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선불교통사-사보은천교 국일도대선사 벽암비명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상편, 조선 현종 원년 조에 수록되어 있다. 「사보은천교국일도대선사벽암비명(賜報恩闡敎國一都大禪師碧巖碑銘)」은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이 입적한지 3년 뒤, 스님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663년 계묘년 8월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찬(撰)하였고, 좌참찬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다. 전액(篆額)은 승정원 도승지 조계원(趙啓遠)이 썼다. 내용은 비문을 쓰게 된 경위, 행장에 의거하여 대사의 출신과 행적, 대사의 잠언, 입적 게송 등으로 구성된 서문(序文)과 말미의 명사(銘詞)로 구성되어 있다.
원문
○顯宗彰孝王(李棩)在位十五年 (庚子)元年(清順治十七年) (備考)賜報恩闡敎國一都大禪師碧巖碑銘(并序) 原任大匡轉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舘藝文舘春秋舘觀象監事世子師李景奭撰 崇祿大夫行議政府左叅贊兼知經筵春秋舘事弘文舘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吳竣書 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叅贊官春秋舘修撰官藝文舘直提學尚瑞院正趙啟遠篆 夫儒釋二致。道不相謀。而夷考行業。亦關觀感。鏟采空谷。義猶歉於獨善。布惠秪園功則茂於廣濟。永埀穹石。實愜禪林。碧巖大師之上足。跋涉千里。謁余於西湖。手狀請銘。累日益切。余不忍孤其誠。遂据狀而序之。其狀曰。大師法諱覺性。碧巖其號。湖西報恩人。俗姓金海之金。其先有衣冠云。師之父。嘗卜居于縣西。相者曰。生子必爲大沙門。母曹無子。相與齋潔。禱北斗。夢古鏡。有娠生師。萬曆乙亥十二月丁亥也。風骨霜凝。眼珠電耀。篤孝于親。幼不嬉戲。九歲失怙。過毀僅全。既沒喪。忽遇過僧。傾心學禪。阿孃重離。旋有感悟。遂之華山。禮雪默而師之。十四落髮。受具于寶晶老師。浮休到華山。大異之。勉以眞筌。乃從休師。入俗離山。轉歷德裕伽倻金剛等山。日閱貝葉。自是相隨不暫離。壬辰之難。松雲政大師。倡義旅。軍關東。爲休往問。避宼于山。必手經問難。癸巳松雲。薦休于朝。檄致陣上。師亦仗劒。從天將破賊于海中。漢人見師盛讚之。 尚玄按當時又有沙門從軍海戰者。如東師列傳曰。信海普淨者。明國聳劍山玉泉寺僧也。其寺有木像關羽廟。二師守護。又有守僕洪氏。雲長生時家臣之後孫也。壬辰之難。宣廟使使求救於明帝遣將軍邢玠都督陳璘等率軍救之。是時神宗皇帝。夢雲長自請同往救之。帝許之。覺而敕諸將。載與俱救二師一僕。亦陪隨之。到古今島前洋。逢倭師大戰勝之。三人下陸。建祠奉安。以避風雨。以古玉泉例。守直。西來諸將。北向王城。平亂班師云云。京城。平壤。及星州等地皆有關王廟。極崇奉之。盖自壬辰明兵之來。爲始也。 庚子。結夏于七佛蘭若。休病。輟講於師。師辭不獲。登座討論。玄風丕振。丙午秋。喪母。謝徒衆。修齋薦福於俗離之迦葉窟。能堪人所不堪。蓋業于休門二十餘年。入室傳法。戒行絕高。隨緣泊如。絕粒而不飢。通宵而不睡。常衣消瘦。結跏丈室。負笈者雲集。甘露徧灑。自撰三箴。以戒徒弟。蓋思不妄面不愧。腰不屈也。神珠一照。定水涵光。華嚴肅倡。大厲退却。淨地埋胔。妖魅頓絕。至有猛虎護路。馴鴉集肩。鷄獲活而知報。魚燒網而啣感。飛走猶化。况在最靈。諸山衆園。或創或修。如雙溪之東剎。華嚴之宏制。松廣之伽藍。乃其大者。餘可畧也。光海時獄事興。休師爲妖僧所誣。師偕入京。光海見兩師奇之。放休還山。留師於奉恩寺。爲判禪敎都摠攝。卿士大夫多與之。東陽尉。(申翊聖)特相善。未幾南歸。仁祖朝。城南漢。議者白上。徵師爲八道都摠攝。領緇徒。監築三年而告訖。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號。衣鉢并錫焉。丙子在智異山。聞車駕幸南漢。乃鳴鼓。泣諭衆曰。吾屬亦王民。