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봉성지 지리산 화엄사 봉천원 중창 상량록」은 1848년 3월 10일에 청월 석잠(淸月碩岑, 생몰년 미상) 스님이 지은 상량문이다. 봉천원은 지금의 봉천암이다. 글의 내용은 ‘봉천’의 지명 유래, 고적에 기록된 봉천원의 규모와 주변 암자, 1848년 봄 화엄사와 봉천원의 중수 동기와 내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량록 가운데 신라 법류(法流) 니선(尼禪)이 대화엄사를 개척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 옛 들보에서 1629년 4월 설암(雪嚴) 화주와 대목수 선미(善眉) 등이 상량을 했다는 기록을 보았다는 내용도 적고 있다. 건물의 공사기간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1848년 1월 15일에 시작하여 2월 25일 인시에 기둥을 세우고 3월 2일 신시에 상량하였다고 적고 있다. 육위송과 축원문은 생략되었다.
기록된 사중의 명단은 산중대덕(山中大德), 전함(前啣), 시주지(時住持), 삼강(三綱), 시지전(時持殿) 등의 소임자, 선덕질(禪德秩), 도편수, 공양주, 패장(牌長), 노역질(勞役秩), 본원질(本院秩), 부역질(赴役秩) 등이다. 부역질에는 천은사를 비롯하여 동원한 지역과 역군 수가 기록되어 있다. 대시주는 금봉 우익(錦峯祐益, 생몰년 미상)스님이고, 화주는 묵담당 영일(黙潭堂永日, 생몰년 미상)스님 이다.
관련 기록으로 이 무렵 화엄사 중건에 대해 기록한 「화엄사 중수기(華嚴寺重修記)」(1840)와 봉천암의 불사가 끝난 후 전말을 기록한 「해동 봉성현 지리산 화엄사 봉천암 중창기(海東鳳城縣智異山華嚴寺鳳泉菴重刱記)」(1849) 현판이 있다.
문서 크기는 가로 73.2㎝, 세로 112.7㎝로, 직사각형으로 접고 겉을 감쌌던 겉지가 남아 있다. 현재 성보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원문
湖南鳳城地智異山華嚴寺鳳泉院重創上樑錄
道光戊申春 卽有海東南嶽坤脈大華嚴寺北重建鳳泉事 盖鳳泉者 上古鳳凰之求 飲甘泉之處而 又在鳳城卽地數牛鳴之許也 古蹟曰 鳳泉院兼燃燈閣十三間光明露柱各一双正門 兼山呼樓十三間鍾閣三層三間紫微堂三間三光殿三間兜率殿三間帝釋殿三間七星殿三間八關堂五間左右梗樓各三間十六羅殿五間五百應眞殿九間千佛殿十五間排雲門三間 元曉菴三間義湘菴三間桐孫菴三間竹祖菴三間鳳來菴三間 五菴盡爲鳳泉院百弓內之草堂也 又有甘露井一輪云 桐竹甘露豈非鳳凰之棲息來儀哉 新羅法流尼禪初拓大華嚴後 某時某人刱某院某舍不知而 破屋時舊樑曰 崇禎己巳四月雪嚴化主與大木善眉等上樑云 其間計年不過二百二十也而 棟樑大醉 柱椽隨退 人無不忿矣 今有大德主錦峰堂祐益和尙以前捐錢興功之處 時龍城許先生茂所撰懸板記中悉錄而 至於茲處則深恐先翁師曇仁先恩師黃岳堂幸元二師之所住處 將至於谽谺之境 大出錢穀而使其上佐永日永敏等一化一木二爲一心木石咸從 不嫌數尺之杇 況別與監之喜務 何論勞身焦思之比也 元月十五日讀經後始役 二月二十五日己巳寅竪柱 三月初二日丙子申上樑 五樑之祝 只在時會執務碩德之誠心所激 曇花長輝於微塵 法界恒清於墨點矣 如何效嚬其爲四隣之走哉 短綆無及於萬仞之井云爾
崇禎紀元後四戊申三月上澣 碩岑 謹書
山中
錦峰祐盒 信菴正軒 登蓮性鑑 恩波造悔 龍城晶倫 月菴斗民 文峰戒沾 應潭戒日 順月日輝 清月
碩岑 景峰智元 龍淵百彥 黙潭永日
大施主 錦峰堂祐益
化主 黙潭堂永日
執務 恩波堂造悔 斗性
前啣 奉日 定允 善馹 普訓 正玹 善寬
時住持 斗信
三綱 錦俊 益賢 道益
時持殿 順月日輝 信菴正軒 塔殿桓心
禪德秩 智演 智宣 贊宥 宇定 瓘琉 太念 太民
