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선불교통사-화엄사 석벽에 화엄경을 새긴 일은 교가의 사업이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편, 화엄벽경교가사업(華嚴壁經敎家事業) 조에 수록되어 있다. 화엄사 석벽에 화엄경을 새긴 일은 교가(敎家)의 사업임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 인용된 두 편의 시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의 『대각국사문집』에 수록된 것이다. 이네다 순스이(稻田春水)는 일제강점기 불교 및 고고학자로 1915년 지리산 화엄사의 화엄석벽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全羅南道智異山華嚴寺華嚴石壁經に就て」, 『朝鮮及滿洲』 98, 京城: 朝鮮及滿洲社, 1915). 한편, 지리산 대화엄사 염송회 발기문(智異山大華嚴寺拈頌會發起文)은 진응 혜찬(震應慧燦, 1873~1942) 스님의 부탁으로 이능화가 찬술한 것이다. 진진응 스님은 법호가 진응, 법명이 혜찬, 속성이 진씨(陳氏)로 1917~1919년, 1928~1932년간 화엄사 주지로 재임하였다.
원문
○華嚴壁經敎家事業 湖南求禮郡智異山大華嚴寺。世傳梵僧烟起之所創。而烟起不知何代人。烟起或云緣起。高麗大覺國師。遊華嚴寺。留有二絕。 (一)留題智異山花嚴寺。 寂滅堂前多勝景。吉祥峯上絕纖埃。彷徨盡日思前事。薄暮悲風起孝臺。(花嚴寺有佛舍利七層寶塔緣起石像合掌戴塔。 以資其母之冥福。故呼塔之石臺爲孝臺云云。) (二)花嚴寺禮緣起祖師影。 偉論(起信)雄經(華嚴)同不通。一生弘護有深功。三千義學分燈後。圓敎宗風滿海東。 然則。因師演唱圓敎。寺名華嚴。亦未可知也。新羅義湘大師。十刹傳圓敎。華嚴寺居其一焉。唐儀鳳二年。(新羅文武王十七年)湘師承王命。以石板刻華嚴經。留于本寺。又於唐嗣聖八年(神文王十一年)湘師以唐賢首法師所述探玄記。講華嚴經於本寺之海藏殿。新羅憲康王元年。道詵國師重修本寺。俱載寺乘。至于朝鮮中葉。碧巖大師覺性。住錫茲寺。孝宗大王卽位元年。特陞寺格爲禪宗大伽藍。肅宗大王二十七年。爲大華嚴寺。又爲禪敎兩宗大伽藍矣。則華嚴寺爲我海東華嚴大敎根本紀念之地也。本寺舊有石壁。刻華嚴經。不幸爲兵燹所殘燬。千古偉蹟。遂以埋沒。今人考案。錄之于左。 智異山大華嚴寺新羅時代華嚴石壁經考。稻田春水述(尚玄居士譯)全羅南道求禮郡馬川面華嚴寺之覺皇殿。夙聞有華嚴石壁經。斷片現存。今蒙本寺陳震應師之厚意。得其拓本。併合資料。畧述愚見。至其不足之點。乞大方諸賢之指敎焉。 (一)朝鮮總督府月報第四卷第九號。所載金石文目錄中。其二十五項。求禮華嚴寺石刻華嚴經。 所在。全羅南道求禮郡馬川面華嚴寺 年時。相傳新羅末。 全羅南道求禮東北十里許。智異山華嚴寺。有華嚴經。石片陰刻者。當初是佛堂之石經矣。今則崩壞。堆積於堂內佛座之下。相傳爲新羅末之鐫刻。 (二)朝鮮藝術之研究續編。明治四十三年中。朝鮮總督府囑託關野博士。朝鮮遺蹟調查畧報告。有如左記。 華嚴寺華嚴經石刻斷片。約數千個。本寺佛殿壁。以石造。而刻此華嚴經者。爲壬辰兵火所破壞云。現今則數千之斷片堆積於覺皇殿下。保護之道不爲完全。有散逸之虞。其斷片之。大者。殆不出一尺係是新羅時代之製作。而其法。與我寧樂朝。(自新羅善德王朝至憲德王朝時代)之寫經。如合符節 (三)新增東國輿地勝覽卷之四十。求禮縣華嚴寺。在智異山麓。僧烟氣不知何代人建此寺。中有一殿。四壁不以土塗。皆用青壁。刻華嚴經於其上。歲久堂壞。文字刓沒不可讀。 茲述支那華嚴經譯本之來歷。支那通行之譯本。共有三種。第一東晉安帝義熙十四年。(西紀四一八年)佛駄跋陀羅譯出者。通稱六十華嚴。第二唐則天武后嗣聖二年。(西紀六八五年)實叉難陀譯出者。通稱八十華嚴。第三唐德宗貞元十三年。(西紀七九七年)三藏般若譯出者。