况以普濟爲宗。國事急矣。其忍坐視。即衣戎衣而起。檄召南僧。來赴者數千。相率而北道聞敵退。痛哭而南。後命使日本。不敢辭。行到中途。以老病謝。懇請還山。孝宗龍潛時。致手札。賜以物。及即位。用朝議。授以摠攝之印。俾衛赤裳史閣。坐化南僧。廣演眞乘。居無何。雲遊諸名嶽。上扶安之邊山。俯南海。還棲方丈之華嚴寺。己亥夏。孝宗賓天。奉諱哀叫。秋九月㣲感。勗門徒以力白業酬國恩。戒勿封碑。庚子正月十二日。弟子等見其將寂。請偈。於是搦管手寫曰。大經八萬偈。拈頌三十卷。是則兼二利。何欲別爲頌。既悠然而化。寄世八十六歲。禪臘七十二。共奉而闍毗之。三南傾寺。七衆填谷。舍利騰出。即寺之西麓。藏諸石鍾。大師之承竺敎。厥有所自。芙蓉靈觀接臨濟之遺緒。浮休與清虛休靜。俱事觀。靜傳之松雲。休傳之碧巖云。其所著有禪源集。圖中决疑一卷。看話决疑一篇。釋門喪儀抄一卷。其弟子多闡玄關。請銘者律戒也。余嘗圖南。碧巖來見於求禮縣。贈余以拄杖。戒隨之。數年前。戒又訪余於洛下。今爲師來良甚勤矣。(名)曰。 師之高行。本於孝親。師之捨俗。得師之眞。慧刃斷疑。覺苑冠倫。慈航濟衆。寶筏通津。衆迷頓豁。如夜得晨。海帖長鯨。山伏猛虎。魚樂于潭。鳥馴于樹。想遍大千。義著急難。功存堞壘。道高峯巒。迹是禪林。心猶國耳。孤雲不駐。遊波未止。鶴失近錫。鷗驚斷盃。山川變色。龍象興哀。頻伽遺韻。尚繞雲隈。眼有餘照。神不俱寂。維巖屹立終古獨碧。 ※출처: ‘CBETA Online’, 中華電子佛典協會
번역문
○현종(顯宗) 창효왕(彰孝王)(이연(李棩)) 재위 15년(1659~1674) (경자)원년(청 순치(順治) 17년) (비고(備考)) 보은천교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國一都大禪師)라고 호를 받은 벽암(碧巖)의 비명(아울러 서문) 원임(原任)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이경석 찬 숭록대부 행의정부좌참찬(行議政府左參贊) 겸 지경연(知經筵) 춘추관사(春秋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總管)을 지낸 오준(吳竣) 서 가의대부 행승정원(行承政院)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 예문관 직제학(直提學) 상서원정(尙瑞院正)을 지낸 조계원(趙啓遠) 전자(篆字) 대저 유교와 불교는 이치가 달라 도를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 불교(夷)의 행업(行業)을 고찰 하면 또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에 가로막혀 있다. 대패로 빈 구멍을 파낸다는 뜻은 오히려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것만 못하다. 기원정사에서 은혜를 베푸니 공은 널리 구제하는 일에 빼어나고, 하늘에 길게 드리워 높으니 실로 선림(禪林)에 흡족한 것이다. 벽암 대사의 제자가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서호(西湖)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행장을 가져와서 비명을 청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였다. 나는 그 갸륵한 정성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여 드디어 그 행장에 의거하여 글을 쓰게 되었다. 행장에 이르기를, “대사의 휘는 각성(覺性)이며, 벽암(碧巖)은 그의 호로, 호서(湖西)의 보은(報恩)사람이다. 속성은 김해 김씨이다. 그 선조들은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부친이 일찍이 현의 서쪽에 집터를 골랐는데, 관상을 보는 자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대사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어머니가 자식이 없어 함께 몸을 정결히 하고 북두칠성에게 기도를 드렸다. 