고 비밀스런 법을 물어 대사가 승당(昇堂)할 것을 허락하니 그로 인해 입실(入室)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비로소 목격도존(目擊道存[27]목격도존(目擊道存) : 눈이 馬主치는 데 도가 있다는 뜻.의 법을 힘입어 이미 심전(心傳)을 얻게 되자 광인 화상은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동쪽 사람치고 정말 함께 도를 눈으로 이야기할 만한 자는 오직 그대뿐이로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의 손을 잡고 법등(法燈)을 전하고 인하여 마음으로 법인(法印)을 주었다. 동진 대사는 이때부터 승려로서 참다운 사람이면 반드시 찾아뵙고 경계가 절승(絶勝)한 곳이면 반드시 찾아다녔다. 강서(江西)로 가서 노선(老善) 화상을 배알하니, 화상은 동진의 말을 듣고 행동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흰 구름이 자물쇠가 되어 나그네의 길을 끊는구나.(白雲鎖斷行人路)” 그러자 동진 대사가 화답하였다. “푸른 산길은 저절로 있는 것이거늘 흰 구름이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自有靑山路。 白雲那得留。)” 화상은 대사가 민첩하게 대답하여 매임이 없고 말을 하되 걸림 없음을 보고 곧 전송(傳送)하며 말하였다. “그대가 가는 곳에는 이로움이 있을 것이니 때가 된 연후에 돌아가라.” 때마침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만나 동쪽(신라)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천우(天佑) 18년[28]후량(後梁) 용덕(龍德) 원년(신라 경명왕 5년, 고려 태조 4년)이다.(경명왕 5, 921) 여름에 전주 임피군(臨陂郡)에 이르니, 그때는 어느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로 유통되지 못하고 시국이 이롭지 못하게 된 초기였다. 그 당시 고을(完山)에서 가장 높은 도통(都統) 태부(太傅)[29]태부(太傅) : 고려 때 삼사에 속한 정1품 관직. 견훤(甄萱)이 만민언(萬民堰)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견(甄) 태부는 본래 선근(善根)을 심었던 사람으로서 장군의 집안에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한창 자신의 웅대한 뜻을 펴고자 사로잡았다가 놓아 주는 용병술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였으나 동진 대사의 자비한 모습을 뵙고는 흠모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늘어났다. 그리하여 찬탄하며 말하였다. “우리 스님을 만난 것이 비록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제자가 되는 일에 어찌 꾸물대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는 스님을 스승의 예로 정성을 다하여 대우하고 그 가르침을 띠에 새겼다. 마침내 전주의 남쪽에 있는 남복선원(南福禪院)에 주석하기를 간청하자 대사가 말하였다. “새들도 나무를 가려서 앉는 법인데 내가 어찌 표주박처럼 한 곳에 매달려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로 갔는데, 그곳은 옛 스승님께서 도를 즐기셨던 해맑은 집이었고 선정에 안주하셨던 명승지로서 구름 덮인 계곡물이 허공에 걸려 있으며 돌을 베개 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며 살기에는 아주 적절한 곳이다. 동진 스님은 견훤에게 말하여 옥룡사에 옮겨 살겠노라 하자 태부가 허락하고 그곳에 옮겨 거주하게 하였다. 고려 제2대 의공(義恭, 惠宗)대왕은 선대의 유풍을 받들고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정밀한 마음으로 정진에 힘쓰는 한편 스님을 정성껏 모시다가 홀연히 인간의 몸을 버리고 천상으로 돌아갔다. 문명대왕(文明大王)[30]문명대왕(文明大王) : 고려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시호이다.은 왕위에 오르기 전(陟岡)에는 아름다움을 이루셨고 왕위에 올라서는(莅阼) 거듭 빛나셨다(重光). 연꽃을 엮어서 천축(天竺)의 유풍을 널리 펴고 거울을 잡고 바다 나라에 풍속을 비추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임금께서는 붓을 휘둘러 동진 스님이 머물고 있던 절의 현판을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정종(定宗) 3년 태세(太歲)가 협흡(協洽, 즉 丁未)[31]정종 3년은 무신이고, 정종 2년이 정미로서 일치하지 않는다.인 4월 20일에 대사가 열반에 들었다. 대사는 열반에 들려고 할 무렵 목욕재계를 이미 마치고 방 앞에서 대중들을 모두 뜰 앞으로 모이게 한 다음 경계하는 말을 남겼으니 내용은 이러했다. “내 이제 곧 떠나려고 하니 그대들은 잘 머물러 있거라.” 말을 마치고는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기대어 가부좌를 하고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옥룡사 상원(上院)에서 열반에 드니, 부모로부터 받아 보전하던 몸의 나이는 80세이고 보살계를 받은 지는 62년이었다. 이튿날 스님의 신좌(神座)를 백계산 감실에 받들어 옮겨 모시고 임시로 돌문을 설치하여 봉함해 두었다. 