稱貞元經又四十華嚴。是也。 今於殘存之石經。陳震應師有所調查云。有義熙本及貞元新經二種。余姑從此說。然而其石質則軟滑之蠟石。係是智異山中之所產。帶淺青色。而其中混薄赤煉瓦色云。有說者曰。此則經殿罹火時。燒焦變色者云。 又考石經之字體。則於線罫中。恭楷書之。筆蹟雖各異。其大體則與右軍書法多酷似處。經字頗極精巧。書法刀法。兩者毫無瑕瑾。眞可謂無二之珍寶也。且考其彫造石經之年代。則華嚴寺事蹟。及其他可證憑之史料。一不發見矣。 故余雖費慮於推定其年代。不能遽下斷案。惟綜合各種材料。欲試臆測。今見華嚴經社願文。 唐僖宗光啟二年七月五日。朝臣宗親。爲憲康王。追薦冥福。結華嚴經社。崔致遠(孤雲先生)撰願文。別大德賢俊。(崔致遠之母兄)誦華嚴經。遵唐僧均諒故事。上言勸誘羣臣。寫經薦福。有敢言鍊石補天惟願撮塵裨岳云云等語。王(憲康王弟定康王也)嘉納之。擇侍書中善書者。命寫華嚴經淨眼品第一。宣旨遣使。捧經就席。復有上宰舒發金公林甫。國戚重臣蘇判順憲金一等。寫義熙本經。國綂及僧錄等。寫貞元新經。北宮長公主。捨財裝經。成十帙云云。 由此觀之。雖無雕刻石經之事蹟。現存殘石中既有義熙本及貞元新經二種。以此點推測。則賢俊之上言。爲其動機。而雕造在其後不遠之期間。可知也已。然經文字體與眞鑑國師碑。(在慶尚南道河東郡智異山雙溪寺)崔致遠書近似。故余則想像。以爲石經之成。在於新羅末期。卽自定康王朝至敬順王朝也。(西紀八八六年乃至九三五年)姑以存疑。更待他日之校正。(稻田春水石壁經考至此而完) 尚玄曰。緣起祖師之弘宗。義相大師之傳敎。道詵國師之習經。(讀習大經)賢俊大德之結社。以至青石刻經。碧巖住錫。從初至今。闡揚大敎。大華嚴寺。名不虛得。今陳震應禪師。號東海子。屬西山派。(霜月之後)住華嚴之大寺。繼碧巖之高躅。器宇軒昂有丈夫之相。聲音雄壯若洪鍾之鳴。總持如阿難陀。辯才似富樓那。法門龍象。佛家泰斗。方丈雖寬。物情自隘。其開拈頌法會。屬余撰文如左。 智異山大華嚴寺拈頌會發起文 竺西佛敎轉傳自震旦。海東禪宗肇興於新羅。厥有雙峯。迺嗣四祖。二世曰法朗和尚五傳爲智證國師。北山儀爲九派之首。南岳陟膺兩朝之師。無染傳麻谷之心印。惠哲開桐山之道塲。雙溪慧昭嗣神鑒禪師是爲曹溪之玄孫用建影堂。孤山梵日對眞聖大王始說雪山之皈祖待傳心印。皆是馬祖派。無非獅子兒。洞山价雲居膺之法嗣不乏。石霜諸雪峯存之宗派亦多。靈源寺之智異和尚稟宗於臨濟會下。道峯山之慧炬國師發機於法眼室中。半千禪刹鎮高麗山川裨補一國。三十僧徒承永明印記分化各方。當時佛敎界。卽名禪寂宗。佛日普照創立定慧社。禪風永扇通稱曹溪宗。無衣子採輯古人公案錄成拈頌之集。覺雲氏。(此乃眞覺弟子覺雲也非龜谷覺雲)稟受先師法言撰述說話之書。及到高麗之末世。又有臨濟之嫡傳。懶翁勤佩平山之法印。三世赫赫勢若注水。太古愚被石屋珙之信衣。六傳㣲㣲命如懸絲。至七世而出西山靜浮休修。如六祖之有南岳讓清源思。兩派一源。千門萬戶。從以海東之禪宗派。萃於湖南之智異山。燕谷當時玄覺師試九山之衆此是前於貞雙僧科之上書。(高麗燕谷寺玄覺禪師碑載求禮邑誌景宗四年己卯建王融撰柱國張信元書)鶴洞近處白業人建七佛之菴。早已名於第一禪院之揭額。五聖定位於青梅大師。七人悟心於碧松名刹。其中有華嚴大寺。自前爲禪敎道場(自新羅烟起。元曉。義湘。道詵。洞眞。賢俊。高麗洪慶。定仁。祖衡以至朝鮮中葉之浮休。碧巖。近世之聾巖。中峰。蒙庵。抱虛。惠庵。懶庵。機巖。圓華。等諸宗師。皆闡禪敎。之處。)文殊菩薩八萬眷屬常住說法。般若之峯高聳天半。緣起祖師三千弟子同叅分燈圓敎之風廣被海東。世尊舍利之塔巋然。悲風起於孝臺。覺皇石壁之經壞矣。古跡留於殘片。道詵與高麗定仁王師。重復創築伽藍之中興祖。(華嚴寺。高麗時。凡四創。按高麗護法外紀光宗王。以洪慶禪師。繼廣宏規。文宗朝。遂許三道耗穀。大建八寺各九庵。仁宗王以定仁王師。重修。忠宣王。命祖衡王師。更修紺殿。皆祝釐願堂故云云。)義相及朝鮮浮休和尚。先後弘傳雜花之大宗師。賢俊大德曾結經社。自是願堂於鷄林朝。靈觀等師亦設禪會。于彼別院之燕谷寺碧巖建幢。白谷繼席。慥冠師。(法號龍潭霜月之嗣)創拈頌之會。智泉不隱。(設會在泉隱寺)允臧公。(法號惠庵)傳綴輯之書。禪潮始流。此華嚴寺。江湖福田。乃孝廟肅宗兩朝御賜之大伽藍。今震應師。人天眼目。卽龍潭惠庵五世嫡傳之善知識。(龍潭。惠庵。畸庵。霽月。應庵。及震應爲五世。)故擇華嚴伽藍。開拈頌之法會共推震應和尚。爲講演之宗師。大正六年之春。陰曆二月之望。千江水月之夜正好供養諸天雨花之時不妨舉拈。八方衲子相率負笈而來。一堂禪衆共成折床之會。挽迴朝鮮之佛運。扶起臨濟之禪宗。茲憑修禪之大會。恭伸祝釐之微誠。天下泰平帝王長壽。家國興盛野老謳歌。 ※출처: ‘CBETA Online’, 中華電子佛典協會
