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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열전-도선국사전

원문
道詵國師傳 師名道詵。字玉龍。號烟起。姓崔氏。朗州鳩林村人也。其母崔氏。冬喫於井瓜娠。生無父。從母姓。生而棄林。衆鳩乳養。異而復收。因名鳩林。十三歲。隨唐船入唐。唐一行禪師。甞曰。洞水逆流。則傳吾道者來。門人記其言。一日門人。走報曰。今日洞水逆流矣。一行聞之。即具威儀。出門外。道詵忽來叅。行曰。待之久矣。何其遲也。相與大悅。即迎入留。詵。盡得其術而告去。行。別曰。吾道東矣。珎重。仍寄一封丹書而誡曰。愼勿速開。囑王氏家。待七年後開示。詵。到松都。宿王隆家。仰觀天象。俯察地理。歎曰。明年必生貴子。以救塗炭之苦。隆。聞之。倒屣而出。明年果生王建太祖。隱山碑略曰。一行。囑道詵云。佛者太[1]「太」甲本正誤表作「大」。醫王也。以之[2]治身則灾病消。以之治心。則煩惱亡。以之 「之」下甲本正誤表有「治」。山川土地。則凶害變爲吉利。裨補之設。比如艾也。且艾者。爲世良藥。無病者見之。如糞土。雖在家苑。無事於[3]「於」下甲本正誤表有「採」。也。若有病者則不然。得善醫者。灸之。沉痾之頓愈。捷於影響。雖萬金之重。無得比焉者。以其效之有神驗也。汝東國三故。群山竟其險。衆水爭其犇。或有如龍如虎之相鬪者。或有如禽如獸之飛走者。或有自彼而來攻者。或有斷徹而不及者。比則多病之人也。故或作九故。或作三韓。互相侵伐。兵革不息。盜賊橫行。法旱不調者。皆以此也。汝今纹佛法爲艾。而醫之於山川。則若缺者補之。過者抑之。走者止之。背者招之。賊者防之。爭者禁之。善者樹之。吉者揚之。觀其痛痒之地勢。或豎浮屠。或設塔建寺。至於三千八百餘所。汝國山川病咎。無不潛伏。此裨補之設。所以爲療病而作也。如此然後。汝三韓。可渾爲一家。盜賊。可化爲新民。至於風雨順時。人民和淳也。後之王臣。若不知治平之政。妄爲無益之事。以煩家國。不如姑去之。以觀其吉凶。何異乎。病者。忘其醫曰。妄用無效之藥。以殘吾生。不如姑去之。以觀其痊否之歟。及其危沒。悔之何及哉。詵。唐僖宗乾符二年。新羅憲康王元年乙未來。時年四十九。告于朝。先建五百禪刹。唐昭宗光化元年。新羅孝恭王二年三月十日。奄然而示寂。享年七十二。道岬寺碑。李景奭作。求禮燕谷寺。有二浮屠。一師浮屠。一母浮屠。光陽白鷄山玉龍寺。高麗崔惟淸撰碑曰。師姓金氏。母姜氏。夢人遺明珠一顆。使呑之。有娠。父母。知其必爲法器。心許出家。年至十五。頴悟鳳成。兼解技藝。遂祝髮。月遊山華嚴寺。讀習大經。不閱歲。已通大義。學徒百千。咸所駭服。以爲神聦。至文聖王八年。年二十矣。于時。慧徹大師。傳密印於西堂智藏禪師。開堂演說於桐裡山。永益者。多歸師。摳衣禪門。請爲弟子。年二十三。受具於慧徹大師。憲康大王。敬其高德。遣使奉迎。一見如舊。以玄言妙道。開發君心。未幾。歸本寺。召弟子曰。吾將行矣。乘緣而來。緣盡則去。理之常也。何足居此乎。奄然而寂。時光化元年三月十日也。享年七十二。遂遷座立塔於寺之北崗。遵遺命也。孝恭王聞之。悼歎贈謚曰。了空禪師。名塔曰。證聖慧燈。「太」甲本正誤表作「大」。「之」下甲本正誤表有「治」。「於」下甲本正誤表有「採」。門人洪寂等。懼先師之景行不傳。奉表乞述。王。乃命朴仁範爲碑文。竟未鐫石。麗顯王。贈大禪師。肅祖。加王師。恭孝王。封先覺國師。師所傳陰陽說數篇。世多有。後之地理者。皆宗焉。銘曰云云。天德二年庚午七月乙亥九日癸未立。評曰。李崔二碑。互有異說。不可準信。無父母姓。及學一行爲記。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도선국사전 스님의 법명은 도선(道詵)이고 자는 옥룡(玉龍)이며, 호는 연기(烟起)이고 성은 최씨이며, 낭주(朗州)[4]낭주(朗州) : 전라남도 영암군의 옛 이름.구림촌(鳩林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최씨가 겨울에 우물 속의 오이를 먹고 아이를 잉태하여 아비가 없이 태어났으므로 어머니의 성을 따라 최씨라 하였다. 낳자마자 숲속에 버렸는데 수많은 비둘기가 젖을 먹여 길러 주었다. 기이하게 여겨서 다시 거두어 길렀는데 그로 인하여 그 숲의 이름을 구림(鳩林)이라고 하였다. 13세 때 당나라 배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당나라 일행(一行) 선사가 일찍이 말하였다. “고을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나의 도道를 전할 사람이 올 것이다.” 그의 문인 중에 한 사람이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인이 달려와 보고하였다. “오늘 고을의 물이 거꾸로 흐르고 있습니다.” 일행이 그 말을 듣고 곧 위의를 갖추고 문 밖으로 나갔더니, 도선이 갑자기 찾아와 참배하였다. 일행이 말하였다. “기다린 지 오래되었거늘 왜 이렇게 늦었는가?” 그러고는 서로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맞아들여 머물게 하였다. 도선이 그의 술법을 모두 터득하고 떠나가겠다고 아뢰자 일행 선사가 송별하면서 말하였다.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는구나. 조심해서 가게.” 그러고는 꼭꼭 봉한 단서(丹書) 한 권을 주면서 타일러 말하였다. “부디 성급하게 열어 보지 말게. 그대에게 왕씨(王氏) 가문을 부탁하니 7년쯤 기다렸다가 그 뒤에 열어 보게.” 도선이 송도(松都)에 도착하여 왕륭(王隆)[5]왕륭(王隆) : ?~897. 부인은 한씨(韓氏).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궁예(弓裔)가 군왕을 자칭하고 일어섰을 때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서 군졸을 이끌고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그를 금성 태수(金城太守)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수축하고 아들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요청하자 왕이 그 말대로 따랐다.