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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 스님으로부터 배운 하심(下心)을 몸에 새기다

성우 스님은 사람 복을 타고 났다. 절집 구경도 못 해봤지만 수행자처럼 살아온 모친은, 옳다고 믿는 바를 남에게 요구할 때 자신이 먼저 실천하는 태도를 물려줬다. 은사 스님은 산중의 법도를 호흡 간에 심어 주었다. 강원과 율원에서는 평생을 함께할 도반을 만났다. 구족계를 받은 후 세상 속으로 나와 뜻을 펼치면서 난관에 봉착했을 때는 더없이 미더운 어른이 있었다. 그런 어른 가운데 한 분이 석주 스님이다. 석주 스님은 성우 스님의 은사 고송 스님과 도반이기도 하다. 석주(1909~2004)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의 큰 어른이었다. 불교 신자가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스님은 아니지만, 절 집안사람들은 지금도 스님의 이름만 들으면 자비 보살을 떠올린다. 석주 스님의 처소에는 문턱이 없었다. 누구든 찾아오면 격의 없이 만났다. 어디서든 법문을 청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만약 하심(下心)이라는 말에 눈과 귀가 있다면 석주 스님 앞에서는 머쓱해질 것이다. 이런 스님의 인품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았지만, 무엇보다 큰 업적은 ‘부처님 가르침의 사회화’를 선구적으로 실천하였다는 사실이다. 1961년 법보원(동국역경원 전신) 설립을 통한 역경 불사, 1968년 칠보어린이법회·칠보어린이합창단 창단, 1985년 칠보유치원 개원, 칠보사 대웅전—큰법당— 편액과 주련의 한글화 등은 석주 스님이 남긴 선구적 행보의 일부다. 사실 ‘불교의 사회화’라는 말도 공연한 레토릭이다. ‘불교 사회화’는 대승불교의 태동과 함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으로 이미 천명되었지 않은가. 석주 스님은 그 정신 그대로 살다 간 보살이었다. 성우 스님은 석주 스님을 이렇게 기렸다. 보살이 따로 있나 석주 스님이 보살이지 시정(市井)에 살면서도 물들지 않으시고 한 송이 흰 연꽃처럼 스님답게 사셨네 —‘석주(昔珠) 스님’ 전문. 『봄볕에 차를 달이며』(토방, 2022) 성우 스님이 석주 스님이라는 언덕에 처음으로 기댄 때는 1980년이었다. 성우 스님과 몇몇 젊은 스님들의 원과 결기로 만든 ‘중앙불교승가학원’의 운영 주체를 조계종단으로 넘겨 ‘중앙승가대학’으로 바뀔 때 학장을 맡아 준 분이 석주 스님이다. 물론 1차적으로는 당시 총무원장 성수 스님의 수락이 있어 가능했지만 석주 스님의 원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오늘날 모습의 중앙승가대학교로 이어질 수 있었다. 석주 스님은 1988년 4월 16일까지 2대에 걸쳐 8년 동안 중앙승가대가 승가 교육기관으로서 뿌리를 튼튼히 하는 데 헌신했다.
중앙승가대학
절집의 노숙(老宿)이 머리 파란 수행자를 노숙(老熟)으로 이끄는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성우 스님은 젊은 시절 석주 스님으로 하여 그런 아름다운 풍광에 젖어들었다. 성우 스님이 철우 스님, 종진 스님과 함께 석주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삼각산 승가사에서 3일간 보살계 산림을 할 때였다. “보살계 산림 첫 날 오전 종진 스님이 보살계에 대해 법문을 했어요. 그런데 석주 스님께서 대중들과 함께 법문을 들었어요. 종진 스님의 입장에서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어요. 은사 스님보다 연세가 높으신 원로 스님이 법문을 들으시니까 법상에 앉은 종진 스님은 등에서 땀이 났죠. 점심 공양 때 종진 스님이 저한테, ‘오후에는 법당에 나오시지 말고 방에 계시라고 석주 스님께 말씀 드리라’는 거예요. 제가 석주 스님과 가까운 걸 아니까 저한테 시킨 거죠. 그래서 제가 석주 스님께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스님은 왜 남의 행복을 막으려고 하시오. 젊은 스님 법문 듣는 게 나에게는 행복이오’ 하고 말씀하시는데, 가슴 가득 기쁨이 차오르더라고요. 이튿날 제가 법상에 올라갔어요. 역시 석주 스님께서는 신도들과 똑같이 삼배를 하시더군요. 석주 스님은 그런 분이었어요. 하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 주신 거지요.” 이후에도 석주 스님은 당신이 창건한 아산 보문사에서, 조실로 계시던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보살계 산림을 할 때 성우 스님을 전계사로 불렀다. 당신이 서도 될 자리에 젊은 율사를 세워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춤으로써 젊은 스님과 신도들에게 보살심을 증장시켰던 것이다. 석주 스님은 오대산 선방에서 정진할 때 한암 스님으로부터 『범망경』을 공부해서 율에도 밝았다. 성우 스님과 석주 스님의 인연은 성우 스님이 불교TV를 맡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위성방송 준비를 하면서 기금 마련을 위한 석주·석정 스님 선서화전을 열었을 때 석주 스님은 흔쾌히 50점의 붓글씨 작품을 써 주었다. 불교TV 사옥 1층 ‘무상사’ 편액도 석주 스님의 글씨다. 석주 스님은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한글 서체에서는 스님의 부드러운 위엄과 고아한 풍격이 느껴진다.
석주 스님의 무상사
석주 스님의 글씨체는 어떤 ‘체’도 닮지 않았다. 스님은 평소 당신의 글씨에 대해 ‘그냥 힘 안 들이고 마음 가는 대로 쓴다.’고 했다. 아주 마음에 들지 않은 경우 말고는 한 작품을 만드는 데 두 번 세 번 쓰진 않았고, 그런 경우도 드물었다. ‘예(藝)’를 한다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서성(書聖)이라 불린 왕희지는 ‘뜻이 붓보다 앞에 있어야 한다(意在筆前)’고 했다. 석주 스님의 붓 앞에 있었던 건 자비심뿐이었다. 성우 스님이 머무는 공간은 어디든 석주 스님의 묵향이 배어 있다. 성우 스님에게 왜 석주 스님의 글씨를 좋아하는지 여쭈었다. 즉답이 돌아왔다. “고졸하잖아요.” ‘고졸(古拙)’의 의미에 대해서는, 손재주로 쓴 글씨를 멀리 한 추사 김정희의 말을 빌리는 게 좋겠다. 추사는 “예서의 법은 방경(方勁)과 고졸(古拙)을 으뜸으로 여기는데, 그 졸함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예(漢隸)의 묘는 오로지 졸한 곳이 있다.” 했다. 노자도 “큰 기교는 졸한 것 같다(大巧若拙)” 했다. 불교TV 성우 스님 집무실 입구 벽에는 석주 스님의 글씨 ‘大慈大悲(대자대비)’가 걸려 있다. 석주 스님이 94세 때 쓴 글씨다. 단정한 해서체인데 예서체도 조금 느껴진다. 온화한 결기. 단정한 격외. 석주 스님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씨다. 상좌뻘 되는 젊은 율사에게 삼배를 하던 석주 스님이 거기 있다. 그 절을 받은 젊은 스님이 전계대화상이 되어 계를 설할 때, 늘 석주 스님의 삼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우 스님은 석주 스님으로부터 배운 하심을 몸에 새겼다.
석주 스님의 대자대비와 함께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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