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성우 스님은 상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내가 죽거든 관 같은 것 하지 말고 가사 장삼만 입혀라. 제사도 안 지내길 바란다. 다만 『반야사상』, 『열반사상』은 법보시했으면 좋겠다.” 대부분 스님들이 임종 전 소박한 장례를 당부하므로 그건 특별할 것이 없지만, 『반야사상』, 『열반사상』 법보시 당부는 인상적이다.
『반야사상』은 선사들이 부른 깨달음의 노래—오도송(悟道頌)을, 『열반사상』은 선사들의 생애 마지막 게송—임종게(臨終偈)를 모은 책이다. 본디 이런 책은 웬만한 저술보다 품이 더 든다.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예삿일이 아니다. 더욱이 생존 스님의 오도송을 알려면 찾아가서 대면을 해야 하니, 그것만으로도 버거운 일이다.
저서 반야사상
성우 스님이 해인사 선방에서 정진하던 때였다. 어느 날 강하게 궁금증이 일었다. “스님네들이 일생 수행하면 딱 두 가지가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도송과 열반송. 깨달음의 경지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오도송, 이 세상 떠날 때 남기는 한 말씀이 열반송이니까요. 그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묻기 시작했어요.” 스님은 도인으로 알려진 스님들을 찾아 ‘스님, 오도송 내놓으십시오’ 하고 단도직입으로 묻기도 하고, ‘이 산중을 거쳐 간 어른 스님네들 오도송이나 어록이 있으면 보여 주십시오’ 하면서 전국을 돌았다.
선(禪)이라 하면 이미 선이 아니라 했다. 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안다. 그만큼 선 혹은 깨달음의 세계는 말—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상식화되어 있다. 사실 상식보다 강고한 믿음은 없다. 과연 그럴까. 선은 무조건 문자를 거부할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선(禪)의 문자 부정을 표방하는 ‘불립문자’라는 말 자체가 이미 문자에 빚지고 있다. ‘직지인심’할 때의 그 ‘마음’을 가리키는 ‘청정법안(淸淨法眼)’,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정법안장(正法眼藏)’, ‘공적진심(空寂眞心)’, ‘미묘정법(微妙正法)’, ‘공적영지(空寂靈知)’ 같은 말들. 정교의 극치를 보여주지 않는가. 그 유명한 임제의 할(喝), 덕산의 방(棒)도 겨냥하는 바 기의(記意)가 있는 한 하나의 기표(記標)가 아닐까.
불립문자는 발화되는 그 순간부터 이미 ‘불리문자(不離文字)’의 메아리를 남길 수밖에 없다. 깨달음의 언어는 진공 상태에서 말해지지 않았다. 역사와 현실, 그것을 이루어 살아가는 중생들의 삶이라는 사태에서 빚어진 것이므로, 불립문자에서 불리문자로 전환 혹은 양립은 필연적이다. 사실 이러한 불리문자의 불가피성은 선불교 등장 훨씬 이전에 용수 보살(150~200년경)에 의해 언명되었다. “(세간의) 언어[俗諦]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궁극의 진실[勝義—眞諦]은 얻을 수 없다.”(『중론』)
조사선의 개조라 일컬어지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스님 이후 선 수행은, ‘언하대오(言下大悟)’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스승과 제자의 문답을 오도의 기연으로 삼는 풍토가 형성되었다. 이로부터 무수한 문답이 어록의 형태로 편집, 전승되었다. 송대에 이르러 그 문답들은 공안(公案)이 되어 참구 대상이 되었고, 공안에 대한 게송인 송고(頌古)와 그것을 강설한 평창(評唱) 등을 담은 『벽암록』이나 『무문관』 같은 공안집이 만들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문자선이 성립되었다. 그 의도를, ‘말과 귀’로만 전승되는 것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란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면이 크다. 간접적 전승의 길이 열려 개오의 방편이 확장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오늘날까지 선 문화가 이어져 온 것도 문자선의 긍정적 영향이라 하겠다. 하지만 문자선의 폐단은 이미 그 시대에 드러났다. 문자 집착, 선어록을 읽고 선시를 짓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제기된 것이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스님이 주창한 ‘간화선’이다. 오로지 공안에 의식을 집중시켜 깨달음을 체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혜 스님은 스승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 스님의 『벽암록』을 불사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간화선은 곧 선문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떠올랐고, 오늘날까지도 ‘선’이라 하면 곧 간화선을 떠올리게 됐다.
압축적이나마 선불교에서 문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조사선의 변천 과정을 살폈다. 그 까닭은 당송시대의 선불교가 맞닥뜨려야 했던 언어—문자에 대한 문제의식이, 천 년 세월을 넘어 성우 스님이 해인사 선방에서 느꼈던 ‘깨달음의 실상’에 대한 궁금증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불립문자와 불리문자, 깨달음과 문자의 긴장 관계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도 추상적이지만 그것을 표현한 ‘열반묘심’, ‘공적진심’ 같은 말들은 더 추상적이다. 자내증의 영역인 깨달음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성우 스님은 무얼 보려고 한 것일까?