꿈에 오래된 거울(古鏡)을 보고 임신하여 스님을 낳으니 만력 을해년(1575) 12월 정해일이었다. 그는 나면서부터 풍모와 기골이 서리와 같이 엄정하고 눈빛이 번갯불같이 빛났다. 부모에게 효도를 지극히 하였으며, 어려서도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몸이 상했다가 겨우 나았다. 이미 상을 마치고서는 홀연히 지나가는 스님을 만나 선을 배우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어머니와 다시 이별하고서는 두루 깨달은 바가 있어 드디어 화산(華山)으로 가서 설묵(雪默) 화상에게 참례하고 스승으로 섬겼다. 14세에 머리를 깎고 보정(寶晶) 노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부휴화상이 화산에 이르러 스님을 보고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진전(眞筌, 선의 진수)을 권면 하였다. 이에 부휴스님을 좇아 속리산에 들어갔으며, 이후 덕유산(德裕山)·가야산(伽倻山)·금강산(金剛山) 등을 유력하였다. 날마다 경전을 읽는 것이 이로부터 계속 이어졌고 잠시도 놓지 않았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송운 유정(松雲惟政, 사명당)이 관동(關東)에서 의승군을 불러일으켰다. 부휴선사에게 가서 물었는데, 적을 피해 산에 있을 때에도 반드시 경을 손에 들고 어려운 곳을 물었다. 계사년(1593), 송운이 조정에 부휴를 천거하자 진중에 격문을 내렸다. 스님은 또한 전장에 나아가 명나라 장수를 따라 해전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니 명나라 사람들이 스님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상현이 당시의 사정을 살펴보건대, 또 사문이 종군하고 해전을 치렀다는 것은 『동사열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 “신해 보정(信海普淨)은 명나라 용검산(聳劍山) 옥천사(玉泉寺)의 승려였다. 그 절에는 관우(關羽)의 목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2명의 군사가 지키고 있었으며, 또 종복인 홍씨(洪氏)가 지키고 있었으니, 관운장(關雲長)이 살아 있을 때 가신이었던 사람들의 후예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사신을 보내 명 황제에게 구원병을 청하자 장군 사개, 도독 진린(陳璘)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다. 이때 신종(神宗) 황제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 함께 가서 구하기를 자청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관운장과 함께 (사당을 지키는) 두 군사와 종복을 배에 태워 모시고 따라가게 하였다. 고금도(古今島) 앞바다에 도착하여 왜적의 군대를 만나 크게 싸워 이겼다. 3인이 육지에 내려 사당을 짓고 (관운장의 목상을) 봉안하여 바람과 비를 피하게 하였다. 옛날 옥천사에서 했던 것처럼 지키게 하니 서쪽에서 온 모든 장수들이 장차 북쪽 왕성(王城)을 향하게 하였다. 난을 평정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운운.” 