문명대왕은 스님이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하늘이 그를 남겨두지 않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곧 사신을 보내 친히 쓴 조서(弔書)를 보내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작고하신 옥룡산 선화상(禪和尙)이시여, 조각달은 하늘에 걸려 있고 외로운 구름은 산마루에 나옵니다. 뗏목을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 구슬을 움켜쥐고 동쪽 나라 돌아오니 자비의 바람이 만 리 변두리에 불어 오고 선정의 달빛이 구천(九天) 밖까지 비추게 하신 분은 오직 저의 스승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동진대사(洞眞大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옵고 ‘보운(寶雲)’이라는 탑호를 올리나이다.” 그러고는 국가의 가장 솜씨가 뛰어난 석공石工을 명하여 돌을 다듬어서 층층으로 된 돌무덤을 만들게 하여 유골을 모시게 하였다. 그 후 2년이 지난 뒤에 문인들이 석실(石室)을 열고 모습을 보니 그 얼굴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모두 통곡하면서 스님의 육신을 받들어 모셔다가 백계산 동쪽 운암(雲巖) 산등성이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니, 이는 대사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대사에게 법을 전해 받은 큰 제자 천준(泉遵, 泉通) 선사 등이 왕에게 표表를 올려 부디 절묘한 문장(幼婦之文辭)[32]절묘한 문장(幼婦之文辭) : 조아비(曺娥碑)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조아는 한(漢)나라 조우(曺盱)의 딸로서 14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물을 건너다가 익사(溺死)하였다. 조아는 17일 동안을 부르짖고 울다가 물에 투신했는데, 5일이 지난 후에 죽은 시체가 되어 그 아비의 시체를 끌어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 당시에 한단순(邯鄲淳)이, 조아는 효녀라 일컫고 뇌문(誄文)을 지었다. 그 후 이 뇌문을 비에 새겼는데, 글씨가 왕희지의 작품이라고 한다. 동한(東漢) 때 채옹(蔡邕)이 이 비문을 읽고 뛰어나게 잘 지은 문장이란 뜻으로,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는데, 그 후 삼국시대 조조(曺操)와 양수(楊修)가 이 글귀를 읽고서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뜻이라고 해득했다. 그 이유는 황견(黃絹)이란 색사(色絲)이니, 절(絶) 자이고, 유부(幼婦)란 소녀(少女)이니 묘(妙) 자이며, 외손(外孫)이란 여자(女子)이니 호(好) 자이고, 제구(虀臼)란 수신(受辛)이니 사(辭) 자라는 것이다.으로 비문을 지어 돌아가신 스님의 업적을 기록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왕이 비답을 내려 “옳은 일이다.”라고 허락하였으니, 어찌 청원하자마자 그렇게 빨리 비석에 새겨질 줄 알았겠는가? 현덕(顯德, 後周 世宗의 연호) 5년(고려 광종 9, 958)에 김정언(金廷彥)[33]김정언(金廷彦) : 958년(광종 9) 통직랑 정위 한림학사(通直郞正衛翰林學士)가 되었고, 975년(경종 즉위년) 광록대부 대승 내봉령 전예부사 참지정사 감수국사(光祿大夫大丞內奉令前禮部使參知政事監修國史)를 지냈다. 문장에 능하여,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옥룡사지에 있는 옥룡사동진대사보운탑비(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의 비문을 958년(광종 9)에 지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의 비문을 975년에 지었으며,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지에 있는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의 비문을 978년(경종 3)에 지었다.이 비문을 지었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관련주석
  • 주석 1 「慶」海東佛祖源流作「度」{編}。
  • 주석 2 「釋玄可書」甲本正誤表曰衍字。
  • 주석 3 「三日明」甲本正誤表作「明三日」。
  • 주석 4 「御」甲本正誤表作「銜」。
  • 주석 5 「來」甲本正誤表作「采」。
  • 주석 6 「人」甲本正誤表作「入」。
  • 주석 7 「衆」甲本正誤表作「家」。
  • 주석 8 「奧」甲本正誤表作「粵」。
  • 주석 9 「大」甲木正誤表作「太」次同。
  • 주석 10 「傅」作「傳」{甲}次同。
  • 주석 11 「依」下甲本正誤表有「歸」。
  • 주석 12 「瓠」甲本正誤。表作「匏」。
  • 주석 13 「踐」甲本正誤表作「蹟」。
  • 주석 14 「申」甲本正誤表曰衍字。
  • 주석 15 「徃」甲本正誤表曰衍字。
  • 주석 16 「盥」甲本正誤表作「▼((輿-車)*木)」。
  • 주석 17 「合龍」甲本正誤表作「龕」次同。
  • 주석 18 「▼(辶*(來+攵))」甲本正誤表作「慦」。
  • 주석 19 「瑤」甲本正誤表作「珤」。
  • 주석 20 「寺」甲本正誤表作「師」。
  • 주석 21 「墜」甲本正誤表作「塚」。
  • 주석 22 현문(玄門) : 불교 또는 도교를 말한다.
