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좌 구례현 화엄사 승당 중창 상량문」은 1798년(가경 3) 3월에 용암 윤성(龍庵胤成, 생몰년 미상) 스님이 작성하였다. 윤성 스님은 행주대첩 당시의 승병장이었던 뇌묵 처영(雷黙處英, 생몰년 미상) 스님의 7대손이다. 내용을 보면 승당은 516년(양 무제 대동12)에 사찰의 창건과 함께 세워졌지만, 이후의 일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1634년(숭정 7, 인조 12) 갑술년에 언신(彦信) 비구가 중창하였지만, 163년이 지난 지금 많이 쇄락하여 다시 중창하게 되었다는 내력과 육위송, 축원문으로 글을 맺고 있다.
뒤이어 기록되는 관련 명단으로 산중종사와 전함(前啣), 시주자, 서기 등 소임자, 패장(牌丈) 등 승군의 이름과 공사 관계자 명단인 연화질(緣化秩)로 도편수, 부편수, 공양주, 도감, 화주, 별좌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당시의 주지는 성찬(聖贊) 스님이고, 재임기간은 1798년 1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이다.(『화엄사선생계안록』 참조)
문서 크기는 가로 268.8㎝, 세로 39.6㎝로 두루마리 형태로 성보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이 상량문의 출토위치와 시기가 정확하지 않아 승당이 어느 건물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조선시대 승당제도로 위치로 추정하자면 대웅전과 보제루 사이 현 화산학림 자리에 있던 옛 적묵당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湖左求禮縣華嚴寺僧堂重刱上樑文
國內三山其一曰方丈 方丈之南 有寺曰華嚴寺 寺之初刱 梁武帝大同十二秊 今此僧堂其時同建也 而中間不知幾刱 去崇禎七年甲戌 彦信比丘重刱以來 至今掘指一百六十三年 良以虛空之形 不見爛壞 有作之物 終成毁傷 日去月來 未兌屋老之歎 風磨雨琢將見棟撓之患 遊客之所嗟 況此居人乎 玆以地有待數有待今也 其發揮時顧惟判事幸元以本山人住此 寺久目覩所在 豈可恝然 遂乃發願矢心復舊當仁 不讓聖人所言見義 勇爲君子之道也 良緣歷募響 應而影隨穀日 是差龜從而協諏 今天泰之月董此熏謼之功 乃唱六偉用擧數頌
兒郞偉抛樑東 鎭我仁方伺佛力 暘谷日生六合通 琉璃世界藥師功
兒郞偉抛樑西 彼土旣開六八願 貝葉金文萬卷書 人人從此發菩提
兒郞偉抛樑南 尋師求法善財子 老僧閑坐雨花龕 到此閱參五十三
兒郞偉抛樑北 無憂國內有何憂 化翁肇闢無憂國 齊唱太平歌一曲
兒郞偉抛樑上 公道四時品物化 聖代河淸佛日晃 天門七政列君相
兒郞偉抛樑下 碧眼少林今又新 禪伯從來入此座 其於梁帝恨無把
伏願上樑之後 舜日重明曇花再現華祝向北賀明府下南來山門肅靜億萬歲之長年緇類安平與歲月之
無窮 千佛之所囑 八部之所護 三輪空寂 大解脫之法門 二利圓明 莊嚴海之功德
峕
嘉慶三年戊午三月日 雷默七代孫龍庵㣧成述
山中宗師
相谷郞象
蓮坡劇念
鳳瑞牢湜
隱奉示詢
龍庵㣧成
本寺前啣
有還
策修
極圓
善寬
施粲
色允
幸元
演允
持殿
梵隱
弼澄
時住持
聖贊
書記 順熙
首僧 日贊
佛庫色 萬海
持事 乃訓
同心運役軍丁名啣
牌丈 品宗
牌丈 晋森 永察 樂淳 戒還 大日 七學 始坦 再修 極仁 朗珠 夢連 演玉 澤禹 萬海 儀旻 瑞雲 寶岺 大日 日贊 德仁 性俊 宇成 有成 妙日 遇坦 五成 萬憶 連玉 始元 性初 日賢 妙信 辛尺 有敬如一 遇益 如仁 性旻 如平 祥澄 萬允 性寬 印悟 少東
緣化秩
都片手 箕性
副片手 幸俊
結墨 姜謂善
比丘 性守
改心
抱印
圓瑛
金重玄
引鉅 金意先
金興潤
宋得奎
趙茂才
供養主 連察 萬禹
都監 箕性
化主 幸元
別座 儀玄
※교열: 불교학술원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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