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의 집에 유숙하면서 하늘의 기상을 우러러 관찰하고 지리를 굽어 살펴보고는 찬탄하며 말하였다. “내년에 틀림없이 귀한 아들을 낳을 터인데 이 아이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지게 될 것이다.” 왕륭이 그 말을 듣고 신을 거꾸로 신고 나가서 그를 맞아들였다. 그 이듬해에 과연 고려 태조가 될 왕건(王建)을 낳았다. ‘은산비(隱山碑)’에는 대략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행이 도선 국사에게 부촉하며 말하기를, ‘부처님은 큰 의왕(醫王)이시다. 부처님의 법으로 몸을 치료하면 재앙과 질병이 다 사라질 것이요, 또한 그 법으로 마음을 치료하면 온갖 번뇌가 다 없어질 것이며, 그 법으로 산천과 토지를 다스리면 흉하고 해로운 일이 길하고 이롭게 변할 것이다. 비보(裨補)를 시설하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약쑥과 같다. 약쑥은 세상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좋은 약이 되지만, 아무 병이 없는 사람이 그걸 보면 더러운 흙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리 집 뜰 안에 있다 하더라도 채집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만약 병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다. 훌륭한 의사를 만나 그 쑥으로 뜸을 뜨면 아무리 뿌리가 깊은 병도 완전하게 치료되는 것이 마치 메아리나 그림자보다 더 빠르다. 비록 만금의 소중한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쑥의 가치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그 효험이 아주 신속하기 때문이다. 너희 동쪽 나라 삼한의 지세를 살펴보면 많은 산이 험악함을 다투고 몰려드는 물 또한 치달림을 다투고 있다. 그 형세가 용이 다투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호랑이가 다투는 것 같기도 하며 혹 새가 날고 짐승들이 달리는 듯하기도 하다. 혹은 저쪽에서 공격해 오는 모습 같기도 하고, 혹은 미약하게 끊어져서 격(格)에 미치지 못하는 형세도 있다. 이를 비유하면 마치 질병이 많은 사람과 같다. 그런 까닭에 나라가 혹은 아홉 나라가 되기도 하고, 혹은 삼한이 되어 서로 침략하고 정벌하며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도적 떼들이 횡행하고 기후가 고르지 못해서 장마와 가뭄의 피해가 생기는 것 따위가 다 이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약쑥을 삼아 산천의 폐단을 치료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부족한 것은 보충될 것이고 넘치는 것은 억제될 것이며, 치달리는 것은 멈추게 되고 배반하는 것은 불러들이게 될 것이며, 도적을 방어할 수 있게 되고 싸우는 것은 금지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선한 일은 세우게 될 것이요 길(吉)한 일은 드날리게 될 것이니라. 아프고 가려운 병든 지리의 형세를 살펴보아서 혹은 부도(浮屠)를 세우기도 하고 혹은 탑을 세우거나 절을 짓되 그 숫자가 3,800여 곳에 이르면 너희 나라 산천의 병든 허물이 잠복(潛伏)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비보의 시설법은 바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고 난 뒤에야 너희 삼한은 뭉쳐서 한 나라로 될 수 있을 것이요, 도적들도 변화되어서 새로운 백성이 될 것이며, 비바람이 때에 순응하여 농사가 잘되고 백성들도 화목하고 순박해질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임금과 신하들이 만일 나라를 잘 다스려 평화롭게 만드는 정치를 모르고 함부로 아무 이익이 없는 일을 해서 나라를 번거롭게 할 수도 있으니, 우선 그런 일부터 제거해 버려서 저 길하고 흉한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관찰해 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병든 사람이 저 의사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함부로 아무 효험도 없는 약을 먹어서 나의 생명을 쇠잔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의원을 물리쳐서 질병을 고쳐야 할지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지를 관찰해 보는 것만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난 뒤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도선은 당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2년, 신라 헌강왕(憲康王) 원년 을미(875)에 귀국하였으니 그때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는 조정에 아뢰어 먼저 500여 선종(禪宗) 사찰을 건립했다. 