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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밝음과 자비입니다” —성우 스님의 깨달음 관

현재 우리가 신봉하는 불교는 부처님의 깨달음 이후 2,6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다층으로 쌓인 교설과 신앙의 총체다.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로 변모해 왔다. 이런 시간의 축에 북방불교(한국, 중국, 티베트, 일본)와 남방불교(스리랑카, 동남아)의 공간 지평이 가로놓임으로써 수많은 경전과 종파가 창출됐다. 여기에 대승불교 반야공 사상의 중국적 변용이라 할 선불교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 복잡해지는데, 이 모든 것을 알아야만 불자라 할 수 있다면 불자 되기란 요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이나 불교학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불교의 모든 방면에 정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설사 그렇다 쳐도 불교 교리를 잘 아는 것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은 고통으로부터 해탈인데 그것을 우리는 깨달음이라 부른다.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궁극의 목표가 초기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고 대승불교에서는 성불로 전환됐다. 열반을 증득한 존재라는 점에서 아라한과 부처는 차이가 없지만, 아라한은 열반을 종착지로 삼았고 부처는 한 걸음 더 크게 내디뎠다. 아라한은 ‘자각’에 머물렀고 부처는 ‘자각각타(自覺覺他)’로 향했다. 소승과 대승이 변별되는 지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정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왜 깨달아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으면 무엇이 달라지는지를 알아야만 수행의 지향과 목적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걸맞은 대답이 있어야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와 깨달음에 관한 이 모든 궁금증을 뭉뚱그려 성우 스님에게 여쭈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음이란 밝음이에요. 밝음. 어떤 밝음이냐.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무명이 소멸된 상태가 깨달음이에요. 그렇게 밝아지면 지혜가 나오게 돼 있어요. 그 지혜는 무량한 자비를 동반합니다. 제대로 정진을 하면 틀림없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자기 마음의 밝음일 거예요. 그런데 그 밝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비유하자면 100와트짜리, 1,000와트짜리 전구가 있고 태양처럼 밝은 것도 있듯이 자기 밝음에는 한계가 없어요. 부처님은 그 무한한 밝음을 체득하셨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 일체중생의 마음자리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심에서 벗어나라고 한 것이지요.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에요. 만약 부처님이 그런 큰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다면 불교가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 없을 거예요. 작은 깨달음이라도 체득한 바가 있다 하면 그 깨달음에 대해서는 이의를 붙일 수 없어요. 모양이 없고 정해진 어떤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분명한 것은 밝음이고 밝음 만큼 자비가 나옵니다. 어두운 마음, 탁한 마음으로는 될 수가 없어요. 마음이 밝아지면 환희의 세계를 살아가게 됩니다. 환희의 세계에서는 남에게 베풀고 싶고 법을 전하고 싶지요. 그것이 바로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 무주상보시인 것입니다.” 성우 스님에게 깨달음은 밝음—지혜—이고 그 밝음에 동반한 자비다. 자비는 곧 깨달음의 현전이다. 깨달음에 관한 스님의 입장은 철저히 대승사상에 입각한 것이라 하겠는데,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경지로서의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수행을 하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작은 깨달음도 깨달음인 거예요.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역량이에요. 달라이 라마 같은 분은 여러 생을 살아오면서 철저한 수행을 했기 때문에 금생에 보살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크게 수행하신 분들을 보면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그냥 옆에서 보기만 해도 감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의 경우, 대단한 얘기를 하는데도 감동이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이것이 수행력의 차이예요. 그것은 금생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여러 전생 동안 수행을 했다 하면 아무 말 않고 바라보기만 해도 감동을 받게 됩니다. 자비의 모습도 그런 것입니다.” 성우 스님은 모든 생명의 본디 밝은 마음—불성―을 가린 무명—탐·진·치—에 의한 번뇌를 제거하여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깨달음으로 본다. 마음에 대해서도, 깨달아야 할 대상으로서 실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마음은 모양도 색깔도 없다. 어떤 형체도 없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 그러나 있다. 우리들의 일상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번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번뇌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오면서 가지는 가지가지 생각들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마음은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는 자그마치 4백만 년에 걸쳐 살아온 생명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다. 내 마음 나도 모른다고 한다. 내 마음이지만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은 과거 살아온 삶의 에너지가 농축되어 그 역동적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삶을 형성시키는 본질이다. 어느 누가 바람 지나가듯 마음 비우라는 말을 하였는지 걸핏하면 마음 비운다는 말을 무슨 간판처럼 내어 건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거짓이다. 어떻게 마음을 비울 수 있는가. (…) 마음 비우지 말라. 오히려 마음을 채워라. 가득가득 채워라. 넘쳐나도록 채워야 한다. 무엇으로? 밝은 빛으로 그리하여 마음 든든하도록. 어두운 마음은 불행을 낳고 밝은 마음은 행복의 원천이다. 밝은 마음을 가진 이는 이 세상이 바로 극락세계이다. 『새벽삭발』(민족사, 1997) 22~23쪽.
새벽삭발
성우 스님은 인간의 실존을 ‘과거 살아온 삶의 에너지가 농축된 역동적 힘’, 다시 말해 ‘업력’과 현실의 경계가 부딪치는 사태로 본다. ‘내 마음이지만 억지로 되지 않고’ 번뇌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번뇌가 일어나는 대로 따라 가면 ‘업식의 알뜰한 머슴살이’를 면할 길이 없다. 그 번뇌로 가득한 무명을 빛으로 물리치는 것이 곧 깨달음인데, 자비의 실천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만 참된 깨달음이라는 것이 성우 스님의 오도관이라 하겠다. 스님은 “깨달은 이의 마음은 항상 밝고 맑아서 어떤 경계에도 자비와 지혜가 스스럼없이 옹달샘처럼 샘솟아야 한다.”[『선의 메아리』 (불교춘추사, 2011), 28쪽]고 말한다. 스님은 깨달음을 형이상학적 초월 경지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비로 현전하여야 한다.
선의 메아리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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