賢俊 補益 淳閑 祥珍 永順 文眼
都片手 政日
副片手 永敏
供養主 禹永 性玉
牌將
東邊將 有閑
西邊將 道寬
先頭 良善 彔沾
勞役秩
道性 命寬 性義 謹宥 晋儀 允奇 惠日 戒華 化仁 喜正 錦允 俊幻 惠安 敬憲 義仁 奇演 尙萬 晶連 本明
義明 義元 雪化 戒順 義宥 永元 致榮 致彦 戒善 祥祐 孟玉 本性 碩仁 順民 順元 昌眞 智洽 祐性 有敬
性信 妙全 順日
本院秩
時住室 黙潭永日
別室 恩波照悔
持殿 直玧
堂頭 法明 萬元 斗性 彔彦 信察 禹榮 性玉 天祐
入禪 惠玉
負木 金致龍
入禪 再民 百千 朴彔 惠玉 永弼
赴役秩
泉隱寺
領國云
軍三十名
黃屯村役軍一百二十名
西村役軍十名
艾川洞役軍二十名
施入記 化入不過百金
※교열: 불교학술원
번역문
호남 봉성지 지리산 화엄사 봉천원 중창 상량록
도광 무신년(1848) 봄에 지리산(南嶽) 곤맥[1]오행의 기운이 땅속으로 흐르는 맥
의 대화엄사 북쪽에 봉천원을 중건했다. 대개 ‘봉천’은 상고시대에 봉황이 감천을 찾아 마신 곳으로, 또 구례(鳳城)와 가까워 몇 우명[2]소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리
되는 곳에 있다. 고적에 이르기를, “봉천원은 연등각 13간과 광명로주 각 한 쌍의 정문을 아우르고, 산호루 13간, 종각 3층 3간, 자미당 3간, 삼광전 3간, 도솔전 3간, 제석전 3간, 칠성전 3간, 팔관당 5간, 좌우 경루 각 3간, 십륙라전 5간, 오백웅진전 9간, 천불전 15간, 배운문 3간, 원효암 3간, 의상암 3간, 동손암 3간, 죽조암 3간, 봉래암 3간 등을 아울러 포함한다. 다섯 암자[3]원효암·의상암·동손암·죽조암·봉래암는 모두 봉천원의 백 궁[4]활로 잰 거리의 단위안에 있는 초당이다. 또 감로정 하나가 있다.”고 했다. 오동나무, 대나무, 감로가 어찌 봉황이 서식하며 춤춘 곳이 아니겠는가. 신라 법류니선이 대화엄시를 처음 개척한 후 언제, 누가, 어느 원, 어느 집을 지었는지는 모르나, 집을 헐 때 옛 들보에 이르기를 “숭정 기사년(1629) 4월 설암 화주와 대목 선미 등이 상량한다.”고 했다. 그 사이 햇수를 계산하면 220년에 불과하나, 동량이 크게 기울고 기둥과 서까래가 물러나자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대덕주 금봉당 우익화상이 이전에 돈을 내어 공을 들여 놓은 곳이 있는데[5]당시 남원(龍城) 허무(許茂) 선생이 지은 ‘현판기(懸板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옹사 담인과 선은사 황악당 행원이 주석한 이곳이 장차 폐허가 되는 것을 우익화상이 크게 두려워하여, 돈과 곡식을 많이 내고 자신의 상좌 영일과 영민을 화주와 목수로 삼았다. 두 사람은 한 마음이 되고 뭇 목수와 석수도 몸을 아끼지 않았으니, 하물며 별좌와 도감이 어렵지 않은 일에 몸과 마음을 다했음을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정월 15일 독경한 후 일을 시작하여 2월 25일 인시[6]새벽 4시 전후에 기둥을 세우고 3월 2일 신시[7]오후 4시 전후에 상량을 한다. 오량의 기원[8]상량 때 부르는 노래
은 단지 이 때 모인 일꾼(執務)들과 석덕들의 ‘우담바라가 미진에서 길이 빛나고 법계가 묵점에서 항상 맑으리라’는 성심 어린 격려에 있을 뿐이다. 어찌 사방의 이웃에서 하는 것을 본받겠는가. ‘짧은 두레박 줄은 깊은 우물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뿐이다.
숭정 기원 후 넷째 무신년(1848) 3월 상순 석잠 삼가 쓰다.
