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예불문의 시작 구절이다. 이렇게 아름다우면서 묵직한 말은 만나기 어렵다. 사실 이런 말은 풀어 옮기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지심(至心)·귀명(歸命)·례(禮) 모두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슴에 착 붙는 말이다. 그 뜻은 그때 울리는 느낌으로 충분할 것 같다.
‘스님들은 수행, 신도들은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간의 통념이다. 이런 생각 또한 오해로 뒤범벅된 상식처럼, 실상의 많은 부분을 외면하고 있다. 스님들의 기도야말로 치열하고 간절하다. 성우 스님도 그렇게 기도했다.
운문사 사리암
“저는 첫 기도를 운문사 사리암에서 했어요. 7일간이었는데, 제 스스로 잘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통도사에 있을 때니까 1964년도예요. 그때도 사리암은 비구니 스님이 암주였는데 거기 계셨던 스님들이 지금도 운문사 청신암에 있어요.” 스님은 그 기도의 가피력으로 학인 생활을 탈 없이 마치고 해인사 율원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그렇게 쌓인 공력이 ‘중앙불교승가학원’ 설립, 다도(茶道), 태교, 대만·홍콩 홍법원에서의 포교를 추동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운문사 청신암
성우 스님은 기도의 핵심은 간절함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부모가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이, 내 머리에 불이 떨어진 것같이 해야 합니다. 병이 났을 때 좋은 약, 좋은 의사를 찾는 심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절실해야 합니다. 누가 부처님 앞에 그런 마음을 안 가지겠습니까만, 의식적으로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믿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속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믿음이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 깨끗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큰 신심을 바탕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면 성취하게 돼 있어요. 기도해서 성취하지 못했다 하면, 그 사람이 큰 믿음에 이르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체험한 바를 얘기하자면 그렇습니다.”
성우 스님은 승랍 30년이 넘은 1990년대 초반에도 기도 정진을 했다. “지장기도를 100일간 했어요. 그래도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남해 용문사에 가서 또 100일 기도를 했어요. 참으로 희한하게도 또 마음에 차지를 않았어요. 억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이듬해에 밀양 표충사 앞 골짜기에 토굴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가서 몇 달간 살면서 기도를 했지요. 그러고 나니까 지장사상이 얼마나 원대한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더군요. 그때부터 영가 법문도 하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그쪽으로 고개도 안 돌렸어요. 참 희한하죠. 기도의 힘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지장보살은 대지를 품은 보살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지장(地藏)’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미륵 부처님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 이 세상을 돌보는 보살이다. 이러한 보살이 우리에게는 지옥 중생 구제의 보살로 인식되었다. 『지장보살본원경』(줄여서 『지장경』)의 영향과 우리의 조상 숭배 문화가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 지장보살의 본원은 ‘지옥의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에는 나 또한 성불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의 서원을 ‘대원(大願)’이라 하고, 우리는 지장보살을 예경할 때 ‘대원본존’이라 호명한다.
성우 스님은 ‘기도의 힘은 불가사의하다’고 말한다. 신비적 혹은 초능력 같은 불가사의를 말하는 걸까. 스님의 말을 더 들어보자. “기도 성취는 전미개오(轉迷開悟)입니다. 어두운 마음을 밝게 바꾸어 쓰면 복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여러 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업을 쌓아왔어요. 그에 따른 업보를 싹둑 잘라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그래서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 괴로움을 받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현재의 내 마음을 잘 다스리면 현재와 미래를 밝게 열어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좋은 일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 받을 일만 하게 되는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를 잘 알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기도예요. 그렇게 되면 남에 대한 원망심도 떨어져 나갑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불보살님의 위신력으로 이겨나가겠다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 자체가 가피입니다.”
기도의 불가사의한 힘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우리가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야말로 불가사의하다는 점이다.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명확한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온갖 사건 사고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간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지심귀명례’를 풀어 옮기지 말자고 한 이유는 ‘귀명’이라는 말의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무게 때문이다. 흔히들 이 구절 속의 ‘귀명’을 ‘목숨을 바쳐’ 혹은 ‘목숨을 다해’로 옮긴다. 물론 어느 것도 그릇되지 않았고 ‘신심의 장함’, ‘신심의 간절함’을 강조한다. 이 결연한 의지가 무슨 문제일까 싶지만, 실은 그것이 문제다. 그렇게 되면 ‘귀명’은, ‘나’의 의지만 추켜세우는 꼴이 되므로 그 의미가 하나의 수단—뗏목—으로 축소된다. 귀명은 아직 우리가 가 보지 못한 세계, 생명 본연의 자리로 돌아감을 의미할진대, 그것은 뗏목이 아니라 강 저편 부처의 세계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우리는 부처 자리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것이 아니다. 본각사상에 입각한다 할지라도 그 자리는 아직 가능태일 따름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본질이자 귀명의 길이 아닐까.
기도의 공덕은 숭고한 피동성에서 나온다. 그런 기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우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화두든 기도든 단순해야 합니다. 원을 앞세우지도 말아야 합니다. 관음기도를 한다 할 것 같으면 관세음보살만이 그 기도의 진정성을 증명할 따름입니다. 잘 된다, 못 된다, 잘 해야지, 이런 생각조차도 부질없습니다. 오로지 지극한 신심으로 해야 하는 겁니다.”
기도 가피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불보살이다. 불보살님이 중생에게 베푼 자비의 현현이 가피다. 기도 가피는 근본적으로 피동적이다. 목숨을 바칠 정도의 의지라 할지라도, 그것조차 ‘나의’ 의지가 아니라 불보살님들의 본원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불보살의 위신력을 내 믿음의 저울에 올려놓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극한 신심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성우 스님 말의 본의일 것이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