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수행자 가운데 화엄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그렇다. 승가대학(강원)에서도 『화엄경』은 필수 과목이고 최고 학년에서 배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이지만 『금강경』 이외의 경전 공부를 제한하지 않는다. 사실상 한국불교 교학의 대표는 화엄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우 스님은 특별히 의지하는 경전이 없다. “경전이라면 어떤 것이든 다 좋습니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스님은 『화엄의 바다』(토방, 2000), 『풀꽃 화엄』(토방, 2021)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이것으로 스님의 사상적 지평에서 화엄의 면모를 운위한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발상이지만 비약 또한 아닐 것이다. 스님은 『화엄경』을 어떻게 생각할까.
“인연이 되어서 『화엄경』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복인이에요. 물론 처음 보면 이해할 수가 없지요. 그걸 넘어서 『화엄경』을 볼 수 있다 하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복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구용(1922~2001) 시인이라고 있었어요. 난해한 시를 썼던 분인데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었죠. 서예에도 일가를 이룬 분이에요. 한 번은 이 분이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댁으로 갔어요. 『화엄경』을 보고 있더군요. ‘교수님, 『화엄경』을 보시는군요.’ 했더니 『화엄경』에 얽힌 과거사를 얘기해요. 젊었을 때 동학사 미타암에 머문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미타암 노스님이 80 『화엄경』 한 질을 넣어 주더래요. 그래서 보게 됐는데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그렇더랍니다. 그래서 한 장 읽다 접고 또 심심해서 한 장 읽다 접고 했답니다. 남는 건 시간밖에 없으니까, 또 열어 봐도 모르겠고 그랬대요. 그런데 제가 만났던 그 무렵에 보련각이라는 출판사에서 『화엄경』 영인본을 내면서 제자(題字)를 써 달라고 해서 써 줬더니 답례로 『화엄경』 한 질을 보냈는가 봐요. 그래서 『화엄경』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몇 구절만 읽어도 가슴이 훈훈해지고 며칠간은 도솔천 내원궁에 있는 그런 느낌이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화엄경』이 좋더랍니다. 그때 얘기가 무척 인상 깊어서 『화엄경』 얘기만 나오면 김구용 교수가 떠올라요. 『화엄경』의 깊은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입장에서 읽으면 그것은 정말 큰 행복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우 스님은 김구용 시인에 투영된 『화엄경』으로, 읽는 사람의 경계에 따라 『화엄경』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말했다. 사실 『화엄경』은 한 번 읽기도 벅찬 경전이다. 분량도 방대하지만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 교가들의 교학적 해석에 의지하게 되는데,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중심으로 화엄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현실 그대로 진여의 세계라는 화엄의 도리가 아득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스님의 견해는 어떨까.
“화엄의 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예요. 중중무진한 업의 세계에 사는 중생의 입장에서 화엄의 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건 그 자체가 곤란한 거지요. 그렇지만 사람이 다 비슷해 보여도 누리고 있는 정신적인 세계는 모두 달라요, 그야말로 깨달음의 세계에 사시는 분들도 있고, 업의 세계에서 허둥지둥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에 사시는 분들은 이사무애의 경지에 사실 테고, 선근이 있다 하면 이사무애의 경지에 사시는 분들을 선망할 것이고, 선근이 없다 하면 그것과는 인연이 없겠지요.”
성우 스님은 화엄 교학의 법계연기를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업’이라는 실존적 현실의 직시로 파악하는 듯하다. 실천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율사적 문제 인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스님의 다음 시를 보자.
향기로운 꽃에 마음 주지도 말고
징그러운 뱀을 외면하지도 말라
부처와 배꼽 맞추어 무엇하랴
미륵과 손잡아 어디 놀랴
방울 물도 바다에 가면
파도가 된다지.
—‘파도’ 전문(『마음 비워 좋은 날』, 토방, 1992)
마음 비워 좋은 날
시인(성우 스님)은 현상 세계의 호불호에 걸리지 말고, 현실을 벗어나 이상을 좇지도 말라고 곡진하게 당부한다. 그뿐이다. 섣불리 해인삼매를 말하지 않는다. 파도가 된 물방울은 바다—체(體)—의 몸짓—용(用)—이다. 물과 파도를 분리할 수 없으니 방울 물이 곧 바다이지만, 시인은 끝내 바다를 발설하지 않는다. ‘방울 물’이라는 ‘존재자’로서 감당해야 하는 ‘파도의 일’을 말할 뿐이다. 시인의 관심사는 오로지 현생의 업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다음 시에서는 그 뜻이 더 선명해진다.
저 꽃 한 잎에 수만 꽃이 어려 있다
하나를 하나로 보면 하나도 다 못 본다
소쩍새 울고 울어서 대낮 더욱 밝은 것을.
—‘(화엄의 바다 연작) 8’ 전문(『화엄의 바다』, 토방, 2000)
시인은 ‘꽃 한 잎에서 수만 꽃’을 본다.(一卽一切) 그러나 정작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라도 제대로 보라는 것이다. ‘소쩍새 울고 우는 일’이 그것이다. 그 울음에 대낮이 더욱 밝아진다.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소식이다. 본분사의 충실. 시인의 화엄이다.
성우 스님은 선(禪)의 신비화를 경계하듯, 현학적 교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교학의 차원에서 ‘현상 그대로 법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중무진한 업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스님에게는 중중무진한 연기를 보는 일이다.
화엄의 바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