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석정 스님의 선화(禪畵)에서 체(體)와 용(用)의 합일을 보다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에서 시(詩)·서(書)·화(畵)는 지식인의 소양이었다. 불립문자를 표방한 선불교에서는 그것과 거리를 두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특히 간화선이 완성된 중국 송대의 선불교는 사대부와 유연한 관계 설정을 통해 당시 불교계를 주도했다. ‘거사선’이라는 말로 표현되듯 사대부는 간화선 수행자이자 선승들의 후원자였다. 시·서·화는 선승과 사대부 간 교류의 매개였다. 시·서·화에 두루 능한 사람을 일러 삼절이라 하는데, 조선 후기의 초의(草衣, 1786~1866) 스님은 시·서·화에 차(茶)를 더하여 사절(四絶)로 일컬어졌다. 현대 한국불교에도 삼절을 이룬 스님이 있었다. 석정(石鼎, 1924~2012) 스님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이었던 석정 스님은 시와 서에도 능했다. 성우 스님은 통도사 학인 시절에 석정 스님을 만나 평생 존경하며 가까이 지냈다. 석정 스님도 성우 스님을 무척 아꼈다. 나이 차이는 걸림이 되지 않았다. 성우 스님의 법호인 무봉(無縫)도 석정 스님이 지은 것이다. ‘천의무봉’의 그 무봉이다. 석정 스님은 성우 스님의 ‘솔직하고 꾸밀 줄 모르는’ 성품에 ‘무봉’이라는 옷을 입혔다. 평생 시를 써 온 성우 스님이 시인으로서 시를 글씨로 옮기는 서예(書藝)를 하는 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스님은 붓을 잡은 적이 없다. 잘할 수 없는 분야에는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는 성정과 그 세계에 대한 존중이 더해진 선택으로 보인다. 성우 스님은 서화에 대해서는 애호가로 만족했지만 감식안은 예리했다.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스님들과 오랫동안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안목이 트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님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발행되는 《영남일보》에 서화에 대한 평문을 연재하기도 했다. “글씨를 전혀 쓰지 못하는 사람이 서평을 쓴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긴 한데, 제 글이 나간 날에는 남석 이성조라는 서예가가 100부씩 신문을 사 갔다고 해요. 국전 입선 작가이기도 한 그분이 신문을 사 간 이유는 자신이 운영하는 서실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구양순체니 무슨 체니 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체를 형성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이 담긴 글씨를 써야 한다는 저의 논지에 공감한 것이었겠지요.” 성우 스님이 석주 스님의 글씨를 좋아했던 이유도 석주 스님만의 글씨였기 때문이었다. ‘예술 세계에는 제2가 없다.’는 것이 성우 스님의 지론이다. 성우 스님은 ‘선화(禪畵)’가 우리 사회의 대중적 문화 지평 속에 자리 잡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성우 스님은 1970년대 중반에 『현대시학』에 석정 스님에 대한 글을 썼다. 또한 석정 스님의 달마도 12점이 1년 동안 『현대시학』의 표지화로 나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석정 스님의 현대시학 표지화
성우 스님이 『현대시학』에 발표했던 글의 일부를 옮긴다. (석정 스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 수행으로 그림을 그렸다. (…) 선화는 희로애락의 어느 것에 젖어도 안 된다. 붓이 선(禪)의 용(用)으로 융화되어 표출되는 그림이어야 하며 선과 그림이 별개로 나누어졌다면 선화라고 할 수 없다. (…) 스님의 송을 들어 보면, 내 법으로 내 그렸으니 我當用我法 잘되고 못 되는 것 나만이 아네 優劣我能知 좋거든 가지고 싫거든 말게 取捨任君意 욕해도 좋고 칭찬해도 좋네 不患有是非 이렇게 오만스러울 정도로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고집은 스님의 세계가 분명하다는 반증이다. 어떤 의미로는 예술에 있어서 오만한 객기는 필수적일지 모르지만 객기 없는 오만일 경우 독보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오만은 허용되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 달마도의 모습에 백태도(百態圖)란 말이 있다. 달마대사의 모습을 백 가지로 나타내어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변화무쌍한 달마의 모습을 간략한 붓의 작용으로 완벽하게 나타내어야 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역정이 없고서야 어찌 이룰 수 있으랴. 무한을 향한 생명력의 집념을 달마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 (…) 그러나 어느 한 작품이든지 의도적으로는 못하시는 것 같다. 마음의 어느 선(線)이 울릴 때 그때만이 작품을 할 수 있는 계제인 것 같다. 이제 석정 스님의 선화는 원숙의 경지에서 졸(拙)로 돌아와 일체와 합일하는 독보를 걷고 있다. —『우리들의 약속』(한겨레출판사, 1979), 190~195쪽. 위 글이 발표된 때는 선화란 말 자체가 사회적으로 생소할 때였다. 석정 스님의 선화가 1년 동안 『현대시학』의 표지화로 나감으로써 불교문화의 한 세계와 세상이 조금은 경계를 허물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현대시학』은 다른 스님의 그림도 표지화로 쓰기로 했다. 성우 스님은 새로운 스님을 소개해 달라는 『현대시학』의 부탁을 받고 중광 스님을 만났다. 중광 스님은 흔쾌히 동의했다. 중광 스님의 그림은 『현대시학』 100호 표지화가 되었고 이를 《동아일보》가 기사화했다. 중광 스님의 파격적인 그림은 순식간에 화제가 되었다. 중광 스님에게 여러 잡지사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한 방송의 메인 뉴스에도 출연했다. 중광 스님은 유명 인사가 되었다. 성우 스님이 석정 스님의 그림을 어느 정도로 아꼈는지를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아는 스님을 만나서 새로 지은 선방에 석정 스님의 달마도를 모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성우 스님으로서는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들리는 얘기인즉, 선방 대중들의 반대로 석정 스님의 달마도를 모시지 않기로 했을 뿐 아니라 그림마저 모 시인에게로 갔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안타까움을 넘어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스님은 그 시인을 만나 정중하게 뜻을 전하고 석정 스님의 달마도를 되찾았다. BTN 사옥 2층 선방에는 석정 스님의 달마도가 걸려 있다. 수묵이 아니고 불화 기법으로 그린 채색 달마도다. 성우 스님의 말대로 ‘붓이 선(禪)의 용(用)으로 융화되어 표출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게 하는 그림이다. 성우 스님이 머무는 공간에는 석주 스님의 글씨와 석정 스님의 그림이 걸려 있다. 늘 그것을 보며 수행의 원점을 살폈다. 스님이 석정 스님의 선화를 세상에 알리는 글을 쓰고 서화에 대한 감식안을 벼린 것도, 일상에서 마음의 경계가 부처님 법과 계합하는지를 점검하는 탁마의 과정이었다.
달마도 - BTN 사옥 2층 선방
· 집필자 : 윤제학

관련자료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