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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계는 ‘감로의 문’ —성우 스님의 계율사상

2016년 4월 30일 대구 성관음사에서는 아주 특별한 율맥 전수식이 봉행됐다. 당시 조계종 전계대화상이었던 성우 스님의 율맥을 이어 받은 전계 제자는 일우 스님(현 법화종 총무원장)이었다. 성우 스님의 12번째 전계 제자가 된 일우 스님의 소속 종단은 관음종이었다. 스님은 율맥의 전수에 종단이라는 문턱을 두지 않았다. 스님은 일우 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한글 전법게를 내렸다. 법에 걸리지 말라 계에 걸리지 말라 법과 계를 뛰어넘어야 참된 행복 있나니. “법과 계를 뛰어넘어야/ 참된 행복이 있나니”라는 선문의 화두 같은 이 게송대로 성우 스님은 ‘다른’ 종단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법’과 ‘계’를 뛰어넘은 곳에 해탈, 참된 행복이 있다 했다. 계행은 그 자체로 수행이지만 그것이 궁극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우 스님은 신라 무상 스님의 교화 방편이었던 인성염불(引聲念佛)과 수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계에 걸리지 않는 계행’에 대한 무상 스님의 말을 인용했다. “기억에 없는 것이 계율이다. 상념이 없는 것이 선이다.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선의 메아리』(불교춘추사, 2011), 77쪽] 이를 ‘무억(無憶)·무념(無念)·막망(莫妄)’의 3구어(三句語)라 하는데, 각각 ‘계·정·혜’에 대응하는 닦음의 목표로 설정한, 무상 스님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선의 메아리
‘기억에 없는 것이 계율’이란 어떤 의미일까? 성우 스님에게 여쭈었다. “행해도 행한다는 의식 없이, ‘내가 율사다’ 하는 간판을 걸어 놓지 않고도, 나의 모든 행위가 계율에 상응해야지요. 기억 정도가 아니라 내 마음 어느 구석에도 한다는 의식 없이 바르게 행하는 것이 ‘기억에 없는 것이 계율’이라는 말의 뜻이지요. 스님들의 행은 그래야 합니다.” 성우 스님은 선종 운운하며 계율을 경시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한다. “모든 수행의 근본이 계율입니다. 능엄경에도 나와 있듯이, 계율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수행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요,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불애보리(不碍菩提)라고 말들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의 궤변이에요. 녹이 쇠를 녹입니다. 계·정·혜 삼학의 근본이 계율이에요.” 성우 스님은 선사들이 계정혜 삼학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일찍이 『선문답』이라는 책에서도 밝혀 놓았다. “어느 때 백낙천이 유관 스님께 물었다. ‘선사라 하면서 어찌하여 설법을 하십니까?’ 유관 스님이 말했다. ‘위없는 보리(菩提)가 몸에 덮이어서 계율이요, 입으로 말하면 설법이요, 마음으로 행하면 참선이니, 움직임에는 셋이지만 그 이치는 하나이다. 어찌하여 분별을 일으키는가?”[『선문답』(한겨레출판사, 1979), 102쪽] 여기서 ‘위없는 보리(菩提)가 몸에 덮이어서 계율’이라는 말은, ‘기억에 없는 것이 계율’이라는 말과 통한다 하겠다.