  • 주석 23 동가구(東家丘) : 유가(儒家)의 성인으로 추앙받던 공자孔子(이름은 丘)도 그가 살던 마을에서는 도리어 알려지지 않아서 그저 동쪽 마을 어느 집에 사는 공구(孔丘)라고 불리었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말. 즉 도승(道乘)은 자신을 공자에, 동진을 마을 사람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 주석 24 성주사(聖住寺) : 충청남도 보령군에 있던 절.
  • 주석 25 굴산사(掘山寺) :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 있던 절. 847년(문성왕 9) 굴산 조사(崛山祖師) 범일(梵日)이 창건하여 전교하던 곳. 국보로 부도(제127호)와 당간지주(제128호)가 있다.
  • 주석 26 경해(鯨海) : 동해(東海)를 이르는 말이며, 여기에서는 당시 신라 땅을 지칭해서 한 말이다.
  • 주석 27 목격도존(目擊道存) : 눈이 馬主치는 데 도가 있다는 뜻.
  • 주석 28 후량(後梁) 용덕(龍德) 원년(신라 경명왕 5년, 고려 태조 4년)이다.
  • 주석 29 태부(太傅) : 고려 때 삼사에 속한 정1품 관직.
  • 주석 30 문명대왕(文明大王) : 고려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시호이다.
  • 주석 31 정종 3년은 무신이고, 정종 2년이 정미로서 일치하지 않는다.
  • 주석 32 절묘한 문장(幼婦之文辭) : 조아비(曺娥碑)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조아는 한(漢)나라 조우(曺盱)의 딸로서 14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물을 건너다가 익사(溺死)하였다. 조아는 17일 동안을 부르짖고 울다가 물에 투신했는데, 5일이 지난 후에 죽은 시체가 되어 그 아비의 시체를 끌어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 당시에 한단순(邯鄲淳)이, 조아는 효녀라 일컫고 뇌문(誄文)을 지었다. 그 후 이 뇌문을 비에 새겼는데, 글씨가 왕희지의 작품이라고 한다. 동한(東漢) 때 채옹(蔡邕)이 이 비문을 읽고 뛰어나게 잘 지은 문장이란 뜻으로,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라는 여덟 글자를 새겼는데, 그 후 삼국시대 조조(曺操)와 양수(楊修)가 이 글귀를 읽고서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뜻이라고 해득했다. 그 이유는 황견(黃絹)이란 색사(色絲)이니, 절(絶) 자이고, 유부(幼婦)란 소녀(少女)이니 묘(妙) 자이며, 외손(外孫)이란 여자(女子)이니 호(好) 자이고, 제구(虀臼)란 수신(受辛)이니 사(辭) 자라는 것이다.
  • 주석 33 김정언(金廷彦) : 958년(광종 9) 통직랑 정위 한림학사(通直郞正衛翰林學士)가 되었고, 975년(경종 즉위년) 광록대부 대승 내봉령 전예부사 참지정사 감수국사(光祿大夫大丞內奉令前禮部使參知政事監修國史)를 지냈다. 문장에 능하여,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옥룡사지에 있는 옥룡사동진대사보운탑비(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의 비문을 958년(광종 9)에 지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의 비문을 975년에 지었으며,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지에 있는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의 비문을 978년(경종 3)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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