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까지만 해도 포교의 수단으로는 인쇄 매체가 가장 유력했다. 라디오 채널인 BBS(불교방송)는 1990년, 텔레비전 채널인 BTN(불교TV)은 1995년에 개국했다. 이전까지도 포교 매체는 책 그리고 잡지와 신문 같은 정기 간행물이었다.
성우 스님은 1979년 중순부터 1980년 초까지 〈대한불교〉(현 불교신문)의 주간을 역임했다. 등단 후 10년쯤 되는 시기였고, 중앙불교승가학원(현 중앙승가대학교)를 설립하고 원장 소임을 맡아 하던 때였다. 당시 불교계 현안에 대한 문제 인식에 따라 열정적으로 실천 행보를 하던 시절이었다.
성우 스님이 〈대한불교〉의 주간을 역임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필진으로 참가한 것까지 감안하면 〈대한불교〉와의 인연이 그리 얕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불교〉 지면의 ‘여시아문’이라는 고정란에 청탁을 받고 쓴 칼럼이 게재 거부를 당한 적이 있다. 그리 과격한 글이 아니었고 ‘스님네들끼리 불신을 거두고 서로 믿고 의지하여 두려움 없이 불사(佛事)에 임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글에서 스님은 종단을 이끌어가는 스님네들 사이의 불신이 더 이상 국민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젊은 스님의 심경을 토로했다. 당시 불교계의 상황이 소장 스님의 애정 어린 비판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조계종 기관지로서 〈대한불교〉의 한계이기도 했다.
1961년 1월 1일 창간된 〈대한불교〉는, 발행인에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청담 스님, 주필에 이종익 박사, 편집국장에 안낙준 씨 명의로 출범하여 순간(旬刊)으로 발행했다. 1964년에는 발행인이 사업가 이한상 씨로 바뀌어 주간 대판 4면으로 지면을 혁신하고 종단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 매체로 체계를 갖추었다. 이후 〈대한불교〉는 군승 제도,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해방 후 망실 불교기본재산 찾기 운동에 앞장서며 불교의 위상을 높였다. 하지만 1972년 이한상 씨의 사업 실패로 폐간 위기를 맞게 되었다가, 박경훈 씨 같은 분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극복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 법란 후 강제 폐간됐다가 1980년 12월 21일 자로 복간하면서 〈불교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 불교 언론 매체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
성우 스님이 〈대한불교〉 주간을 맡았던 무렵에도 종단 분규로 불교계의 내홍이 끊이지 않았다. 조계종단 운영 체제를 종정과 총무원장 가운데 누구를 중심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양분되었고, 총무원장 중심제를 주장하는 쪽에서 개운사에 독자적인 총무원을 개설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우 스님이 종단 내분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으니 총무원 기관지인 〈대한불교〉로서는 게재를 거부할 만도 했다.
종단이 양분된 상황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비판을 넘어 냉소와 조소를 넘나들었다. 욕설이나 멸시에 가까운 글을 발표하는 유명 인사도 있었다. 김원용 교수, 김동길 교수 같은 이들이었다. 성우 스님은 이들이 종단 현실에 대한 비판이 불교 자체에 대한 무시, 승단 전체에 대한 조롱으로 비약하는 것은 묵과하지 않았다.
『법시(法施)』라는 불교 잡지에 김원용 씨가 쓴 ‘스님의 얼굴’이라는 글이 실렸다. “절 또는 거리에서 스님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런데 남송 양해(梁楷)의 묵화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고담한 문자 그대로의 도기가 흐르는 스님의 얼굴은 본 일은 없는 것같이 느껴진다. 어찌 된 일인지, 언제 보아도 어딘가 어색한 데가 있는 것만 같다.”는 서두로 시작하여 “나는 승려입네.” 하는 것이 그 이유라고 쓴 글이었다. 우선 김원용 씨의 글은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 양해의 그림 속 인물은 도교나 불교와 관련된 초자연적이고 신비적 인물이었다. 김원용은 자신이 이상화한 비현실적인 인물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견주어 비아냥대는 투로 ‘스님의 얼굴’을 말한 것이다. 저의는 물론 방법도 옳지 않았다.
성우 스님은 현실이 아닌 그림 속의 이상에 젖어 말하는 발상과 시비지심에 개탄하며 사실(史實) 적시로 반박했다. 우리나라의 진감국사는 “얼굴이 얼마나 검은지 흑두 화상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균여 대사는 “얼굴이 얼마나 볼품없었던지 아기 때 숨겨서 키울 정도였다.”고 밝힌 다음, “자기의 지식과 체험의 공간 밖에 참으로 광대무량한 세계가 여여히 있다는 사실을 지식인답게, 대학교수답게 알기를 바란다.”고 당부한다. 끝으로 “언젠가 김원용 씨의 한국미술사를 참으로 고맙게 읽었던 때가 연상되곤 하였다. 괴로운 일이다.”는 말도 덧붙였다.
성우 스님은 김동길 씨가 『씨알의 소리』(1978년 12월호)에 불교를 비하하는 글을 썼을 때도 일침을 가했다. 스님의 글에 언급된 김동길 씨의 불교 폄훼 정도는 도를 넘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무섭고 음산한 절간’, ‘어린 내 눈에 중은 거지나 다름없게 보였습니다.’,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는 것이죠.’ 따위의 말을 내뱉고는, ‘나도 모르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는 식의 위악적인 언사로 슬쩍 꽁무니를 뺄 여지도 만들어 둔 글이었다.
성우 스님은 김동길 씨의 글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워요. 스스로 분수를 모르니까요. 분수 모르고 설치고, 말만 하고, 글만 쓰니 혼탁한 사회가 되고 말지요.” 하고는,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김동길 씨, 바람은 잠시뿐이에요. 그것이 설령 폭풍우라 할지라도.”
위에서 밝힌 김원용 씨와 김동길 씨의 글에 대한 성우 스님의 비판은 스님의 책 『우리들의 약속』에 실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스님은 공개적으로 김동길 씨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스님과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김동길 씨가 불교신문사로 찾아오기도 했다 한다.
성우 스님이 〈대한불교〉에 관여하던 시절은 젊은 때였기도 했지만 승려 문인으로서 어떤 사명감을 가진 때였던 것 같다. 그러한 스님의 심회를 다음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님으로서 사회에서 공인하는 관록 있는 문인으로 있다면 그 스님의 시 한 편 잡문 한 편 모두가 포교의 도구이다. (…)
우리나라 최고의 문학작품인 향가 역시 스님의 작품이 반 넘는다. 오늘 승려 문인들의 작품이 사회에 기여하는 힘은 엄청나다.
—『우리들의 약속』(한겨레출판사, 1979), 48쪽
김원용 씨나 김동길 씨의 글에 대한 성우 스님의 대응은, 당시 불교계의 상황이 혼란스럽고 그로 인하여 위상이 추락했다 할지라도 부당한 폄훼에 대해서까지 침묵하는 것은 당당한 태도가 아니라고 여겼던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들의 약속
우리들의 약속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