번역문
화엄사 석벽에 화엄경을 새긴 일은 교가(敎家)의 사업이다(華嚴壁經敎家事業) 호남 구례군(求禮郡) 지리산 대화엄사는 세상에 전하기를 범승(梵僧) 연기(烟起)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연기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연기는 연기(緣起)라고도 한다. 고려 대각국사가 화엄사에서 머물면서 두 구절을 남겼다. (1) 留題智異山花嚴寺 지리산 화엄사에서 寂滅堂前多勝景  적멸당 앞에는 훌륭한 경치도 많고 吉祥峯上絕纖埃  길상봉 꼭대기엔 티끌 한 점 없어라. 彷徨盡日思前事  종일토록 방황하며 지난 일을 생각하는데 薄暮悲風起孝臺  저물녘 자비의 바람이 효대(孝臺)에서 일어나네. (화엄사에 불사리 7층 보탑이 있는데 연기조사가 석상에 합장하며 탑을 머리에 이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므로 탑의 석대를 효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2) 花嚴寺禮緣起祖師影 화엄사 연기조사의 진영에 참배하다 偉論(起信)雄經(華嚴)同不通 『기신론』과 『화엄경』을 통달하고 一生弘護有深功  일생을 호법護法함에 공이 깊다. 三千義學分燈後  삼천 학도에게 불법의 등불 나눠 준 뒤에 圓教宗風滿海東  원교圓敎의 종풍 해동에 가득하네. 이처럼 대사가 원교(圓敎)를 드날렸으므로 절 이름을 화엄이라 하였는지도 모른다. 신라의 의상대사가 십찰을 세워 원교를 전하니, 화엄사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당 의봉(儀鳳) 2년(신라 문무왕 17년(677))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석판에 화엄경을 새기고자 화엄사에 머물렀다. 또 당 사성(嗣聖) 8년(신문왕 11년) 현수(賢首) 법사가 저술한 『탐현기(探玄記)』에 “의상 대사가 화엄경을 본사(화엄사)의 해장전(海藏殿)에서 강하였다.”고 하였다. 신라 헌강왕 원년(875)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화엄사를 중수하였다. 대를 이어 화엄사를 계승하여 내려왔다. 9대에 사승하고 조선 중엽에 벽암(碧巖) 대사 각성(覺性)이 이 절에 머물렀고, 효종대왕 즉위 원년(1649)에 특별히 사찰의 격(格)을 선종(禪宗) 대가람으로 높였다. 숙종대왕 27년(1701) 대화엄사를 또 선교 양종 대가람으로 삼았으니, 화엄사는 해동 화엄대교의 근본을 기념하는 땅이 된 것이다. 본 사찰에는 옛날부터 석벽(石壁)에 『화엄경』을 새긴 것(華嚴石經)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란에 훼손을 입어 천 년 세월의 위대한 업적이 마침내 매몰되고 말았다. 요즈음 사람으로 이 안(案)을 고찰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리산 대화엄사 신라시대 화엄석벽경고(華嚴石壁經考) 이네다 순스이(稻田春水) 지음(상현 거사 번역) 전라남도 구례군 마천면 화엄사 각황전은, 일찍이 듣건대 화엄석벽경의 단편이 현존한다고 했다. 