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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포교에서 ‘영상’ 포교로

성우 스님은 출가 이후 오랜 세월 ‘글’을 통해 세상과 만났다. 문자를 통한 문화적 접근의 포교였다. 이런 스님이 영상 매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불교TV BTN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부터다. 1997년 9월부터 시작한 ‘차문화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스님은 2001년 9월까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차의 역사, 차와 태교, 일상에서의 차생활을 안내하며 시청자들이 삶의 격조를 높이고 신행의 깊이를 더하도록 도왔다. 스님이 진행을 그만둔 다음에도 진행자를 바꿔가며 2008년 5월까지 이어간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영상 매체의 힘은 생동감과 현장감일 것이다. BTN에서는 개국 때부터 어김없이 새벽 5시면 ‘새벽예불’, 저녁 6시면 ‘저녁 예불’을 방송한다. 불자들은 가정에서 TV를 켜고 BTN 채널을 선택하면 그윽한 산사의 예불에 동참할 수 있다. 최고의 경전 강의와 고승의 법문이 펼쳐진다. 불자들은 BTN과 함께 가정을 법당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절에 가는 것과는 다르지만 늘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에게는 최고의 신행 길잡이이자 동반자다. BTN은 출범 당시부터 현재까지 불법 홍포와 불자들의 수행 진작을 통한 한국불교 중흥이라는 목적의식에 충실했다. 설립 과정을 보면, 준비 단계에서 구상했던 범종단 참여는 무산됐고 조계종 24개 교구본사와 총지종이 대주주로 참여하여 설립 등기를 마쳤다. 하지만 개국도 전에 설립 자본금이 부족한 상황에 처했는데, 불자 주식공모에서 해법을 찾았다. 청약 자격은 불교 신자로 한정했고 청약서에 소속 사찰 혹은 불교단체를 명시하도록 했다. 당시 BTN은 “이번 주식공모가 단순 주식공모가 아니라 향후 불자공동체 건설의 토대가 될 것임을, BTN불교TV는 특정 종단 특정 사찰의 것이 아닌 2000만 불자 모두가 주인임을 알려 나가고, 모든 불자가 BTN 불교TV의 주춧돌이자 벽돌 한 장이 되어 줄 것을 당부”(『불교TV 20년사』 39쪽)하며 불자들을 설득했다. 1994년 9월 10일부터 11월 5일까지 2개월 조금 못 미치는 기간 동안 79억여 원이 모일 정도로 불자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BTN의 주식공모는 자금난 타개의 효과뿐만 아니라 ‘모든 불자가 주인’이라는 말이 홍보용 수사가 아닌 BTN의 정체성이 되게 했다. BTN 1995년 3월 1일 개국했다. 개국 특집으로 준비한 ‘일본 속의 한국불교’,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북한불교의 어제와 오늘’ 같은 프로그램은 한국불교의 과거와 현재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망함으로써 BTN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개국 무렵의 정규 편성된 ‘자비의 천수천안’, ‘나의 삶, 나의 불교’, ‘퀴즈 특급! 이뭐꼬?’, ‘비법 공개! 사찰 음식’, ‘TV 신행상담’ 같은 프로그램은 삶 가운데서 불법을 실천하는 불자를 위한 방송으로서 BTN의 지향을 분명히 보여줬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BTN의 야심 찬 출발과 달리 일찍 위기가 찾아왔다. 케이블TV 가입자 수의 절대 부족과 같은 외부 요인이 주된 원인이었다. 모든 케이블TV가 경영 위기에 몰렸다. BTN은 여섯 차례에 걸친 불자 주식공모와 구조 조정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갔다. 성우 스님이 ‘차문화산책’이라는 프로그램 진행자로 BTN과 인연을 맺은 1997년 9월은 BTN의 경영 상태가 가장 나쁜 상황으로 치닫기 직전이었다. 곧이어 1997년 11월 IMF 사태라고 불리는 외환위기로 국가 부도 상황이 닥쳤다. 140여 명이었던 직원이 20명으로 줄었고 방송 중단 상황에 이르렀다. BTN 임원진은 성우 스님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다. 스님은 차마 물리칠 수 없었다. 오랫동안 글을 써 왔던 성우 스님은 포교 수단으로서 대중 매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BTN과 같은 영상 매체는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어떻게든 살려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BTN 프로그램 진행이라는 인연도 작용했지만 불조의 혜명을 잇는 스님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인 것이다. 