선문답
불교의 인간관은 ‘그 사람의 행위가 곧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날 때부터 천한 사람과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그 행위에 의해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된다.”(숫타니파타) 했다. 이 게송은 주로 ‘업사상’이나 ‘평등사상’을 논할 때 인용되지만, 계행의 원점으로 볼 개연성도 충분하다. 위 게송 앞에 어떤 사람이 천한 사람인지를 밝힌 게송이 열거돼 있다. 화 잘 내고, 생물을 해치고, 동정심 없고, 공격적이고, 독재적이고, 훔치고, 거짓말하고, 빚지고도 갚지 않고, 물건을 강탈하고, 병든 부모를 섬기지 않고, 가족을 때리고, 대접을 받고도 답례할 줄 모르고, 바라문이나 사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수행자를 헐뜯는 등의 행위를 하는 사람이 천한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천한 사람에 대해 말하기를, “성자(아라한)가 아니면서 성자라고 칭하는 사람은 우주의 도둑,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라 했다. 현대 사회에서도 지탄 받을 거의 모든 행동이 적시돼 있다. 성자를 사칭하는 것을 가장 천한 행위로 강조한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성자 즉 해탈한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숫타니파타는 초기 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고층에 속한다. 율장이 집성되기 이전인데도 율장에서 ‘하지 말라’고 한 금계들이 ‘천한 사람’의 행위로 거의 망라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불교의 최종 목표는 지혜의 완성—깨달음—이고, 거기에 이르는 길은 윤리적인 삶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모든 악을 그치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여, 스스로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이라는 칠불통게(七佛通偈)의 일깨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계 없이 선정과 해탈은 무망하다. 성우 스님은 계율을 ‘감로의 문’이라 한다. 청정 계행 없이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성우 스님은 “계율이 반듯해야 불교가 반듯해진다.”는 소신으로 많은 율사를 배출했다. 성우 스님으로부터 율맥을 전수 받은 전계 제자는 30명이 넘는다. “한 30여 명에게 전계를 했는데, 이런 경우는 별로 없어요. 자운 스님만 해도 다섯 분이에요. 다 인연 소산입니다. 의도적으로 하려 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에요. 우학 스님한테도 전계를 했는데, 대구에서 포교를 크게 한 스님이지요. 그런 스님인데도 어떤 내적 갈등을 심하게 겪었던가 봐요. 그러던 어느 날 바람에 기왓장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바뀌었답니다. 그때 바뀐 마음의 상태를 적은 게송을 가지고 저한테 왔어요. 그것을 보여 주면서 전계를 받고 싶다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로서는 안 해 줄 수가 없죠. 그런 탁월한 스님한테 어떻게 전계를 안 해 주겠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30여 분 스님한테 전계를 하게 됐지요.” 성우 스님은 전계식도 최대한 간단히 했다. “요란한 전계식 같은 거 안 해요. 대신 계를 전하는 게송을 한글로 해 줬어요. 다들 한문으로 하는데, 저는 솔직히 한문이 싫어요. 한문이라는 외투를 벗고 싶어요. 한국불교가 답답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한문이라는 두껍고 높은 벽을 넘지 못해서 그러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분들한테 한글로 아주 짤막하게 네 구절의 게송을 전했어요.” 물에 젖지 않을 불에 타지 않을 25조 가사 한 바탕. 위 게송을 전해 받은 전계 제자는 봉정 영진 스님이다.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이다. 유나 소임 전에는 여러 차례 무문관 수행을 했다. 무문관 수행을 할 때는 매일 1,000배 이상 절을 했다고 한다. 성우 스님과 기질적으로도 통하는 바가 있다. 절집에서 율사의 존재 의미는 선근장양과 대중화합의 버팀목이 된다는 데 있다. 승가의 거울로서 보리심을 기르고, 청정하게 머물도록 하는 길잡이가 된다. 하지만 율장에 따라 살던 과거와 달리 사회법에 기초한 종헌·종법이 사찰 운영의 근거가 되면서 율사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다. 율장의 조목 가운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장의 근본정신이나 제정의 취지마저 바랜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으로의 역할이 더 막중하다고 볼 수 있다. 성우 스님은 계율의 본질이 닫아 걸고 금지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는다. “계율이라는 것은 얽어매는 것이 아니에요. 더 큰 자유를 주기 위해서 정해 놓은 것이 계율입니다. 계율을 지킬수록 자유로워집니다.” 스님의 열린 사고는 대승계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다. ‘범망경 보살계’의 제40 경계는 ‘가리지 말고 계를 주라’는 것이다(受戒非儀戒). “일체의 임금·왕자·대신 (…) 노비와 일체의 귀신을 가리지 말고 모두 계를 받게 할지니라. (…) 법사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이로써 백리 천리 밖에서 와서 법을 구하는 자에게 보살 법사로서 나쁜 마음과 성내는 마음으로 계를 일러 주지 않는 자는 경구죄를 범하는 것이다.” 계를 받고자 하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누구에게나 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대승계의 정신이다. 대승계는 소승계를 포괄한다. 현재 조계종 스님들은 사분율에 의거한 구족계와 대승계인 보살계를 다 받는다. 이에 대한 성우 스님의 말이다. “구족계 보살계를 다 받아야지요. 대한불교조계종이 대승불교로서 대승의 행을 하기 위해서는 보살계가 꼭 필요합니다.” 대승의 핵심은 보살도의 실천이다. 그 사상적 지평을 최대한 넓혀도 보살정신을 벗어나지 않고 최소로 줄여도 보살정신은 남는다. 소승계와 대승계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소승계는 구체적 행위로 범해야 범한 것이 되지만 대승계는 마음속으로 생각만 해도 범한 것입니다. 그만큼 대승계는 넓고 깊어요. 지켜내기가 아주 어렵지요. 수행으로 마음을 여는 것이 실천의 바탕입니다.” 성우 스님에게 지계는 그 자체로 수행이다.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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