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원년, 신라 효공왕(孝恭王)[6]효공왕(孝恭王) : 신라의 제52대 왕. 재위 897∼912. 정강왕(定康王)의 서자. 어머니는 의명태후(義明太后) 김씨. 비는 이찬(伊飡) 우겸(又謙)의 딸 김씨. 907년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기고도 환락의 세월을 보냄으로써 후삼국을 탄생케 하였다. 2년(898) 3월 10일에 문득 열반에 드니 누려온 나이 72세였다. 도갑사(道岬寺)[7]도갑사(道岬寺) :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에 있는 절.의 비명(碑銘)은 이경석(李景奭)[8]이경석(李景奭) : 조선 인조 때의 문신. 1595~1671.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쌍계(雙溪). 병자호란 때 부제학으로 삼전도 한비의 비문을 쓰고, 척화신으로 심양(瀋陽)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영의정을 지냈고,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다. 저서로 『백헌집』이 있다.이 지은 것이다. 구례 연곡사(燕谷寺)에도 부도 2구가 있는데, 하나는 도선 국사의 부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머니의 부도이다. 전남 광양군(光陽郡)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있는, 고려 최유청(崔惟淸)[9]최유청(崔惟淸) : 고려 시대의 문신. 1095~1174.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 초 이자겸의 간계로 파직당했다. 이후 다시 돌아와 1132년 진주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1142년에는 간의대부로서 금나라에 가 책명을 사하고 돌아와 호부시랑이 되었다. 처남들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가 다시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1172년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이 지은 비명은 다음과 같다. “스님의 속성은 김씨이고 어머니는 강(姜)씨이다. 어머니의 꿈에 어떤 사람이 맑은 구슬 하나를 주면서 삼키라고 하기에 그 구슬을 삼켰더니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그 아이가 틀림없이 법의 그릇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처음부터 그가 출가할 것을 마음속으로 허락하고 있었다. 나이 15세(842)가 되자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겸하여 기예까지 통달하였다. 월유산(月遊山)[10]월유산(月遊山) :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혹자들은 영암 월출산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월출산의 옛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이었다. 화엄사(華嚴寺)에 가서 머리 깎고 불경을 읽었는데, 한 해도 채 못 되어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 백천이나 되는 많은 학도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하며 귀신같은 총명이라고 하였다. 문성왕(文聖王) 8년(847) 20세 때의 일이었다. 때마침 혜철(慧徹) 대사께서 서당 지장(西堂智蔵) 대사에게 밀인(密印)[11]밀인(密印) : 인계(印契). 부처님과 보살에게는 각기 본원(本願)이 있고, 그 본원을 표치하기 위하여 두 손과 열 손가락으로써 여러 가지 모양을 짓는다. 이것이 본원의 인상(印象)이며, 인계(印契)이므로 인(印)이라 하고 그 이치는 비밀하고 아주 깊은 것이므로 밀(密)이라 한다. 선종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법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을 전해 받고, 동리산(桐裏山)[12] 동리산(桐裏山) : 전라남도 곡성군과 순천시에 걸쳐 있는 산. 대안사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와 대안사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이 있다. 