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국내 포교까지 이끈 ‘해외 포교’

“암자 생활은 수행의 자리가 굳게 잡힌 뒤라야 쉬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법하게 사는 게 쉽지 않아요.” 성우 스님이 스님들의 ‘홀로살기’에 대해 한 말이다. 스님들은 암자 또는 흔히 ‘토굴’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홀로 정진하기도 한다. 그것을 절집 말로 ‘독살이’라 하는데, 옛 노스님들은 이를 극도로 경계했다. 정진력이 굳건하지 않은 상태에서 홀로 살게 되면 해이해질 수도 있고, 샛길로 빠졌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면 병통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중처소 같으면 노스님들이 경책을 해 주고 도반들끼리도 서로 독려하며 탁마를 하게 되는데, 이런 조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불가의 출가 수행자는 ‘홀로 함께’, ‘함께 홀로’ 사는 사람들이다. 큰절에 가면 여러 스님들이 이동할 때 ‘한 줄’로 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를 안행(雁行)이라 한다.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되 철저히 홀로 날아가는 기러기의 행렬에 빗댄 것이다. 수행력 혹은 정진력이라 하는 것은 홀로여도 흔들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우 스님의 첫 암자 생활은 입산 10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팔공산 기슭 조그마한 암자에서 생식을 하며 화두 정진을 했다. 이후 선지식을 찾고 선어록과 전등록을 보면서 역대 조사와 큰스님들의 오도송과 열반송을 모아 책으로 엮고, 중앙불교승가학원을 설립하고, 다도 강의를 하고, 몇 권의 책을 냈다. 그렇게 한 시절이 갔을 무렵, 홀로 사는 시간이 찾아왔다. “중앙불교승가학원을 종단에 귀속시킨 다음이었어요. 몇몇 스님들의 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거죠. 그때 마침 대만 홍법원에서 한 철 살 기회가 생겼어요. 겨울만 대만에서 지내는 식으로 한국과 대만을 오가며 3년 정도 살았죠. 그러던 중에 홍콩 홍법원이 비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홍콩으로 가게 되었어요. 아마 1984년인가 그럴 거예요.”
대만 홍법원 법당
성우 스님의 새로운 암자(?) 생활이 시작됐다. 사실 형태만 달랐을 뿐 암자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확연히 다른 점은 해외라는 점이었다. 뜻밖에 다가온 해외 포교라는 부담감도 적지는 않았을 것 같다. “솔직히 부처님 법을 펼치겠다, 포교하겠다,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차 마시기 좋고 글쓰기 좋겠다. 혼자서 정진하기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지요.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실제 홍콩 생활이 단순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단출하기는 했다. “처음 법회를 보는데 신도가 아홉 명이었어요. 사실 아홉 명도 많지요.” 그래도 홍콩은 대만보다는 한국 교민들이 많다. 정부에서 공개한 해외동포 통계를 보면 (가장 오래된 통계인 1993년을 기준으로) 대만 2,740명, 홍콩 4,567명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대부분은 유학생이나 일반 체류자들이고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는 1,000명도 되지 않았다. 성우 스님이 홍콩 홍법원에 있을 때는 이보다 10년 전이었으므로 더 적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 포교란 어떤 의미였을까. “홍콩에 사는 한국 사람 가운데 한국에서 불자였다가 개종을 한 경우가 많아요. 살기 위해 홍콩에 왔는데 살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우울증에 걸리고 하는가 봐요. 그래서 현지 의사들한테 가 보면 ‘서울병’이라 한대요. 처방은 서울 갔다 오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 서울 가서 일주일이나 보름쯤 친구들 만나고 가족들과 지내면 생생해진답니다. 이런 분들한테 정말 필요한 게 종교예요. 이게 종교의 일차적 사명이죠.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 그게 바로 불교의 ‘이고득락(離苦得樂)’ 아닌가요. 불교가 이런 도움을 주지 못하니까 해외의 불자들 가운데 말이라도 통하는 교회 같은 곳의 모임에 갔다가 개종을 하게 되는 거고요. 당시 해외 포교는 교민 중심이었다고 봐야지요. 미국이나 유럽은 좀 달랐겠지만 홍콩, 대만 쪽은 그랬어요. 해외에서 현지인을 상대로 포교를 하려면 언어 소통 능력을 갖추고 현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선행해야겠지요. 그런 다음에 포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성우 스님의 홍콩 생활은 거의 암자에 사는 것에 가까웠다. 혼자 밥 지어 먹고 정진하면서 신도들이 모이면 법회를 열었다. 홍콩 불자들이 보수적인 것도 성우 스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이 때의 보수란 가치로서 보수가 아니고 생활 방식의 보수를 말한다. 그들은 한국에서 살던 방식을 고수한다. 모국을 떠나올 때의 시간, 타임캡슐 속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여행 자유화(1989년) 이전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성우 스님은 홍콩 홍법원에 있을 때 간혹 ‘스님, 애가 아파요. 경기를 일으켜요.’ 하고 다급하게 말하는 젊은 엄마들의 전화를 받곤 했다. 이때 스님은 친정어머니를 대신한 역할을 해야 했다. 세상에 스님이라는 존재가 필요한 이유는 많았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태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한층 깊어졌다. 성우 스님이 대만·홍콩 홍법원 생활에서 얻은 과외의 소득도 적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당시 한국에는 생소하던 중국차를 국내에 체계적으로 알린 것이다. 『다도』라는 책을 저술했고 다도 강의를 통해 한국 차 문화 확산에 애썼던 분의 행보와는 상반되지 않느냐고 생각한다면 단견이다. “한국 차문화라는 우물 안에 갇혀 있으면 그것조차도 제대로 안 보여요. 바깥을 알아야 우리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스님은 국내 일간지에 상당 기간 동안 중국차를 알리는 글을 썼다. 중국차의 다양한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한국차의 장단점과 고유의 정체성이 선명해지기를 기대한 것이다. 모든 문화가 그렇다. 비교와 대조를 통해 정체성이 공고해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경쟁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세련과 정련이 이루어진다. 실제로 성우 스님은 대만의 차 문화에 좋은 의미의 충격을 줬다. 스님의 글이 한국의 차 전문지에 연재되는 것을 보고 대만 차인들이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한국보다 차 문화의 저변이 훨씬 넓은 대만에 그런 잡지가 없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그들은 차 전문 잡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문화는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신을 더 자신답게 만든다. 성우 스님이 대만·홍콩 홍법원에서 활동한 기간은 햇수로 14년이다. 물론 그곳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고 한국을 오갔지만,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한 몸으로 두 곳을 살았던 만큼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15권의 책을 냈고, 두 종의 잡지를 창간했다. 해외 포교 과정에서 국내 포교를 위해 할 일이 더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담
· 집필자 : 윤제학

관련자료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