경성·평양 및 성주 등지에 다 관왕(關王: 관운장)의 사당을 두어 받들어 모시기를 지극히 하였으니 임진란 때 명나라 병사가 온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자년(1600), 칠불난야에서 하안거를 하였는데 부휴가 병들게 되자 강석(講席)을 스님에게 넘겨 주었다. 스님은 사양하지 못하고 좌단에 올라 토론하니, 이에 현풍(玄風)을 크게 떨쳤다. 병오년 가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도와 대중을 떠나 속리산의 가섭굴에서 천도재를 올리고 복을 빌었다. 다른 사람이 견디지 못할 만한 일도 참을 수 있었으므로 부휴 문하에서 20여 년 동안 학업하고, 입실(入室) 제자로서 법을 전해 받았다. 계행이 지극히 뛰어났고, 인연에 따라 욕심이 없고 담박하였다. 곡기를 끊었으나 배고프지 않았고, 밤을 새웠으나 잠자지 않았고, 늘 여위고 쇠약한 몸에 허름한 옷을 입었다. 방장실에서 결가부좌를 하니 배우러 오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졌다. 스스로 세가지 잠언(箴言)을 지어 도제(徒弟)들을 경계시키기를, 생각을 망령되게 하지 말고(思不妄), 얼굴을 부끄럽지 않게 하며(面不愧), 허리를 구부리지 않도록(腰不屈) 하였다. 신령스런 구슬이 한 번 빛나니 고요한 물에 광채 일렁인다. 화엄(華嚴)을 엄숙하게 외우니 큰 악귀가 물러난다. 정토(淨土)에 썩은 육신을 묻으니, 요망한 도깨비가 갑자기 없어진다. 심지어 맹호(猛虎)가 길을 호위하고, 길이 든 갈까마귀가 어깨에 모여들며, 닭은 다시 살아나 보은할 줄 알고, 물고기는 그물을 불사르자 고맙게 생각했다. 날고 달리는 동물도 오히려 교화하였는데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랴! 여러 산사를 창건하거나 보수하였는데 쌍계사(雙溪寺)의 동찰(東刹), 화엄사(華嚴寺)의 거대한 중창, 송광사(松廣寺)의 가람 같은 것이 그 가운데 큰 것이며, 나머지는 생략한다. 광해군 때에 옥사(獄事)가 일어 부휴선사가 요승이라고 무고되니, 스님이 함께 서울에 들어갔다. 광해군이 두 스님을 보고 비범하게 여겨서 부휴선사를 풀어 주고 산으로 돌려보냈고, 스님을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게 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삼았다. 많은 공경(公卿) 사대부들이 그와 함께하였으며,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와 특히 사이가 좋았다. 얼마 안 되어 남쪽으로 돌아갔다. 인조(仁祖) 때에 남한산성을 축성하려고 하자 의논하는 이들이 임금에게 아뢰고, 스님을 불러들여 팔도도총섭으로 삼았다. 승려들을 거느리고 3년 동안 축성을 감독하고 일을 마치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와 의발 및 석장(錫杖)을 하사하였다. 병자년, 지리산에 있을 때 남한산성으로 (임금의) 수레가 행차하셨다는 말을 듣고, 북을 치고 흐느끼며 대중을 타일러 말하기를, “우리 승려들도 왕의 백성인데, 하물며 널리 구제하는 일을 종지로 삼거늘, 국사(國事)가 위급한데 어찌 앉아서 볼 수 있겠는가?”하였다. 곧바로 군복을 입고 궐기하였고, 격문을 돌려 남쪽의 승려들을 불러모으니, 달려온 자가 수천 명이었다. 서로 거느리고 북쪽으로 갔으나 길에서 적이 퇴각하였다는 말이 들려와 통곡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그 뒤 일본으로 가는 사신으로 명을 받았는데 감히 거절하지 못하다가 사행(使行) 도중에 노병(老病)으로 사양하며 산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였다. 효종(孝宗)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수찰(手札)을 보내고 예물을 하사하였다. 