시급한 과제는 회생 자금 확보였다. 성우 스님은 가장 불교적인 방식으로 BTN 돕기에 나섰다. ‘탁발’이었다. 전국의 사찰을 돌며 ‘집집마다 법당을 만드는’ 불교TV의 중요성을 설득했다. 스님에게 그것은 기도였다. 스님네들과 불자들이 감응했다. 불자들의 원력으로 설립되었으므로 회생 또한 한국불교의 자체 역량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스님의 생각이 주효한 것이다. 남아 있는 직원들에게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저 스님도 저러다 말겠지’ 하는 열패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단순히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탁발을 시작했을 뿐이었는데 점점 깊이 관여하게 된 것이다. 2000년 6월 성우 스님은 BTN 회장으로 취임했다. 성우 스님은 BTN 회장 취임 후에도 절집의 방식—불자들의 보시로 이루어진 정재(淨財)를 소중히 아껴 쓰는 살림—으로 재정을 운용했다. 쉽게 말해서 긴축이었다. 스님은 수입 지출 내역을 매달 사원들에게 공개했다. 월급도 받지 않았다. 직원들의 신뢰가 깊어졌다. 노조에서는 2년 만에 더 이상 재정 공개를 하지 말라고 했다. 1년 만에 부채 규모는 절반 이상 줄어 40억 원대로 축소됐다. 광고 수입도 늘었다. 2003년 1월 모든 금융권 부채를 갚았다. 스님은 경영 상태가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하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근근이 명맥만 유지해 나가는 것이 BTN 회생의 목적일 수는 없었다. 사옥 마련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여기에서 자체 법당의 필요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임대하여 사용했던 금호전기빌딩에서는 법당이 없었기 때문에 매주 월요일 아침 직원 법회를 인근 석불사에서 봉행해야 했다. 봉천동에 사옥을 짓기로 했다. 봉천동 사옥은 2001년 11월 21일 첫 삽을 떴고 2003년 3월 30일 이전을 완료했다. 스님은 영상 포교 원년을 재선언했다. 최첨단 장비를 도입하고 인력을 2배로 늘리겠다는 약속은 지켰지만, 사옥이라는 ‘내 집 마련’의 목표는 무산됐다. 당초 계획은 건물 완공 시점에 불교TV가 건물을 매입하여 입주하는 것이었지만 심각한 수준으로 부실 시공되었기 때문에 임대 방식으로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BTN은 2008년 4월 1일 방배동 신사옥 시대를 열었다. 이날 무상사에서 열린 이전 법회에서 성우 스님은 ‘디지털 방송’을 선언했다. 방배동 신사옥에서는 모든 장비를 현대화하고 디지털 방송 시스템을 구축했다. 오늘날 BTN이 한국불교의 대표적 영상 포교 매체로 위상을 굳건히 한 데는 성우 스님의 노력뿐 아니라 불자들의 후원과 임직원들의 노력, 특히 구본일 사장의 기여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구본일 사장은 “BTN은 회장 성우 스님의 원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며, 전 그저 이를 직원들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불교신문》, 2014.4.25. 인터뷰) 하고 말하지만, 뛰어난 관리 능력으로 성우 스님의 원력을 뒷받침했다. 성우 스님은 가장 불교적인 방식으로 BTN을 회생시켰고, 오직 불법홍포와 불자들의 신행을 진작시키고 한국문화의 중심축으로서 불교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송사로 위상을 정립했다. 스님은 BTN 20주년 기념사에서 “(…) 미래의 가치와 희망은 불교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불교의 가치와 희망을 발현하는 주인공은 바로 영상 포교사 BTN입니다. BTN 가족들이 미래의 주인공인 원력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들은 조용히 묵묵히 아낌없이 후원해주시는 사부대중의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불교TV 20년사』, 2015) 하고 말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BTN 회장으로서 성우 스님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받들고 사부대중을 무섭게 여기는 것만을 소임의 원칙으로 삼았다.
BTN 불교TV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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