이제 본사 진진응(陳震應)의 후의(厚意)를 입어 탁본을 얻고 자료를 병합하여 간략하게나마 나의 우견(愚見)을 말하려고 하니, 부족한 점이 있다면 사방의 현달하신 분의 가르침을 바란다. (1) 조선총독부 『월보(月報)』제4권 제9호에 실려 있는 금석문 목록 가운데 25항에 구례 화엄사 석각 화엄경이 있다. 소재 전라남도 구례군 마천면 화엄사. 연시 신라 말로부터 전해 내려옴. 전라남도 구례의 동북쪽 10여 리쯤에 자리한 지리산 화엄사에 화엄석경이 있다. 석편(石片)으로 음각한 이것은 당초에 부처님 법당의 석경(石經)이다. 지금은 붕괴되어 법당 안 부처님 좌대 밑에 쌓여 있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신라 말에 새겨진 것이라고 한다. (2) 『조선예술의 연구』속편 명치 43년(1911) 가운데, 조선총독부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박사에게 위탁하여 조선의 유적조사를 간략히 보고하게 하였는데 다음의 기록과 같다. 화엄사 화엄석경 단편(斷片), 약 수천 개 본사 불전의 벽은 석조로써 화엄경을 새겼는데 임진년의 병화(兵火)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 수천 개의 단편이 각황전 아래에 쌓여 있는데, 보호하는 방법이 완전하지 못하여 흩어지고 사라질 우려가 있다. 단편이 큰 것은 1척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신라 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그 법이 우리 영락조(寧樂朝)(신라 선덕왕조에서 헌덕왕조의 시대이다.)의 사경(寫經)처럼 부절(符節)이 합하는 것과 같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40, 구례 화엄사는 지리산 기슭에 있는데, 승려 연기가 어느 시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세웠다. 이 가운데 전(殿)이 있는데, 사방의 벽은 흙으로 바르지 않고 모두 푸른 돌을 써서 『화엄경』을 그 위에 새겼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되어 벽이 무너지고 글자는 파손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음은 중국 『화엄경』역본(譯本)의 내력에 대하여 쓴 것이다. 중국에 유통하는 역본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동진(東晋) 안제(安帝) 의희(義熙) 14년(418) 불타발타라가 역출(譯出)해 낸 것이니 통칭 『60화엄』이다. 둘째, 당의 측천무후 사성(嗣聖) 2년(685) 실차난타(實叉難陀)의 역출이니 통칭 『80화엄』이다. 셋째, 당 덕종 정원(貞元) 13년(797) 반야삼장(般若三藏)이 역출한 것으로 정원경(貞元經)이니 『40화엄』이라 칭한 것이 그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석경은 진진응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의희본과 정원 신경(新經) 2종이 있다고 하니, 나는 이 말을 따르고자 한다. 