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널리 전하는 일 가운데 핵심은 법문이죠.” 성우 스님은 다양한 포교 방편 가운데 ‘법문’을 매우 무겁게 여긴다. 포교 방법으로서 법문은 가장 전통적이다. 부처님의 ‘전도선언’ 이후 지금까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보편적인 ‘문(門)’이었다.
성우 스님의 첫 대중 법문은 보살계를 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젊은 시절 보살계를 설할 때 청법 대중 가운데 은사 스님의 도반이기도 한 석주 스님이 앉아 계실 때가 있었다. 석주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신 자리였던 것이다. 그런 어른 앞에서 법문을 해야 했으니 얼마나 긴장되고 조심스러웠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한 마디 한 마디 혼신을 다했을 것이다.
성우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면 청산유수 같은 달변은 아니지만 언제나 곡진하고 자상하다. 그리고 쉽다. 귀가 어두운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한다. 이런 법문 스타일은, 젊었을 때 석주 스님 앞에서 법문을 하면서 지니게 된 태도와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들어 논지를 설득하는 방식이 몸에 밴 결과일 것이다.
성우 스님은 계율에 관한 법문을 많이 했다. 그 가운데서도 보살계에 관한 법문을 할 때는 환희심을 느꼈다고 한다. “보살계를 설할 때 보람을 느끼죠. 그냥 듣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10중대계(十重大戒), 48경계(四十八輕戒) 모두 실천을 해야만 하는 것들이에요.” 스님은 보살계 수계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대승보살계는 받는다는 생각만으로 공덕이 됩니다. 보살은 진리를 찾아가는 수행의 도정에 오른 사람이에요. 우리의 생은 끝이 없어요. 금생도 중요하지만 다음 생도 중요해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 수행하면 이번 생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성불합니다. 여기에 대승보살계를 받는 뜻이 있어요. 인연은 심어 놔야 하니까요.
2000년 대학생수련법회
재가자라 할지라도 삼귀계, 오계, 보살계를 받지 않으면 부처님 제자는 못 됩니다. 아무리 깨끗해도 걸레는 밥상에 오르지 못합니다. 계를 받아야만 불제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알건 모르건, 지키든 지키지 못하든 계를 받으라고 하는 거예요. 인연이라도 지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보와 인연을 지으면 언젠가는 움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성우 스님은 수계 법문을 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이 ‘불살생계’다. “재가 5계, 사미 10계, 보살계, 비구계 모두 첫째가 불살생입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물이든 인간이든 목숨의 가치는 동등합니다.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악업은 없어요. 원한을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어요. 자비사상의 극치가 불살생이에요. 불살생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선근입니다.”
성우 스님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태교’를 주제로 한 대중 법문도 즐겨 했다. “어디서 법문을 청하면 태교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우리나라 절집에서 태교 이야기를 하는 분은 없었으니까, 법문을 청하는 쪽에 미리 밝히고 그렇게 했지요. 파계사 주지 때도 그랬고, 무상사에 와서는 토요일마다 한 적도 있었어요.”
스님은 왜 스님네들의 삶과는 대극에 놓인 세간의 일인 태교에 그토록 정성을 들였을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람이 태어나는 일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이죠. 그런 세상을 만들, 아름다운 사람을 맞이하는 일이 태교예요.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회,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일입니다.”
성우 스님의 태교는 사람의 탄생이라는 사적인 문제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조망하는 관점을 제공한다. 모든 사회적 문제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업과 업이 충돌하고 뒤엉킨 결과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업의 소멸과 창조적 극복이라는 ‘원력소생’으로서 태교는, 사회 문제의 근원적 해소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스님의 태교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불교적 해법을 찾아가는 방법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성우 스님의 태교는 태아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부모의 마음자리를 밝히는 일이고, 오랜 윤회전생의 업을 참회하는 일이며, 다음 생을 위해 복덕을 쌓는 일이기도 하다.
성우 스님은 재가 불자들의 신행에 대해서도, 책으로 치자면 형식적인 한두 페이지가 아니라 두툼한 분량으로 법문을 했다. ‘절을 왜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 흔히 ‘기도’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재가 불자의 수행에 대한 스님의 법문을 따라가 보자.
“절은 내가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내’가 ’진여 자성’의 ‘나’에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아만심을 꺾기 위해 절을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 삼독으로 뭉쳐진 나를 버리기 위해 절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절에서는 절을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오만과 탐욕심을 버리고 하는 절이 진정으로 부처님께 하는 절입니다. 그것이 정례이고 오체투지입니다. 몸과 마음을 모두 던져서 절을 해야 합니다. 신행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삼천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잘못하면 아만심만 키워요. 단 한 번을 하더라도 진리의 길을 열어 보이신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담아 깨끗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자성불을 밝히기 위한 절이고, 부처님 지혜 속에서 하는 절입니다.”
“염불이든 독경이든 주력이든 참선이든, 본질은 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든 반듯하고 간절한 신심으로 하면 성취할 수 있어요. 기도의 힘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사경을 하면서 삼매에 드는 스님도 있어요.
‘염불’을 파자 하면, 생각 염(念)은 사람 ‘人’에 이제 ‘今’이고, ‘佛’은 깨달음이에요. 현재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 염불입니다. 한 세상 살아갈 길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 염불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성우 스님은 영가 법문도 매우 중요시하였고, 49재 같은 천도재를 지내는 것이 최고의 효도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영가천도법문』을 두 권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 그 뜻을 “이 법문을 기쁜 마음으로 공양 올리오니, 좋은 양식으로 삼아 백겁의 주림 달래기를 간절히 발원한다.”고 썼다.
스님은 “우리나라는 오천 년 간 가난과 외침에 의한 전쟁, 지식인과 권력자들의 횡포에 한을 안고 떠난 영가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영가들은 다른 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지은 인연 따라 이곳에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 인연법은 우주 법계의 도리예요. 영가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염불 독경입니다. 살았을 때 불교를 믿었든 믿지 않았든 상관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바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천도재라는 것은 영가의 업을 풀어주고 녹여주고 삭혀주는 것입니다. 이고득락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음 생에 만날 때 행복한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고통을 가족들이 받게 됩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천도재는 선연을 맺는 일입니다.”
성우 스님의 대중 법문 주제는 계율·태교·기도·영가 법문과 천도재로 대별할 수 있겠는데, 어떤 법문이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주제로 통한다. ‘밝음’이다. 마음자리를 밝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고 자비이며, 이고득락이다.
영가천도법문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