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수행자로서 시를 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우 스님의 시론(詩論) 혹은 문학관

성우 스님에게 시는 거의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스님을 끝없이 부끄러움에 시달리게 한 것 역시 시다. 근작 시집 『풀꽃 화엄』(토방, 2021), 『봄볕에 차를 달이며』(토방, 2022)를 펴내기 전까지 거의 모든 시집의 서문에 ‘부끄럽다’는 심사를 털어놓았고, 심지어는 ‘데데한 짓거리’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인간이 걸치는 생각의 옷 가운데 고품으로 치는 것이 시다. 공자는 『시경』의 시 300편에 대해 ‘생각에 삿됨이 없다[思無邪]’ 했다.(『논어』, ‘위정편’) 이런 공자의 생각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문학 생태계의 피라미드 꼭짓점에도 시를 앉힌다. 그런데 왜 성우 스님은 당신의 시 쓰기를 부끄러워하고, 그러면서도 썼을까? “수행자로서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거예요. 정말이지 부끄러운 거예요. 아마 전생 업이 조금 남아 있어서 그걸 쓰게 됐나 봐요. 쓰면서도 나 혼자 웃어요. 역시 내가 나에게 속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스님의 이 진솔한 말을 통해서도 부끄러움의 정체를 다 알기는 어렵다. 그나마 확실한 단서는 두 가지다. ‘수행자로서~’와 ‘업’이다. 느슨하게 이해하자면, 시 쓰기는 수행자의 본분사가 아니고, ‘업’의 소산이자 또한 업을 짓는 일이므로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이다. 웬만큼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실로 부끄러운 일인지는 의문이다. 시인들은 시로써 자신의 시 세계 혹은 시적 지향을 밝힌다. 성우 스님의 시 가운데도 그런 시가 있다. 나의 말이 꽃잎이 될 때쯤 나의 말이 바람이 될 때쯤 나들이 하듯 저승에 가고 싶어라. —‘송(頌)’ 전문(『그대 창을 두드리는 바람 잠시 뿐이리니』, 한멋, 1986) 쉬운 듯 쉽지 않은 시다. 쉽게 읽으면, 나의 말—나의 시—가 자연과 하나가 되기를, 종국에는 나 또한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읽고 나면 도가적 자연주의에 기댄 관습적 독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시 읽어 보자. 시인은 자신의 말이 꽃잎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서 꽃잎이란 세계의 장엄이다. 동시에 시인은 자신의 말이 바람이 되어 그 장엄마저 거두기를, 스스로 풍화되기를 바란다. 말을 넘어선 말로서의 시가 거기 있다. 그렇게 시가 올 때 시인은, 바람에 꽃잎 지듯 저승에 가고 싶다는 원을 발한다. 그렇게 가는 길은 나들이다. 나들이 길은 먼 길 떠날 때처럼 거하게 행장을 꾸리지 않는다. 가볍게 떠난다. 잠시 다녀오는 길이다. 흔히 스님네들이 죽음을 ‘몸 바꿔 입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읽으면 성우 스님의 시적 지향이 보이는 듯하다.
성우 스님 시 전집
지레짐작하여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화두를 들고 있다 보면 글이 나왔다 하셨습니다. 그걸 메모해 두다 보니까 시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스님께 시작(詩作)은 수행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스님의 대답은, 질문에 담긴 기대를 무색하게 한다. “화두 정진과 시 쓰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을 참선의 과정으로 볼 수는 없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망상입니다.” 성우 스님은 시작을 수행인 양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라는 것은 개인의 감성이나 정신적인 능력이 순간적으로 발휘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의 삶과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경우 작품과 사람은 거리가 멀지요.” 스님은 작품과 사람을 일치시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서 큰 의문 하나가 솟는다. 시적 형식으로 표현된 ‘오도송’이나 ‘열반송’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오도송을 보면 그 분의 정신적 일상이 보이고, 열반송을 보면 그 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삶의 모양이 보여요. 시는 오도송이나 열반송과 다릅니다.” 형식적으로는 유사할지라도 예술적 표현 행위로서의 시와 불교 수행자의 정신적 경계를 드러낸 게송은 다르다는 얘기다. 그렇다. 고승들이 남긴 게송을 보면 결과적으로 아름다움의 세계와 통하지만 그것이 미학적, 예술적 추구의 성과물이라 볼 수는 없다. 성우 스님은 많은 시를 썼다. 당연히 시인으로서의 자의식 같은 것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는 어디까지나 머리 깎은 사람이에요. 스님으로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글 쓰는 것에 무게를 두지 않아요. 스님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문학적인 것에는 연연하지 않았어요. 물론 젊은 시절 한때는 좋은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지요. 사실 그것도 중생심입니다.” 성우 스님은 당신의 시 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흔히들 속풀이라고 하잖아요. 마음풀이죠.” 마음풀이로서의 시. 어쩌면 그것은 스님 내면의 ‘마음거울’에 스스로를 비춘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님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보였다. 다시 그것은 거울이 되어 스님을 되비춘다. 그렇다면 스님이 말하는 부끄러움의 정체를 제3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비유적으로 헤아려 보자면, 스님네들이 삭발 후 손바닥으로 머리를 꼼꼼히 매만지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살핌의 손길에서 다음과 같은 시가 왔다. 저승으로 가는 골목길이 아련히 보일 즈음 시가 읽혀지나니. —‘시(詩)’ 전문(『그대 창을 두드리는 바람 잠시 뿐이리니』, 한멋, 1986) 성우 스님에게 시 쓰기는 매순간 죽음에 다가서는 생의 현실, 인간의 실존—업—을 ‘읽는’ 일이었다. 성우 스님에게 시는 현실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었다.
그대 창을 두드리는 바람 잠시 뿐이리니
· 집필자 : 윤제학

관련자료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