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편, 선원소류번안호단(禪源溯流飜案護短) 조에 수록된 ‘상현왈(尙玄曰)’의 일부이다. 내용은 혜암 윤장(惠庵允藏, 생몰년 미상) 스님이 화엄사에서 강단을 열자 40리 근방의 대중 1,500명이 그를 따랐는데, 전라도 관찰사의 무고로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가 문도들의 상소로 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정조실록』 9년(1785) 3월 16일 을축일 첫 번째 기사에서는 스님이 일찍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를 간 일이 확인된다.
원문
惠庵玧藏。本在順天大興寺。後移求禮華嚴寺開講壇。千五百衆隨之。四十里相屬。爲全羅道觀察使趙某所搆誣。啓竄濟州。惠庵門徒等上辨伸理。反竄趙某于濟州。師自濟州還。相逢海上。惠庵責之。又仁岳義沾。上其師惠庵書。甲辰之事。不忍言也云云者。卽指此亂也。又叢林相傳以爲。惠庵乃喚醒和尚轉世以償其宿冤云云。
※출처: ‘CBETA Online’, 中華電子佛典協會
번역문
혜암 윤장(惠庵玧藏)은 본래 순천 대흥사에 살다가 뒤에 구례 화엄사로 옮겨 강단(講壇)을 열었는데, 40리 근방 1천 5백 명의 대중이 그를 따랐다. 전라도 관찰사 조(趙) 아무개의 무고에 걸려 제주에 유배를 당하였다. 혜암의 문도들이 위에다 사리를 따져 보고하자 이번에는 조 아무개가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스님이 제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만났는데, 혜암이 그를 책망하였다. 또 인악 의첨이 그의 스승 혜암에게 올린 편지에 “갑진년의 일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일이 바로 이 난리를 가리킨다. 또 총림에서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했는데, “혜암스님과 환성스님은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묵은 원한을 갚는다.”는 이야기가 그런 예이다.
※출처: 『역주 조선불교통사』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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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정조 9년 3월 16일원문 問曰: "汝與金履容酬酢之說, 直告。" 供曰: “金履容果來見, 而蓋年前冷井洞 鄭來謙家, 屢次相逢者也。 金履容問於臣曰: ‘求禮花嚴寺僧允藏, 曾以其寺藏置《鄭鑑錄》之罪, 配黑山島, 而吾素知其人, 能文善誦經矣。’ 臣曰: ‘《鄭鑑錄》, 吾雖未目見, 而聞香嶽之言洋海者, 則其中有曰: 「我國歷六百年後, 有百年干戈之說, 而《眞凈秘訣》, 與《鄭鑑錄》相符云。 所謂三家, 卽鄭、金、劉三姓, 而百年干戈, 吾輩生前, 似無此慮」 云。’ 則金履容亦聞而喜之矣。 至於坤帝玄神等說, 臣果有酬酢, 而洪福榮, 以其妻之沮戲下鄕, 故有此祈禱之事矣。” ※출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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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윤장혜암 윤장(惠庵玧藏, 생몰년 미상) 스님은 법호가 혜암, 법명이 윤장으로 18세기에 활동하였다. 스님의 법맥은 조관 용담(慥冠龍潭, 1700~1762)→혜암 윤장→기암 이준(畸庵以懏)→제월 의경(霽月義敬)→응암 치영(應庵致永)→진응 혜찬(震應慧燦, 1873~1941)→철운 종현(鐵雲宗玄)으로 전승되었다. 해남 대흥사에 주석하다가 화엄사로 옮겨 강단을 열었으며, 이때 40리 근방 1,500명의 대중이 스님을 따랐다고 한다. 스님은 추파 홍유(秋波 泓宥, 1718~1774)스님과 교유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는 『추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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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집-사면 후에 혜암 화상에게 부쳐 드림「사면 후에 혜암 화상에게 부쳐 드림」은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 스님이 혜암 스님께 보낸 칠언사운(七言四韵) 시로 『경암집(鏡巖集)』 권상에 수록되어 있다. 혜암 스님은 1785년 전라도 관찰사로부터 『정감록(鄭鑑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경암 스님의 시는 이 사건 이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赦后寄呈惠庵和尙 覔道安禪是化城 歸家須上白牛程 風濤險域挺身入 雨露恩天信步行 老病已催餘一事 慈悲倘許濟羣生 深心報佛窮塵刹 時論無端責利名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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