그러나 그 돌은 부드러운 납석으로 지리산에서 나는 것으로 옅은 청색을 띠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조금 붉게 탄 기와 색이 나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전(經殿)이 불이 났을 때 타서 색이 변한 것이라 한다. 또 석경의 글자체를 고찰해 보건대, 선을 그은 가운데 해서(楷書)로 썼는데 필적이 각각 다르나 대체로 우군(右軍, 왕희지를 말함.)의 서법과 유사하다. 경의 글자가 자못 공교롭고 서법과 도법(刀法)이 모두 조그마한 티도 없다. 참으로 둘도 보기 드문 진보(珍寶)이다. 또 그 석경을 조성한 연대를 고찰해 보건대, 곧 화엄사 사적 및 기타 다른 고증할 사료를 찾고자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그 연대를 추정해 보건대 단안(斷案)을 내릴 수 없거니와, 오로지 각종 자료를 종합하여 억측을 부려 보면 지금 화엄경사원문(華嚴經社願文)을 들 수 있다. “당 희종 광계(光啓) 2년(886) 7월 5일, 조신(朝臣) 종친(宗親)이 헌강왕을 천도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화엄경 결사를 맺었다. 최치원(고운 선생)은 원문을 지었으며, 따로 대덕 현준(賢俊, 최치원의 형)은 『화엄경』을 읽었으니, 당나라 승려 균량(均諒)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임금이 은근히 군신에게 말씀하시길 사경하여 명복을 빌라고 하셨다. ‘감히 말하건대 돌을 깎아 하늘을 돕고, 원하옵건대 티끌을 모아 태산에 보태도록 하소서’ 등의 말을 하니 왕(헌강왕의 동생 정강왕이다.)이 즐겁게 받아들였다. 글씨 잘 쓰는 자를 가려 뽑아 『화엄경』정안품(淨眼品) 제1(『60화엄』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을 말한다.)을 쓰게 하고, 관리를 보내 경을 받들어 자리에 나아가게 하고, 다시 재상 서발(舒發) 김임보와 왕실의 친척 중신인 소판(蘇判) 순헌(順憲) 김일 등에게 의희본(義熙本)『화엄경』을 사경하게 하고 국통 및 승록 등은 정원(貞元) 신경(新經)을 사경하게 하였다. 북궁(北宮)의 장공주(長公主)는 재물을 내어서 경을 장식하고 10질을 이루었다.” 이로 보아 석경을 조각한 사적(事蹟)은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석경 가운데 『의희본 화엄경』과 정원 신경 2본으로 추측해 보건대, 곧 현준이 임금께 아뢴 것이 동기가 되어 얼마 걸리지 않아 석경을 조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전의 문자체와「진감국사비」(경상남도 하동군 지리산 쌍계사에 있음.)는 최치원이 쓴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나머지는 미루어 생각할 수 있다. 석경이 완성된 것은 신라 말기 곧 정강왕조(定康王朝)에서부터 경순왕조(敬順王朝)이나(서기 886년 내지 935년이다.) 짐짓 의문이 남는다. 다음날의 교정을 기대해 본다.(이네다 순스이의「석벽경고」는 여기에서 마무리한다.) 상현은 말한다. 연기조사의 홍종(弘宗), 의상대사의 전교(傳敎), 도선국사의 습경(習經)(대경(大經)을 읽고 익혔다.) 현준대덕의 결사(結社), 청석(靑石)에 경을 새긴 것에 이르렀고 벽암이 주석하여 대교를 천양하여 대화엄사라 하였으니, 그 이름이 헛되지 않도다. 