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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마음의 에너지를 찾아 쓰는 일입니다” —재가 불자의 ‘기도’에 대한 성우 스님의 견해

한국불교를 비판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그것도 대표격으로 꼽히는 문제가 ‘기복’일 것이다. 비판의 핵심은, 타력 신앙이므로 해탈—성불—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비판 혹은 옹호 논리를 펴는 입장은 대체로 ‘방편’으로 수용돼야 한다는 현실론에 서 있는 것 같다. 먼저 이 글의 목적이 한국 불교의 기복성에 대한 비판과 옹호에 대한 당·부당을 따져보는 데 있는 건 아니지만, 성우 스님은 재가 불자들의 기도를 수행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사실 한국불교의 신행 현장에서 재가 불자들의 신앙은 대부분 불공과 기도로 이루어진다. 그것을 비판론자들은 기복이라고 말하는데 다분히 신앙의 목적을 ‘깨달음’으로 설정해 놓은 비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 불교는 깨달음—성불-을 목표로 하는 종교다. 그것이 불교의 본질이고 그것을 위해 닦아 나가는 체계가 계·정·혜 삼학이다. 삼학의 바탕은 계율인데, 계와 율로 구성된다. 계는 윤리적 실천 규범으로 강제적이지 않다. 이에 비해 율은 강제적 규율로 재가자는 구속을 받지 않는다. 율장의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는 비구 240, 비구니 348 조문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무거운, 승단 추방에 해당하는 4바라이(波羅夷)를 보자. 살생(殺生), 투도(偸盜), 음행(淫行), 망어(妄語)가 그것이다. 가히 극단적이라 할만하다. 세속적 삶에서는 거의 실천 불가능한 규율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그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라는 종교의 내재적 한계인 ‘사문주의’ 혹은 ‘출가주의’의 벽에 봉착한다. 대승불교라 해서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흔히 대승계로 일컫는 ‘보살계’의 십중대계(十重大戒) 10가지는 4바라이에 해당한다. 소승불교든 대승불교든 출가중심주의는 엄존한다. 한계이자 특장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불법을 호지하는 승가(비구, 비구니)와 이를 외호하는 재가(우바이, 우바새)의 관계로 불교 교단이 성립됐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교는 존속될 수 없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재가 불자들의 신행을 ‘기복’으로 몰아세우면 불교라는 ‘종교’ 자체가 부정된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기복성’은 모든 종교의 근본 속성이다. 다만 그 내용을 문제 삼을 수는 있다. 비판은 그것에 한정돼야 한다. 성우 스님은 흔히 기도로 통칭되는 염불, 간경, 독경, 주력, 사경 등 모든 신행이 마음을 밝히는 수행이라고 말한다. 선택은 본인의 선호에 따르면 될 뿐인데 이 또한 업력의 소산으로 본다. 스님은 참선 수행도 선방에서나 하는 승가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는다. “참선에는 승속도 남녀도 없다.”고 말한다. 이런 스님의 생각은 BTN 법당 무상사의 ‘시민선방’으로 구현돼 있다.
2023년 무상사에서
성우 스님은 비구로 사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그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우월성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스님은 젊은 시절 백봉 김기추(1908~1985) 거사와 가까운 사이였다. 스스럼없이 대하면서도 선지식으로 예우했다. 어느 날 스님이 백봉 거사에게 “『선문염송』을 번역하십시오. 『선문염송』은 한국불교의 자존심입니다.” 하고 권했다. 스님의 권유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백봉 거사는 『선문염송요론』을 저술했다. 이외에도 백봉 거사는 『금강경강송』, 『유마경대강론』, 『절대성과 상대성』을 저서로 남겼다. 백봉 거사는 거사선풍을 크게 일으키고 보림회(寶林會)를 이끌며 많은 사람들에게 참선을 지도했다. 이런 백봉 거사에 대해, 춘성 스님은 ‘이 시대의 유마거사’라 했고, 탄허 스님은 ‘말법 시대의 등불’이라 했다고 한다. 성우 스님은 『반야사상』과 『열반사상』에 백봉 거사에 대한 지면을 내어 ‘오도송’과 ‘열반송’을 기록했다. 성우 스님은 재가 불자들의 기도에 대해서도 마음을 밝히는 이고득락의 수행이라 말한다. “팔만대장경 어느 구절을 들춰 봐도 기복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하면 복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이 기도예요. 많이 아는 것으로 부처님을 안다, 불교를 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에요. 아는 것으로는 세세생생을 보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없습니다. 실천해야지요. 흔히 한국불교를 지탄하기를 치마불교다, 기복불교다 하는데, 참된 뜻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내가 먹어야 내 배가 부르는 것처럼 내가 공덕을 지어야 내가 잘 살 수 있는 겁니다. 큰 고통, 큰 괴로움이 있으면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우리 가슴 속에 희망의 태양을 품는 겁니다. 본래 사람은 원만구족한 지혜와 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는 업이라는 것이 딱 붙어서 마음을 마음대로 못 쓰게 합니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못 하기 때문에 중생이에요. 그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큰 능력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찾아 쓰는 일이에요. 그것을 찾아내지 못해서 흔히들 말하기를 사바라 하고 고해라 하는 것입니다.” 성우 스님이 말하는 기도는 복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속박하는 업을 밝음으로 소멸시키면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런 기도가 될까? “기도는 자기 스스로를 잘 알게 해 줍니다. 자신의 업을 확연히 알게 해 줍니다. 그렇게 자신을 알고 나면 어떤 대상을 향한 원망심이 사라집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면 불보살님의 위신력이 내 마음속에 차오릅니다.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보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려면 확신이 필요해요. 믿음이 확고하면 기도는 이미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잘 일어나지 않아요. 좋다고 하니까 하긴 하는데 잠만 오고, 잡념만 성하고, 영험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느끼는 것이 보통입니다. 확신이 없어서 그래요. 우선 불보살님의 가호를 확신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아주 간절해야 해요. 머리에 불이 떨어진 것과 같이, 병이 났을 때 좋은 의사를 찾는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누가 부처님 앞에서 그런 마음을 안 가지겠습니까만, 의식적으로 하는 것과 속마음에서 자기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건 스스로 알 수 있어요. 아무래 해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물러서면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에도 선지식이 필요합니다.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먼저 성취하셨던 분들이 이야기를 들으세요. 그리고 스스로 기도 계율을 세우세요. 할까 말까, 하는 마음의 동요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 자체에 감흥이 없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염불이면 염불, 정근이면 정근(호명 염불), 다라니면 다라니 이렇게 오로지 기도만 하세요.” 성우 스님은 불자들에게 참선이든 염불이든 마음을 밝히는 길이라 일러준다. 우열을 따지지도 않는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자신의 역량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관건은 간절함이다.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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