산봉우리가 봉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봉두산(鳳頭山)이라고도 한다. 산기슭에는 태안사(泰安寺)가 자리 잡고 있는데, 대안사(大安寺)라고도 한다. 일주문(전남유형문화재 83)의 현판에는 ‘동리산태안사(棟裏山泰安寺)’라고 되어 있다. 태안사를 둘러싼 산세가 봉황이 즐겨 앉는 오동나무의 줄기 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서 동리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에서 법석을 열고 법을 설하시니, 영원한 유익함을 얻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스님에게 귀의하였다. 이에 대사께서 선문(禪門)에 귀의하여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도선의 나이 23세(850)에 혜철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헌강대왕(憲康大王)[13]헌강대왕(憲康大王) : 신라의 제49대 왕. 재위 875∼886. 경문왕·문의왕후(文懿王后)의 아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 즉위하자 문치에 힘썼으며, 876년 황룡사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880년 처용무(處容舞)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가 이룩되었으나, 이때부터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이 그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맞이하여 한 번 보고는 옛 친구를 본 듯이 기뻐하였다. 스님은 깊은 이치가 담긴 말씀과 미묘한 도리로 왕의 마음을 열어 주곤 했다. 얼마 안 되어 간청하여 본사(本寺)로 돌아갔다. 제자들을 불러 말하였다. ‘나는 장차 갈 것이다. 장부가 인연을 타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어찌 이 세상에 더 머물겠는가?’ 그러고는 문득 적멸에 들었으니, 그때가 광화(光化) 원년(신라 효공왕 2, 898) 3월 10일이었다. 향년은 72세였다. 절 뒤편 산으로 스님의 사리를 옮기고 사찰 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스님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효공왕이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특별히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하사하였고 탑 이름을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하였다. 문인 홍적(洪寂) 등이 돌아가신 스승의 높은 행적이 전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비명(碑銘) 써주기를 청하니, 왕이 곧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朴仁範)[14]박인범(朴仁範) : 신라 후기의 학자.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례부시랑(守禮部侍郞)을 지냈다.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898년(효공왕 2) 승려 도선의 비문을 지었으며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시 10수가 전한다.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끝내 돌에 새기지는 못하였다. 고려 현종(顯宗)이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였고, 숙종(肅宗) 임금이 다시 ‘왕사(王師)’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며, 공효왕은 ‘선각국사(先覺國師)’에 봉하였다. 국사께서 전한 음양설(陰陽說) 여러 편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며, 뒤에 지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책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명(銘)에 이르기를…생략….” 천덕(天德) 2년 경오(고려 의종 4, 1150) 7월 을해 9일 계미에 비를 세웠다. 평론하여 말하기를, “이경석과 최유청의 두 비석이 서로 다른 설이 있으니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야 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부모의 성과 일행에게 배운 기록이 없다.”고 하였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관련주석
  • 주석 1 「太」甲本正誤表作「大」。
  • 주석 2 治身則灾病消。以之治心。則煩惱亡。以之 「之」下甲本正誤表有「治」。
  • 주석 3 「於」下甲本正誤表有「採」。
  • 주석 4 낭주(朗州) : 전라남도 영암군의 옛 이름.