지금의 진진응선사는 호가 동해자(東海子)인데 서산파(西山派)에 속하며(상월(霜月)의 후손이다.) 화엄대사에 머물러 벽암의 고촉을 이었고 대장부의 모습을 갖추었다. 음성은 웅장하여 마치 종이 울리는 듯했다. 총지(摠持)는 아난다와 같고 변재(辯才)는 부루나(富樓那)와 같다. 법문의 용상이며 불가의 태두이다. 방장이 비록 넓으나 물정(物情)이 스스로 넘치었다. 염송법회(拈頌法會)를 열 때 나에게 찬문을 부탁하니 다음과 같다. 지리산 대화엄사 염송회 발기문(智異山大華嚴寺拈頌會發起文) 서축 인도로부터 진단(震旦) 중국에 전해져 해동의 선종이 신라에서 일어남에 두 봉우리가 있었다. 사조(四祖)의 법을 이어 2세인 법융(法融) 화상에서 다섯 차례 전해져 지증(智證) 국사가 되었고, 북산(北山)의 희양(曦陽)은 9파의 으뜸이 되었으며, 남악(南岳)의 척응 홍척(陟應洪陟)은 두 왕조의 스승이 되었다. 무염(無染)은 마곡(麻谷, 寶徹)의 심인을 전해 왔고, 혜철(惠哲)은 동리산(桐裡山)의 도량을 열었고, 쌍계 혜소(雙溪慧昭)는 신감(神鑑) 선사의 법을 이으니 조계의 현손(玄孫)으로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고산 범일(孤山梵日)은 진성대왕에게 처음으로 (석가모니께서) 설산에서 진귀조사(眞歸祖師)의 심인을 전해 받고서 불타를 이루었다는 말을 하였는데, 모두 마조의 파(派)로 사자 새끼가 아님이 없다. 동산 양개는 운거 도응(雲居道膺)에게 법을 전함에 부족함이 없었고, 석상(石霜)과 설봉 의존(雪峰義存)의 종파는 또한 많다. 영원사의 지리(智異) 화상은 임제 회하(會下)에서 법을 이었고, 도봉산(道峰山)의 혜거(慧炬) 국사는 법안실(法眼室) 가운데에서 기(機)를 발하였다. 5백 선찰이 고려의 산천을 누르고 나라를 보비하였으며, 30승도가 영명(永明) 선사의 인기(印記)를 이어서 각방으로 분화하였으니, 당시의 불교계를 곧 선적종(禪寂宗)이라 하였으며, 불일 보조(佛日普照)가 정혜사(定慧社)를 창립하여 선풍을 길이 드날리니 조계종이라고 칭하였 다. 무의자(無依子)가 고인의 공안(公案)을 채집 기록하여 『염송집』을 만들었고, 각운(覺雲) 씨(이는 진각의 제자 각운이다. 구곡 각운(龜谷覺雲)이 아니다.)가 선사(先師)의 법언(法言)을 품수 받아서 『설화서(說話書, 선문염송설화)』를 찬술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또 임제종의 적전(嫡傳)이 있었으니 나옹 혜근은 평산(平山)의 법인을 이어 삼세에 빛나는 세력이 물을 붓는 것 같았으며, 태고 보우(太古普愚) 화상은 석옥 청공(石屋淸珙)의 신의(信衣)를 입었다. 여섯 차례 전하여 그 미미한 명맥이 실낱과 같았지만 7세에 이르러 서산 휴정과 부휴 선수(浮休善修)를 배출하였으니, 저 육조에게 남악 회양(南岳懷讓)과 청원 행사(靑原行思)가 있어서 양파를 이루었으나 근원이 하나인 것과 같다. 천문만호(千門萬戶)가 모두 해동의 선종파에다가 호남의 지리산 연곡사 당시 현각(玄覺) 선사가 구산의 무리를 모아 시험하였으니, 이것은 정쌍(貞雙)이 승과의 상서를 올린 것보다 앞선다.(고려 연곡사 현각선사 비는 『구례읍지(求禮邑誌)』에 실려 있다. 경종 4년 기묘년(979)에 왕융(王融)이 건립하고 주국(柱國)이 찬하고 장신원(張信元)이 썼다.) 학동(鶴洞) 근처 백업인(白業人)이 칠불암(七佛庵)을 세웠으니, 일찍이 제일선원의 현액을 걸었다. 5인의 성인을 청매(靑梅) 대사가 위(位)를 정하고 7인이 벽송사에서 마음을 깨달았다. 