한국인은 누구나 ‘밥맛’에 대해서는 최고의 감식가들이다. 하지만 그 맛을 표현할라치면 입맛만 다시고 만다. 밥맛이 이럴진대 하물며 깨달음이랴. 그렇지만 선사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표현하려 했다.(선사들의 문답이나 선시에 격외의 언어가 종횡하는 이유다.) 선사들은 불립문자의 그늘에 숨지 않았다. 만천하에 자신이 본 경계를 드러냈다. 그래야만 했다. 이것이 선문의 도덕률이다. 한 치의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일생 손가락 하나만 세워 보인 금화 구지(金華俱胝) 스님은, 자신을 따라 한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손가락을 잘리고서야 동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세울 수 있었다. 선지식의 친절은 이쯤 되어야 한다.
성우 스님이 알고 싶었던 건 형해화된 문답이나 전형적인 오도송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생동하는 풍광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선사들의 ‘정신적 일상’을 보고 싶었다.
성우 스님이 오도송, 열반송 찾아 나선 일을 ‘정말 잘했구나’ 하고 느낀 때는 명봉(明峰, ?~1975) 스님을 뵈었을 때였다. 명봉 스님은 해인사 강원 3대 강주를 지냈다. 청담 스님이 해인사 주지를 맡으면서 명봉 스님을 강주로 모시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얘기는 전설처럼 전해온다.
성우 스님이 명봉 스님을 뵈었을 때는 해인사 강주를 할 때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물어도 주석처를 알 수가 없었다. 우연히 화엄사 강사 스님과 얘기를 하다가 전주에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주시 전주제지 공장 뒤에 있었는데 ‘감천사’라는 초라한 암자였어요. 사실은 인법당이었죠. 인사를 드리니 젊은 비구니 스님 세 분이 나와요. 스님께 경전을 배우고 있다 하더군요. 불교 시인으로 알려진 김대현 선생도 『능엄경』을 배우고 있었어요. 스님 계신 방으로 갔더니 병석에 누워 계시더군요. 7년째라 했어요. 그런 몸으로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치신 거예요. 무서운 집념이었어요. 선지식의 가풍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죠. 그런 상황에서도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지요. 스님께 예배를 드리니 누워서도 합장을 하시더군요. 한 생의 마지막 고빗길에 오른 모습이었어요.”
성우 스님이 팔공산에서 왔다고 했더니 당신이 파계사 성전암에서 수행한 일을 회상했다. 그러고는 ‘팔공산에서 예까지 왔으면 무슨 일이 있을 터인데 그건 두고 먼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라.’고 했다. 거량(擧揚)이었다. 명봉 스님께서는 노구에 병석에 누워서도 찾아온 수행자에게 정중하게 예를 갖춘 것이었다.
“명봉 스님께서 세 가지를 물으셨어요. ‘젊은 스님은 어디에서 왔느냐?’,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 고구정녕 설법하셨는데 무엇을 설하셨느냐?’, ‘사람의 성품이 악한 것이냐 선한 것이냐.’ 이렇게 물으셨고, 저는 나름의 대답을 올렸어요. 그랬더니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시더군요. 다가가니 손을 펴 보라 하시고는 제 손을 꼭 잡고 말씀하시더군요. ‘젊은 수좌는 이대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앞날의 한국불교를 바로잡아라.’는 곡진한 당부였어요. 그때까지 많은 스님을 뵙고 또 법문도 많이 들었지만 이토록 가슴 깊이 메아리치는 말씀은 처음이었어요.” 스님은 아직도 그날의 만남을 생생히 기억한다. 오도송, 열반송을 찾아 나선 보람은 그 만남만으로 충분했다.
성우 스님과 명봉 스님과의 만남은 1시간 남짓이었지만 성우 스님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명봉 스님은 늘 후학들에게 ‘경전을 줄줄 외워도 참선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명봉 스님이 남긴 열반송은 다음과 같다.
解釋斯經無我印 이 경을 해석해도 나의 마음 안 보이네
冥心聖志唯隨順 아득한 성인의 뜻 그냥 따르나니
寒窮碧落春雷雲 찬 기운 다 가시고 봄 우레도 멎었는데
枯蟄從玆醒且潤 움츠리고 말라진 것 이제부터 피어날까
(번역: 성우 스님)
『반야사상』, 『열반사상』은 1977년에 초판이 발행됐고, 2020년에 증보판이 나왔다. 후학들에게 하나의 거울이 될까 해서. 그 마음, 반세기 전 병석에 누워서 성우 스님의 손을 잡아주던 명봉 스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