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를,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 교리를 널리 펼쳐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 일이라 한다면, 사전적 의미 말고는 별로 건질 게 없다. 중요한 건 ‘어떻게’라는 방법론이다. 아무 데서 아무한테나 불경을 읽고 염불을 한다고 해서 포교가 될 리는 만무하다.
부처님도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삼불능(三不能)—이 있다 했다. 결정된 업은 즉시 없애지 못하고,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하지 못하고, 모든 중생계를 한꺼번에 제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이러할진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부처님 품으로 이끌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삼불능’이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적어도 한 가지, ‘인연 없는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만날 인(因)을 심는 계기는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성우 스님은 1988년 여름 월간 『다담(茶談』)이라는 차 전문지 발행인이 됐다. 이 잡지는 1987년 4월에 창간했는데 곧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됐다. 잡지를 창간한 이기윤 시인이 아는 사이였던 성우 스님을 찾아와 경영난을 토로하며 맡아주기를 요청했다. 차인이기도 했던 스님으로서는 못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성우 스님이 『다담』 발행인이 됐다. 이에 대해 스님은 “절집에 살면 듣는 말이 있잖아요. ‘밥값 하라. 밥값 하라.’는 말을 늘 듣게 되는데,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이것도 중으로서 밥값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인수를 한 거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성우 스님이 발행하던 『다담』지는 ‘문화 민족의 자부심을 추구하는 차 생활 교양지’를 표방했다. ‘문화’에 방점을 두었다. 당시는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민족 문화 고양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때였다. 민예 운동과 함께 사회 각 방면에서 문화운동이 활발했다. 『다담』지는 이런 사회 문화적 분위기의 자장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지만 일치하지는 않았다. 성우 스님이 주목한 ‘차 문화’는 우리의 기층문화이자 불교문화였다. 차 문화를 통해 불교문화의 외연을 넓히는 한편 한국 정신문화를 고양하고자 한 이중의 뜻을 품었던 것이다.
한국의 차 문화는 처음부터 불교의 토양 속에서 자라나 꽃피었다. 차는 삼국시대 때 당나라 유학승을 통해 들어온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나라에서 주관하는 수륙재나 팔관회에서 왕이 부처님께 차를 공양할 정도로 다례가 성행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로 인해 불교가 약화되면서 차 문화도 함께 시들었다. 조선 후기에 한국의 다성으로 추앙받는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스님에 의해 중흥됐으나 지속되지는 못했다. 불교의 쇠퇴와 함께 차 문화도 쪼그라들었다.
육법공양(六法供養)으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께 올리는 차는 지극한 공경의 상징이다. 차가 귀해져서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하는 조선 후기 불교의 상황은 새벽예불 때 독송하는 ‘다게(茶偈)’에도 반영돼 있다.
我今淸淨水(아금청정수) 제가 이제 청정수를
變爲甘露茶(변위감로다) 감로차로 바뀌게 하여
奉獻三寶前(봉헌삼보전) 삼보께 받들어 올리오니
願垂哀納受(원수애납수) 애틋이 여기시어 받아 주시옵소서
물이 아니라 차를 올릴 때의 원래 다게(茶偈)는 ‘今將甘露茶(금장감로다)/ 奉獻三寶前(봉헌삼보전)/ 監察虔懇心(감찰건간심)/ 願垂哀納受(원수애납수)’이다. 현재 다게는 백파 긍선(白坡亙璇, 1767~1852) 스님의 『작법귀감(作法龜鑑)』이 저본인 것으로 보인다. 백파 스님이 차 대신 물을 올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 형편을 이실직고한 셈인데, 불교 의례에서 차를 얼마나 중하게 여겼는지 알게 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한국의 차 문화가 쇠미해진 데는 조선 왕조의 억불만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과도한 차세(茶稅)와 차 봉납(捧納)을 견디지 못한 농가에서 아예 차밭을 없애버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차밭을 가꾸고 차를 만들어 한국 차를 다시 일으켜 세운 분이 초의 스님이었다. ‘다성’이라는 칭호가 조금도 과하지 않다. 초의 스님은 차를 매개로 유가(儒家)와 교유했고 그런 관계가 명품 차를 만드는 기반이 됐다.
성우 스님은 경봉 스님이 주신 차 한 잔이 계기가 되어 차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스님은, 차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성우 스님에게 『다담』지는 불교와 사회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그 다리를 통해 사람들이 불교에 한 발 가까이 다가온다면, 불교에 친근감을 느끼고 호감으로 발전한다면, 그것이 곧 불법과 인연 맺기인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포교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차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경제 성장의 좋은 효과였다. 태평양화학에서 제주도에 차밭과 차 공장을 설립한 때도 1983년이었다. 다도 열풍은 그렇게 세상에 퍼졌다. 하지만 문제는 형식에 집착하는 일본식 다도를 우리 것인 양 여겼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 차의 연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한국 차 문화의 정체성 자체가 정립되어 있지 않은 때였다.
성우 스님은 한국 차 문화가 다시 부흥기를 맞이한 듯한 그 무렵부터 한국 차 문화의 뿌리가 한국의 절집에 있다는 것을 밝히며 일본풍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예지원 설립자로 초창기 다도 확산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강영숙 씨에게 ‘한국 차인이라면 한국 차를 가르치라.’고 설득하여 노산 이은상 선생과 운학 스님 같은 분이 발제자로 나선 세미나를 개최하게 함으로써 ‘한국 차 문화 정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스님은 이미 1981년에 『다도』를 출판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다담』지를 발행하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차 문화는 1970년대 후반 정체성 없이 붐을 이루었던 때와는 다른 양상이다. 차 학과를 개설한 대학도 많이 생겨났고 연구 성과도 상당히 쌓였다. 일본식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지는 시비는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나름의 이론과 형식을 갖춘 차인(회)도 많다. 그렇다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커피가 기호음료의 대세를 이루면서 위축된 상황은 또 다른 문제이고,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다도가 아닌, 생활의 일부로서 차 문화의 정착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절집의 차 문화 또한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선방에서는 여전히 다각(茶角) 소임이 있고 소참의 전통은 이어져 온다. 생활의 일부로서 차 문화가 살아 있는 곳은 역시 절집이다. 앞으로 한국 차 문화가 어떻게 전개되든 성우 스님이 『다담』지나 『다도』, 『차와 선』을 통해 밝혀 놓은 한국 차 문화의 원형으로서 ‘불교 다례’는 한국 차문화의 이론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문제에서 하나의 준거로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성우 스님은 『다담』지를 발행하던 중 『현대불교』지를 창간했다. 한동안 두 잡지를 함께 발행하다가 새로운 발행자(용운 스님)에게 『다담』지를 넘겼다. 몇 년 전까지 『다담』지는 한국차인연합회에서 기간지화 하여 계간으로 발행해 왔다.
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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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