산중
금봉 우익/ 신암 정헌/ 등련 성감/ 은파 조회/ 용성 정륜/ 월암 두민/ 문봉 계
점/ 웅담 계일/ 순월 일휘/ 청월 석잠/ 경봉 지원/ 용연 백언/ 묵담 영일
대시주 금봉당 우익
화주 묵담당 영일
집무 은파당 조회/ 두성
전함 봉일/ 정윤/ 선일/ 보훈/ 정현/ 선관
당시 주지 두신
삼강 금준/ 익현/ 도익
시지전 순월 일휘/ 신암 정헌/ 탑전 환심
선덕질
지연/ 지선/ 찬유/ 우정/ 관류/ 태념/ 배민/ 현준/ 보익/ 순한/ 상진/ 영순/
문안
도편수 정일
부편수영민
공양주 우영/ 성옥
패장 동변장 유한/ 서변장 도관
선두 양선/ 녹점
노역질
도성/ 명관/ 성의/ 근유/ 진의/ 윤기/ 혜일/ 계화/ 화인/ 희정/ 금윤/ 준환/ 혜안/ 경헌/ 의인/기연/ 상만/ 정련/ 본명/ 의명/ 의원/ 설화/ 계순/ 의유/ 영원/ 치영/ 치언/ 계선/ 상우/ 맹옥/본성/ 석인/ 순민/ 순원/ 창진/ 지흡/ 우성/ 유경/ 성신/ 묘전/ 순일
본원질
시주실 묵담 영일/ 별실 은파 조회/ 지전 직윤/ 당두 법명/ 만원/ 두성/ 녹언/ 신찰/ 우영/ 성옥/ 천우
입선 혜옥
부목 김치룡
입선 재민/ 백천/ 박록/ 혜옥/ 영필
부역질
천은사영국운/ 군 30명/ 황둔촌 일꾼 120명 / 서촌 일꾼10명/ 애천동 일꾼 20명
시입기 : 화입이 백금을 넘지 않음관련주석
- 주석 1 오행의 기운이 땅속으로 흐르는 맥
- 주석 2 소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리
- 주석 3 원효암·의상암·동손암·죽조암·봉래암
- 주석 4 활로 잰 거리의 단위
- 주석 5 당시 남원(龍城) 허무(許茂) 선생이 지은 ‘현판기(懸板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주석 6 새벽 4시 전후
- 주석 7 오후 4시 전후
- 주석 8 상량 때 부르는 노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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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중수기 현판「화엄사 중수기」 현판은 1840년(헌종 6) 9월 통훈대부 허무(許茂, 생몰년 미상)가 찬술한 것으로, 화엄사의 내력과 1830년을 전후로 하여 정문, 대로전, 삼전을 중건한 불사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중수기에는 1827년(도광 7, 정해)에 금봉 우익(錦峰祐益, 생몰년 미상) 스님이 낭규(郞奎), 인윤(寅允)스님과 함께 정문(正門)을 중건하고, 1836년(도광 16, 병신)에는 대로전(大爐殿)을 중건하고, 오환(悟幻), 창수(暢守)스님과는 삼전을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우익스님은 1837년(정유)에도 ... -
금봉 우익금봉 우익(錦峰祐益, 생몰년 미상) 스님은 당호가 금봉당, 법명이 우익, 속성(俗姓)이 경주 김씨(金氏)이다. 화엄사의 중흥 공덕주이며, ‘승풍규정팔도도승통(僧風糾正八道都僧統)’을 지냈다. 『조사례(祖師禮)』에서도 ‘대공덕주 겸팔도승풍규정도승통 금봉당 우익선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스님의 비는 1929년 기사년 3월 문손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지금 화엄사 사천왕문 앞에 세워져 있다. 스님은 1836년 노전과 1848년 봉천원 중창 상량에 대시주로 참여하였고, 대공덕주로서 1827년 보제루, 1840년 화엄사를 중건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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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암화엄사의 산내암자, 봉천암(鳳泉庵)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당우 1동으로 구층암 위쪽에 자리한다. 전란으로 소실된 후, 1846년(헌종 12)에 후봉선사(嗅峰禪師)가 옛 터에 본존요사와 산왕각(1칸)을 중창하여 봉천암이라고 하였고, 운수납자가 용맹 정진하는 선원(禪院) 도량으로 삼았다. 1999년 당시 화엄사 주지 종걸 스님이 해체보수 하였다. 원래 건물 뒤편에 있던 산왕각은 멸실되었다. 봉천암 법당에는 정면의 중앙에는 ‘봉천암’ 편액이 있고, 그 옆으로 3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린다. ‘봉천암’ 편액은 검은 바탕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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