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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질박하게, 자연스럽게 —성우 스님의 가풍

1970년대 중반, 성우 스님이 파계사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스님의 처소는 ‘귀일당(歸一堂)’이었다. 귀일당이라는 당호까지 편액으로 걸려 있지만 독립된 건물은 아니고 설선당 뒤로 덧달아 지은 요사의 한 칸 방이다. 당호도 성우 스님이 지은 게 아니라 앞서 살았던 어느 스님이 붙인 것이다. 스님은 키 큰 사람이 누우면 머리와 발이 벽에 닿을 것 같은 좁은 방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을 차실(茶室)로 썼다. 당시에도 전기 포트가 있었지만 스님은 화로에 찻물을 끓였다. 그래서 저녁이면 화로에 숯불을 담는 다동이 있었다. 스님의 상좌이기도 한 이 동승은 화로를 준비하는 일을 썩 즐겼다. 차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었고 밤을 구워 먹는 일이 즐거워서였다. 스님의 방을 무시로 드나들었던 이 동승은 스님의 방에 무엇이 있는지 스님보다 더 잘 알았다.
귀일당
어느 날 귀일당의 다동이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은 부자네요.” 스님의 살림살이야 자기가 더 잘 알 터인데 느닷없이 부자라니.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물은즉 스님 방에 ‘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손님이 와서 먹던 귤 몇 개가 남은 걸 잊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졸지에 부자가 된 것이었다. 스님은 동자더러 귤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나눠 먹다가는, 먹을 것 숨겨 두었다가 들킨 것처럼 겸연쩍기도 해서 장난기가 동했다. 귤 한 알이 남았을 때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했다. 동승은 처음엔 자기가 사양하겠다고 했지만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스님이 한 번에 끝내자고 했으나 동승은 세 번에 두 번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판은 스님이 이겼다. 스님은 동승에게 장난을 걸며 다음 판을 미뤘다. 스승과 어린 상좌가 장난을 하며 웃는 소리가 윗방에서 독경을 하던 동승들에게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이웃 동승들이 급거 출현하자 스승과 제자는 남은 귤 한 알을 동진불에 공양 올리는 것으로 가위바위보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스님은 귤껍질로 사위는 불씨를 일구어 차를 달였다. 차향과 귤 향기가 겨울 산방을 따뜻이 어루만졌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의 날들이 이렇게 흘러갔다.(이 이야기는 스님의 산문집 『새벽삭발』(민족사, 1997)에 실린 ‘겨울밤 동승과’라는 제목의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사소한 얘기인 것 같지만 성우 스님의 가풍을 알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매화꽃 한 송이가 능히 봄을 알리지 않는가. 위 이야기에서 우리는 매사에 꾸밀 줄 모르는 성우 스님의 성정을 만날 수 있다. 이에 흔쾌히 동의하는 한 스님이 있었다. 석정(1928~2012, 국가무형문화재 불화장) 스님이었다. 성우 스님의 법호는 무봉(無縫)인데 석정 스님이 지은 것이다. 석정 스님은 성우 스님을 무척 좋아했다. 말과 행동에 깁고 보태는 일이 없어서였다. 그래서 성우 스님이 법호가 무봉이 되었다. 성우 스님은 율사로서 계행에 철저했지만 그것을 간판처럼 내어 걸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당신을 기준으로 상대를 재단하지 않았다. 성우 스님과 무산(1932~2018) 스님은 평생 서로를 아끼는 도반이었다. 두 스님은 결이 다르다. 무산 스님의 파격은 성우 스님과 상반된다. 그러나 두 스님 사이에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 그 관계의 속내가 궁금하여 여쭈었더니 “스님네들의 세계는 가릴 것이 없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생각이 있고,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것이지요.” 하는 답이 돌아온다. 자기 세계가 굳건한 사람들은 다른 세계를 받아들일 때 상대의 모양 그대로를 인정한다. 그렇다 해서 자기 세계를 흩트리지도 않는다. 스님은 한때 한국의 피카소라는 수식을 받으며 기행으로 유명했던 중광 스님과도 가까웠다. 예술적 취향이 아주 달랐음에도. 성우 스님은 당신 앞에 벽을 세우지 않았다. 한국 불교의 율맥 전통에서 전계 제자가 30여 명이 넘는 경우는 성우 스님밖에 없다. 두루 찾아와서 그렇게 되었지 스님의 의도로 그리 된 것이 아니다. 자격이 충분하고 뜻이 바르다면 종단이 다르다 해도 개의치 않았다. 성우 스님은 현실을 바로 보지 않고 기개만 드높은 ‘큰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다선일여(茶禪一如)’ 같은 말도 부풀려진 것으로 보았다. 평생 차를 가까이 했고 차 전문지 발행인까지 하면서 누구보다 ‘다선일여’를 힘주어 말했을 법했는데도 그랬다. 참선 수행에서도 화두 들기는 일상적으로 해야 한다는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선을 추구했지만, 조사를 부처님보다 높이 여기는 태도나 ‘할’과 ‘방’을 일삼는 풍조와는 거리를 두었다. 선에 관한 글을 쓸 때도 구름에 올라탄 언어가 아니라 가능하면 쉬운 일상어로, 어느 정도의 문해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장을 구사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설복시키기보다는 낮고 따뜻한 목소리로 설득했다. 성우 스님은 많을 시를 썼다. 예술적 추구보다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전하려는 뜻을 우위에 두었다. 그래서 스님의 시는 따뜻하다. 스님의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한 단어를 꼽으라면 ‘볕’이다. 스님에게는 깨달음도 밝음(지혜)과 따뜻함(자비)이다. 깨달음의 경지나 마음을 절대시하지 않았다. 성우 스님은 어린 상좌들에게도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거나 권위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늘 이르는 말은 ‘중은 언제 어디서든 자비로워야 한다’는 한 마디였다. 성우 스님은 평생 수행과 포교와 시작(詩作)을 하면서 거창하고, 야단스럽고, 현학적이고, 화려한 것을 멀리했다. 풀꽃처럼 작고 여린 것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이 세상에 새로이 올 생명들에게 봄볕처럼 밝고 따뜻한 길을 열어 주는 데 한 생을 바쳤다. 스님의 언행은 단순하고 질박했다. 그리고 자연스러웠다.
2023년 BTN 사무실에서
덧붙임 성우 스님의 생애, 수행, 포교, 사상에 관한 글을 마무리하면서 몇 마디 첨언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성우 스님과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과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만, 인터뷰의 속성상 오래 전 일이나 내밀한 세계까지 조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글과 시를 인용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스님이 쓴 본디 글의 취지와 무관하게 이 글의 취지에 맞추어 인용한 경우, 전후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단장취의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혹시라도 곡해가 발생한다면 전적으로 필자의 잘못임을 밝혀 둡니다.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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