그 가운데 화엄대사가 있으니 선교도량(신라의 연기, 원효, 의상, 도선, 통진, 현준(賢俊)에서 고려의 홍경(洪慶), 정인(定仁), 조형(祖衡)과 조선 중엽의 부휴, 벽암(碧巖)과 근세의 용암, 중봉(中峰), 몽암(蒙庵), 포허(抱虛), 혜암(惠庵), 나암, 기암(機巖), 원화(圓華)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사(宗師)가 다 선교를 드날린 곳이다.)이다. 문수보살이 팔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 설법하는 곳이며 반야의 봉우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연기조사의 3천 제자가 함께 분등(分燈)하여 원교(圓敎)의 가풍을 널리 해동에 입혔으며, 세존의 사리탑이 높이 솟아 있고, 구슬픈 바람이 효대(孝臺)에서 일어나며, 각황 석벽의 벽이 무너짐이여! 옛 자취의 잔편이 남아 있도다. 도선과 고려 정인왕사(定仁王師)가 거듭 중창하니 가람의 중흥조(화엄사는 고려 때 무릇 네 번의 중창을 거쳤는데 『고려호법외기(高麗護法外記)』를 살펴보면, 광종 때 홍경(洪慶) 선사가 계승하여 규모를 넓혔으며 문종 조에 드디어 3도의 곡물을 내게 하였으며, 크게 8개의 사찰과 각각 9개의 암자를 세웠다. 인종은 정인왕사로 하여금 중수하게 하였으며, 충선왕은 조형(祖衡) 왕사에게 명하여 다시 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니, 왕실의 안녕을 축원하는 원당(願堂)이기 때문이다.)이다. 의상 및 조선의 부휴화상은 앞뒤로 잡화(雜華, 화엄경을 말함.)를 크게 드날려 전한 대종사이다. 현준(賢俊) 대덕은 일찍이 경사(經社)를 맺었다. 이로부터 계림조(鷄林祖)의 원당이었으며 영관 등 스님 또한 저 별원의 연곡사에서 선회(禪會)를 설치하였다. 벽암(碧巖)은 당(幢)을 건립하였으며, 백곡(白谷)이 그 자리를 계승하였고, 조관(법호는 용담으로 상월의 제자이다.) 스님은 염송회를 시작하였고, 지천(智泉)은 숨지 않았으며 윤장공(允藏公)은 모아 엮은 글을 전하니 선의 조류가 비로소 흐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화엄사는 강호의 복전(福田)이다. 이에 효묘(孝廟, 효종)와 숙종 양조가 대가람의 사액을 내렸다. 지금의 진진응은 인천(人天)의 안목으로서 곧 용담, 혜암의 5세 적전의 선지식이다.(용담 혜암 기암 제월 응암 그리고 진진응은 5세가 된다.) 그러므로 화엄 가람을 택하여 염송법회를 열어 함께 진진응화상을 추대하여 강연의 종사로 삼았다. 대정(大正) 6년(1917) 봄 음력 2월 보름, 밝은 달이 일천강(一千江)을 비추는 한 밤, 정히 공양하기 좋은 때이며 모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니 염송을 듣기에 거리낄 것이 없다. 사방팔방의 승려들이 서로 등짐을 지고 와서 선을 닦는 대중이 모여 법상을 꺾는 모임(折床之會)이 이루어지니, 조선의 불운(佛運)을 만회하고 임제의 선종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 선(禪)을 닦는 법회에 의지하여 공경히 축리(祝釐)의 작은 성의를 다하고, 천하가 태평하며 제왕께서 장수 하시고, 나라가 흥성하기를 재야의 늙은이는 노래하노라. ※출처: 『역주 조선불교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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