  • 주석 5 왕륭(王隆) : ?~897. 부인은 한씨(韓氏).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궁예(弓裔)가 군왕을 자칭하고 일어섰을 때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서 군졸을 이끌고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그를 금성 태수(金城太守)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수축하고 아들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요청하자 왕이 그 말대로 따랐다.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 주석 6 효공왕(孝恭王) : 신라의 제52대 왕. 재위 897∼912. 정강왕(定康王)의 서자. 어머니는 의명태후(義明太后) 김씨. 비는 이찬(伊飡) 우겸(又謙)의 딸 김씨. 907년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기고도 환락의 세월을 보냄으로써 후삼국을 탄생케 하였다.
  • 주석 7 도갑사(道岬寺) :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에 있는 절.
  • 주석 8 이경석(李景奭) : 조선 인조 때의 문신. 1595~1671.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쌍계(雙溪). 병자호란 때 부제학으로 삼전도 한비의 비문을 쓰고, 척화신으로 심양(瀋陽)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영의정을 지냈고,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다. 저서로 『백헌집』이 있다.
  • 주석 9 최유청(崔惟淸) : 고려 시대의 문신. 1095~1174.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인종 초 이자겸의 간계로 파직당했다. 이후 다시 돌아와 1132년 진주사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1142년에는 간의대부로서 금나라에 가 책명을 사하고 돌아와 호부시랑이 되었다. 처남들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가 다시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며, 1172년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 주석 10 월유산(月遊山) :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혹자들은 영암 월출산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월출산의 옛 이름은 월생산(月生山)이었다.
  • 주석 11 밀인(密印) : 인계(印契). 부처님과 보살에게는 각기 본원(本願)이 있고, 그 본원을 표치하기 위하여 두 손과 열 손가락으로써 여러 가지 모양을 짓는다. 이것이 본원의 인상(印象)이며, 인계(印契)이므로 인(印)이라 하고 그 이치는 비밀하고 아주 깊은 것이므로 밀(密)이라 한다. 선종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법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 주석 12 동리산(桐裏山) : 전라남도 곡성군과 순천시에 걸쳐 있는 산. 대안사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와 대안사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이 있다. 산봉우리가 봉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봉두산(鳳頭山)이라고도 한다. 산기슭에는 태안사(泰安寺)가 자리 잡고 있는데, 대안사(大安寺)라고도 한다. 일주문(전남유형문화재 83)의 현판에는 ‘동리산태안사(棟裏山泰安寺)’라고 되어 있다. 태안사를 둘러싼 산세가 봉황이 즐겨 앉는 오동나무의 줄기 속처럼 아늑하다고 해서 동리산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
  • 주석 13 헌강대왕(憲康大王) : 신라의 제49대 왕. 재위 875∼886. 경문왕·문의왕후(文懿王后)의 아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 즉위하자 문치에 힘썼으며, 876년 황룡사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880년 처용무(處容舞)가 크게 유행하였으며,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가 이룩되었으나, 이때부터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 주석 14 박인범(朴仁範) : 신라 후기의 학자.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례부시랑(守禮部侍郞)을 지냈다.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898년(효공왕 2) 승려 도선의 비문을 지었으며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시 10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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