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不二) 사상’은 부처님이 인류에 남긴 위대한 유산 가운데 하나다. 자타(自他)·선악(善惡)·미추(美醜)·호오(好惡)·염정(染淨)·유무(有無)·생사(生死)… 그리고 이사(理事)의 불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본 세계와 존재의 실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상계의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똑같지는 않다. 또한 무상하다. 불이(不二)의 존재 양태는 연기(緣起)이고 중도(中道)다.
불이의 삶, 그것이 곧 도의 체현일 것이다. 절집에서 보이는 ‘불이문(不二門)’은 스님들이 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표상이다. 스님들의 일상사는 ‘이(理)’와 ‘사(事)’의 경계에 걸리지 않는다. 모든 스님들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렇게 살아왔다.
성우 스님은 1995년에 파계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승랍 31년째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었다고 볼 수 있는 때였다. 사연은 이렇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주지와 맞지 않아요. 그런데 당시 종단 차원에서 율원이 없었어요. 만약 기회가 되면 율원을 열고 싶었어요. 파계사가 규모가 작고 재정도 어렵지만 그래도 파계사 정도면 율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지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파계사에 율원이 설립되었다. 1996년 4월, 성우 스님이 해인율원을 수료한 지 28년이 지난 때였다. 당시 조계종 개혁 종단의 지향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 측면도 있다.
율원(금당) 앞에서 제자들과
파계사 영산율원은 조계종 단위 사찰로는 최초의 율원으로, 성우 스님의 원력이 없었다면 설립 가능성 자체가 희박했다. 개원 첫 해 4명의 율원생이 들어왔다. 성우 스님이 율주, 철우 스님이 율원장, 도일 스님이 유나를 맡았다. 세 스님은 교수사 역할까지 했다. 율원생의 수가 적은 것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당백의 인재를 길러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일 년에 예닐곱 차례 외부 강사를 초빙하여 특강을 했다. 애당초 영산율원의 목표는 스님들에게 율장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율장을 가르칠 수 있는 전문적 능력을 갖춘 교수사 양성에 있었다.
호진 스님을 특강 강사로 초빙했을 때였다. 당시 호진 스님은 동국대 경주 캠퍼스 교수였는데 수행자로서도 학문적으로도 존경 받는 스님이었다. 성우 스님의 부탁으로 강의를 온 호진 스님은 수강생이 4명뿐인 걸 보고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조금은 당혹스런 듯했다. 막상 강의를 하고 나자 호진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성우 스님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호진 스님은 제 체면을 봐서 강의를 하러 오긴 했는데 학인이 달랑 4명뿐인 걸 보고는 마음이 좀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나서는 저한테 그래요. 정말 ‘일당백’이라고. 원래는 오전 강의만 계획되어 있었는데 오후에도 강의를 하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더 신심이 난다는 겁니다.”
영산율원에서 공부한 스님들은 정녕 일당백이었다. 전 해인사 율원장 혜능 스님, 전 통도사 율원장 덕문 스님,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 학장 대경 스님 등 영산율원을 거쳐 간 다수의 스님들이 총림의 율원장과 교수사가 되어 후학을 길렀다.
성우 스님은 영산율원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대학원 과정과 같은 계율연구원인 ‘비니원(毘尼院)’을 개설하고, 계율 연구에 필요한 장서를 갖춘 율학 도서관인 ‘비니장(毘尼藏)’을 열었다. 비니장 또한 한국 최초일 것이다. 스님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나중에 영산율원 율주를 맡은 철우 스님의 역할도 컸지만 사찰 운영의 큰 틀을 정할 수 있는 주지라는 자리의 힘도 작용했다. 이(理)와 사(事)가 원융한 절집 운영의 묘리다.
‘명자(名字) 주지’라는 절집 말이 있다. 이름만 주지 자리에 걸어 놓은 경우를 말한다. 성우 스님도 명자 주지에 가까웠다. 성우 스님은 사찰 살림과 관련한 일은 총무 스님에게 일임했다. “제가 파계사 주지할 때는 율원만으로도 벅찼어요. 총무한테 맡기고 거의 간섭하지 않았어요. 주지라고 일일이 간섭하면 젊은 사람이 좋아하겠어요. 결재도 한 달에 한 번만, 먼 산 보면서 도장 찍어 주는 거지요. 맡겼다 하면 무조건 믿어야지요. 믿지 못하면 맡기지 말아야죠. 맡긴 입장에서 이것저것 따지며 결재를 한다는 건 맞지 않지요. 결재라는 걸 하면서 한 번도 이러니저러니 따져 본 적이 없어요.” 성우 스님의 상좌였던 그 총무 스님은 현재 선방 수좌로 살고 있다.
절집의 일에 대한 세간의 오해 가운데 하나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을 명확히 분리된 무엇으로 보거나 우열 차원의 가치 개념을 적용시키는 점이다. 이판과 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 절반으로 나눈 각각이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판과 사판이 존재하고, 사판의 영역에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 일이 왕왕 있었지만 ‘이’에서 일탈한 모습인 것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판, 사판의 지칭 대상은 유동적이다. 1962년 통합 조계종 출범 후 효봉 스님부터 현재 성파 스님에 이르기까지 11분의 종정 가운데 성철 스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종정이 주지나 총무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흔히들 세간에서는 ‘이판/사판’은 한국불교에만 있는 불교용어라고 하는데, 한국불교에만 있는 건 맞지만 ‘불교용어’라고는 볼 수 없다. 절집에서 항용 승랍의 오랜 정도에 따라 ‘상판(上判)’과 ‘하판(下判)’, ‘구참’과 ‘신참’으로 칭하는 것과 같은, 승가의 ‘집단 방언(사투리)’으로 보는 것이 무난한 이해일 것이다.
성우 스님이 율원 설립의 가능성을 보고 파계사 주지 소임을 맡은 건 사실이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코 주지 소임을 수단시하지 않았다. “모여 사는 스님들이 반듯하면 신도들도 반듯하게 모여 들어요. 스님네들이 엉뚱한 생각, 엉뚱한 짓을 하면 사찰은 흐트러지게 돼 있어요.”
성우 스님은 율풍의 진작이 신도들에게도 좋은 영향이 미치도록 했다. 신도들은 안행(雁行)하는 율원 스님들을 보며 신심을 단정히 했다. 주지 재임 시 불사도 일으켰다. 파계사는 전각들이 작아서 대중 법회가 여의치 않았는데 시원한 규모의 설법전을 지은 것이다. 그 설법전이 없었다면 대중들이 공부하고 기도하는 도량으로는 파계사가 옹색했을 것이다. 스님은 주지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설법전 점안식
성우 스님은 파계사 주지라는 ‘사’, 영산율원 율주라는 ‘이’, 두 영역의 소임을 병행했지만 그 둘은 충돌하지 않았다. ‘이’로써 ‘사’를 반듯이 했고, ‘사’로써 ‘이’를 고양시켰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