즉위하게 되자 조정의 논의를 거쳐 총섭의 인장을 수여하고 적상사각(赤裳史閣)을 지키게 하니, 여기서 남쪽 승려들을 교화하고 진승(眞乘)을 널리 펼쳤다. 머무른 지 얼마 안 되어 이름난 여러 산을 구름처럼 유력하다가 부안(扶安)의 변산(邊山)에 올라가 남해를 굽어보고 방장산(方丈山)의 화엄사(화엄사)에 돌아와 머물렀다. 기해년 여름에 효종(孝宗)이 승하하자 제사를 올리고 슬피 울었다. 가을 9월, 병 기운이 있자 문도들에게 선업(善業)에 힘쓸 것을 당부하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하면서, 비(碑)를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경자년 정월 12일에 제자들이 장차 입적 하려는 것을 알고 게송을 청하니, 이에 붓대를 쥐고 손수 쓰기를, “대장경 8만의 게(偈)와 염송(拈頌) 30권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두 가지 이로움을 갖추었는데 어찌 따로 게송을 짓겠는가.”라고 하고, 조용히 열반하였다. 세상에 몸을 맡긴 나이가 86세, 선랍(禪臘)은 72년이다. 함께 받들어 다비하니,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승려들이 절에 몰려들고 칠중(七衆)이 골짜기를 메웠다. (3과의) 사리가 튀어나오니, 절의 서쪽 기슭 석종(石鍾)에 봉안하였다. 대사가 불교를 계승한 것은 저 부용 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임제(臨濟)가 남긴 실마리를 접한 것이다. 부휴와 청허 휴정은 함께 영관을 사사(師事)하였으며, 휴정은 송운(松雲)에게 전하고, 부휴는 벽암에게 전했다고 한다. 저작으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편,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이 있으며, 제자 가운데 다수가 불법의 진리에 드는 관문을 열었다. 내게 명(銘)을 청한 이는 율계(律戒)였다. 내가 일찍이 원대한 뜻을 품었을 때, 벽암이 구례현(求禮縣)에 있는 나를 찾아와 주장자를 선물로 주었다. 율계가 그를 수행했는데, 몇 년 전에 율계가 낙하(洛下)에 있는 나를 다시 방문하였고, 이제 스승을 위하여 찾아왔으니 참으로 정성스럽다고 할 것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스님의 높으신 행적은 효친(孝親)에 근원하였고, 스님은 속세를 버리고 참됨을 얻었네. 지혜의 칼은 의심을 끊고, 깨달음의 동산(覺苑)에서 무리 가운데 으뜸 되어 자비로운 배로 중생을 제도하고 보배로운 뗏목을 타고 나루를 건넌다. 수많은 미혹이 활짝 깨우치니, 밤에 새벽을 얻은 듯하다. 바다에서 큰 고래를 유순하게 하고, 산에서 사나운 호랑이를 복종하게 하니, 물고기는 연못에서 즐거워하고, 새는 집에서 길들여진다. 은혜는 광대하고 끝없는 세계에 두루 미치고, 의리는 위태로운 난세에 나타난다. 공적은 성채에 있고, 도(道)는 산봉우리보다 높다. 자취는 선림(禪林)에 있으나, 마음은 오히려 나라에 있을 뿐 외로운 구름은 머무르지 않고, 내달리는 파도는 그치지 않네. 학은 가까이 머물 곳 잃고, 갈매기는 쪼개진 잔에 놀라네. 산천은 색이 변하고, 용상(학덕이 뛰어난 승려를 사후에 일컫는 말)은 슬픔이 일어난다. 빈가(頻伽)의 울음은 여운을 남기며, 오히려 구름 모퉁이를 감싸네. 눈에는 빛이 남아 있고, 정신은 함께 없어지지 않는구나. 바위가 우뚝 솟아, 언제까지나 홀로 푸르리라. ※출처: 『역주 조선불교통사』

관련기사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