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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는 깨달음의 실천이다 —성우 스님의 자비사상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비의 종교’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자비’의 종교인가? 질문이 잘못되었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실천이 자비’이므로,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가 불교’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바는 어떤 신비로운 경지가 아니라 세계의 실상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 통찰의 내용이 바로 연기법이다. 연기법이란, 법계의 구성 원리이자 모든 존재자(개체)의 존재 법칙으로서 보편 원리다. 부처님은 연기법의 최초 발견자였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거나 세상에 출현하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잡아함경) 했다. 동어 반복이 되겠지만 연기법의 자각이 곧 깨달음, 궁극의 지혜다. 그 지혜에 입각하면 세상의 모든 ‘너’는 ‘나’일 수밖에 없다. 성우 스님은 지혜에 반드시 자비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깨달음도 깨달음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그만큼의 자비가 따른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라면 자비의 정도가 깨달음의 심천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은 깨달음을 절대적인 경지에 한정하지 않는다. 선지식의 면모도 일상의 자비로써 드러난다고 본다. 스님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자비의 풍광은 결코 고원한 경지가 아니다. 성우 스님이 해인사에서 정진하던 어느 겨울, 우물가에서 큼직한 주전자에 물을 담고 계시던 고암 스님을 보고 주전자를 받아 드리려 했다. 고암 스님은 주전자를 주지 않으려고 빙판 위를 몇 바퀴나 도셨다. 경봉 스님의 상당 법어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일타 스님은 모르는 것을 물으면 당신의 몸이 불편할 때도 더없이 친절하게 알아들을 때까지 일러 주었다. 석주 스님은 승가교육과 대중 교화에 관해서라면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석정 스님은 포교와 불사를 위해서라면 당신의 그림과 글씨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조계종 단일계단과 행자교육원을 함께했던 보성 스님은 트럭을 타고 가서 손수 장을 볼 정도로 대중들을 아꼈다. 이런 모습들이 스님에겐 깨달음의 모습이었다. 성우 스님은 자비의 종자가 끊어지는 일을 가장 경계해야 할 일로 여긴다. 그래서 재가불자들에게도 살생의 업만큼은 짓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재가불자들에게 계를 주거나 법문을 할 때 불상생에 관한 이야기를 꼭 해 줍니다. 적어도 낚시나 사냥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해요. 불교의 근본이 자비니까요. 그것은 가장 무거운 업에 얽히는 일입니다. 그것만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꼭 당부를 합니다.” 지혜와 자비는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된다.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수행본기경』의 부처님 탄생게도 ‘천상천하유아위존(天上天下唯我爲尊):지혜—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자비’, 대승불교의 이상도 ‘상구보리(上求菩提):지혜—하화중생(下化衆生):자비’, 조계종 종지도 ‘자각(自覺):지혜—각타(覺他):자비’로, 이렇게 지혜와 자비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수행 풍토에서는 참선 수행이 과잉 대표됨으로써 깨달음 지상주의로 기울어진 측면이 있다. 깨달음의 추구 그 자체는 문제 삼을 일이 아니지만, 자비의 실천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점은 가벼이 여길 문제가 아니다. 조계종 스님들이 구족계와 보살계를 함께 받는 것도 지혜와 자비의 원융을 일러 준다. 『유마경』은 “선(禪)에 탐착하는 것이 보살을 속박하고, 방편을 내는 것이 보살을 해탈하게 한다[貪着禪昧是菩薩縛 以方便生是菩薩解].” 했다.(「文殊師利問疾品」) 그 역으로, 지혜 없는 방편 또한 마찬가지다. 『유마경』 주석서(維摩詰所說經通潤直疏)를 낸 통윤(通潤, 1565~1624) 스님은 ‘방편’을 덕행이라 풀이했다. 성우 스님은 계사로서 많은 이들에게 수계를 했지만 ‘보살계’를 설할 때 가장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모든 계목이 보살행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 실천의 궁극적 목적은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여는 길은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는 데 있다.”고 한다. 『범망경』 「보살심지품」은 근본 마음자리의 올바른 계[本源心地正戒]를 설한 경으로서, 노사나불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극과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실상의 마음자리[實相心地]에 바탕[體]을 두고 설한 이 계에 의지하여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게 되면 반드시 원래의 마음자리로 되돌아가서 부처를 이루게 됨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는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범망경 보살심지계품 강의초안』(관음사 금강계단, 1996) 4쪽 성우 스님은 궁극의 지혜—깨달음·성불—에 이르는 길은 보살행이라고 말한다. 자비롭게 사는 사람이 곧 보살이다. 사실 범부의 입장에서 보살과 자비를 말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자비롭게 사는 방법 중에 제일 좋은 것은 말이에요. 말. 따뜻한 말. 부드러운 말. 말을 정말 따뜻하고 부드럽게 하면 그게 바로 자비의 실천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니까요. 자비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보시가 으뜸이지요. 행동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그 시작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이라는 얘기지요. 꾸며낸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진실한 말은 세상을 자비롭게 합니다.” 성우 스님이 강조하는 ‘자비로운 말’을 구태여 ‘팔정도’의 정어(正語)에 배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님의 진의는 당장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부터 실천하라는 것이고, 말의 도구적 속성이 모든 자비행의 실마리가 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이렇다. 불자라면 마땅히 자비로워야 하고 그것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범망경 보살심지계품 강의초안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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