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스님은 인과를 ‘밤에도 뜨는 태양’이라 한다. 여기서 인과란 자연법칙이나 논리적 정합성이 아니라 ‘선인선과’, ‘악인악과’ 같은 인과응보를 말한다. 스님은 ‘밤에도 뜨는 태양’이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업(業)의 명명백백함을 강조한다.
‘인과’라는 ‘태양’은 성우 스님의 60여 년 수행 길을 밝혔다. 출가 자체를 숙세의 인연으로 여겼고, 인과의 도리에 투철했다. 업보사상을 바탕으로 불교 태교를 창안했고, 어떤 주제의 대중 법문에서도 업과 그 과보는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상응한다는 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최근에는 업을 주제로 한 연작시조 108편을 모아 시집을 냈다. 스님은 업의 작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사람을 일회적 삶을 사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염없는 시간 이전부터 살아온 존재로 본다. 이 세상에서는 인연의 화합으로 사람이라는 존재로 살지만 또 다음 생에는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한 영원을 살아가는 본질적 요소는 바로 업(業)의 작용이다. (…)
흔히들 자기가 자기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눈물을 쏟고, 주먹도 내 두르고,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고함도 지르는 것이다. 그러한 업이 모이고 쌓여서 살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그 업의 힘으로 존재해 있다가 나중에는 지은 업의 힘에 따라 또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떠난 다음에는 중유(中有)라는 세상에 있다가 또 인연을 따라 가게 되어 있다.
삶은 업의 연속이다. 다만 밖의 모양만이 변할 뿐이며 그것은 오직 스스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태교에세이』(토방, 2004), 14~15쪽
태교에세이
‘업(業, Karma)’은 행위를 의미한다. 몸[身業]으로, 말[口業]로, 생각[意業]으로 행한 모든 것. 그 모든 행위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이 인과응보다. 그런데 우리는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어렵게 살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현실을 보면서 인과응보에 대해 회의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불교는 시간의 문제로 대답한다. “악한 사람도 악행의 과가 익기 전에는 복을 누린다. 악행의 과가 무르익으면 죗값을 받게 된다.”(법구경 제119 게송)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착한 사람이 화를 입는 것도 선행의 과가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삶이 전생 업의 결과이고 현재 업이 다음 생의 과가 된다는 윤회전생의 문제로 차원이 넓어지면, 교의로 받아들이기는 해도 그 위에 자신의 생각을 포개 놓는 데 주저하게 된다. 전생과 내생을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증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온다. 업과 윤회는 믿음의 영역인가, 사실의 영역인가?
성우 스님은 우리의 현실, 개인의 실존 자체를 업보라고 본다. “현실이 곧 업의 결과예요. 업보는 자기 한계이기도 하지요. 다들 그 한계 내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고 열반이에요. 오직 수행으로서만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님은 업보를 운명론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의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표명한 것이 태교다. 스님이 주창한 태교 원리의 핵심은 업의 극복이다.
성우 스님은 태교를 태어날 아기의 전생 업을 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본다. 그렇게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원력소생’이다. 이와 상반된 의미의 출생이 ‘업보소생’이다. 업보소생을 이해하면 원력소생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불교적 관점에서 사람의 탄생은 자신의 선택이다. 자업자득. 자신의 업력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무명과 갈애로 점철된 업의 파도를 타고 오는 것, 이것이 업보소생이다.
성우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원력소생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기 원력과 부모 원력. “자기의 원에 의해 태어나는 원력소생의 표본이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오백생이라는 엄청난 세월을 오로지 보살의 마음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런 비원(悲願)이 있었기에 진리를 발견하였고 또 인류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이렇게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누구도 그렇게 태어나기는 어렵다. 현재 인류가 사는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어질고 착한 아이가 오기를’ 발원하는 태교가 원력소생이다. 기도와 참회, 6바라밀의 실천으로 2세를 기다린다. ‘업’에 끌려 다니는 탄생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부모의 현생과 내생을 밝은 삶으로 닦아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세상은 업의 총체다. 약 80억 명 개개인의 실존은 저마다의 전생과 현생 업의 총체다. 세계는 모든 개인들의 업-별업-이 얽히고설켜 만든 또 다른 업—공업-이 뒤엉켜 이루어진 업의 총체다. 화엄의 무진법계도 그 사상적 기초는 ‘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화엄 법계는 진리의 빛으로 조명된 세계상이다. 보살도를 전제로 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 업(業)이 곧 사(事)이므로, 업의 정화가 곧 무애인 것이다. 그 도리를 성우 스님은 이렇게 노래한다.
전생에 지은 업을
그 누가 알랴마는
오늘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네
한 생각 내려놓으면
업의 다리 건너리.
—‘업·22’ 전문, 『풀꽃 화엄』(토방, 2022)
풀꽃 화엄
시집 『풀꽃 화엄』의 부제는 ‘108업 시조(時調) 심경(心經)’이다. 업·1~업·108까지 업을 주제로 한 108편의 연작시인데, 업의 연기(緣起)이기도 한 사바에서 화장세계의 도리를 읽어낸다. 그래서 풀꽃 화엄이다. 스님은 ‘시인의 말’에서 “업이란/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에도 잡히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한 현실// 이 화두를 어쩌면 좋으랴” 하고 썼다. 세계는 우리 개개인의 업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성우 스님은 인과를 ‘밤에도 그 과녁을 분명히 찾아가는 화살’에 비유하기도 했다. 인과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업을 따라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중생이다. 수없이 생을 거듭하면서 생긴 업식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물든 마음을 보살과 부처의 마음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쉬울 리 없다. 그래도 사람 몸 받아 세상에 나온 만큼 밝은 마음, 따뜻한 마음으로 살다 보면 마음이 바뀌고 운명이 바뀐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앞에서 ‘업과 윤회는 믿음의 영역인가, 사실의 영역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했다. 불교의 답은 자명하다. ‘업과 윤회’를 믿지 않으면 불자가 아니다. 인과를 부정하는 것은, 밤하늘의 ‘반짝반짝 작은 별’이 실제로 작다고 생각하는 만큼이나 대담한 무지다. 우리 눈에 보이는 북극성은 작은 별이다. 하지만 실제 밝기는 태양의 2,500배, 반지름은 태양의 46배라고 한다. 태양의 반지름은 지구 반지름의 109배 정도다.
성우 스님의 수행과 교화의 일생을 한 그루 나무에 비유하자면 ‘계율사상’과 더불어 ‘업보사상’이 뿌리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