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해인율원을 수료한 성우 스님은 범어사 청풍당 선방으로 갔다. 참학(參學)으로써 내면으로 침잠한 첫 시절이었다. 이후 스님은 한동안 외도 아닌 외도를 한다. 1970년 『월간문학』과 『시조문학』으로 등단,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서 찾는 일이 늘었고 만나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다 문득 ‘내 아까운 젊음, 이렇게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스님의 마음이 한 곳을 가리켰다. 해인사 선방으로 갔다. 1972년이었다.
성우 스님의 화두 참구는 선방 이전부터 시작했는데, 그 얘기부터 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 같다. “화두를 언제부터 들었냐 하면 66년도 범어사 강원 학인 때였어요. 『금강경』을 볼 때였지요. 어느 날 보제루에서 새벽예불을 할 때였어요. 그때 범어사에서는 보제루에서 예불을 했어요. 예불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누구에게 꾸중 들은 일도 없고 큰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 꼬집어 봤어요.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면서. 그러다가 이게 뮈꼬, 하는 생각이 불쑥 올라오더라고요. 그 순간부터 ‘이뭣고’ 화두를 시작했어요. 바로 화두 전념이 되더라고요. 남들은 전혀 모르지요. 강사 스님이나 도반한테도 전혀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해인사
성우 스님에게 1972년 해인사 선방 하안거는 환희로웠던 시간이었다. “좌복에 앉았으면 몸은 앉았어도 마음은 떠 있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물론 이 경계가 어떤 경계인가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은 없었죠. 그러면서 스님네들이 정진하시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리고 이 세상 떠날 때 그 정신세계는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스님은 이후 그 정신세계의 실상을 찾아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 다녔다. 그 기간 중에는 주로 파계사와 팔공산 원효암에 머물면서 생식을 하기도 하며 화두 정진을 이어갔다. 그렇게 3~4년 동안 선지식을 만나고 자료를 모아서 낸 책이 『반야사상』과 『열반사상』이다.
성우 스님의 화두는 ‘이뭣고’였다. “스님이라면 누구나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거나 수행의 방편으로 어느 것이든 할 거예요. 저로서는 이뭣고 화두가 체질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절집에서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밥값 하라’는 말이지요. 제가 문서 포교라도 해야지 하고 『다담』이나 『현대불교』 같은 잡지도 냈는데, 중으로서 밥값을 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단순한 생각에서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만 할 수가 없으니까 스스로는 화두를 챙긴 것입니다.”
성우 스님의 ‘이뭣고’는 강원에서 시작되어 선방을 거쳐 일상 속의 참구로 이어졌다. 스님은 14권의 시집을 냈는데 동시집과 태교시집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시집은 화두 참구와 불가분의 관계다. “화두를 잡고 있다 보면 시라는 것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어떤 땐 화두는 도망가 버리고 글만 쏟아져 나오기도 해요.” 스님에게 시는 참선일기이기도 하다. 간단하게나마 그 심경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스님의 첫 시집 『어둠이 온다고 서러워 말라』(한겨레출판사, 1979)에 실린 첫 번째 시 ‘아가(雅歌)’다.
삼월에 내 죽어서
한 송이 연꽃 되리니
지나는 실바람 결에도
온몸으로 우는 연꽃 되리니
밤으로 밤으로만 피는
볼 붉은 연꽃이 되어
깊은 밤에도 불 켠
그대 창가를 엿보는 연꽃 되리니
삼월에 내 죽어서 연꽃 되리니.
초기작인 위 시는 연애시의 외양을 띤 ‘신앙시’로 읽힌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그것도 춘삼월에 ‘죽어’ ‘연꽃’이 되기를 서원한다. ‘생사불이’의 경지를 꿈꾸었다기보다는 ‘나’를 죽여 ‘보살’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보살의 의지는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여린 삶, 어두운 곳에서의 삶, 밤늦도록 잠 못 이루는 불민한 삶의 편에 서겠다는 희구에 다름 아니다. 서정적 어조의 이 초기작에 비해 중기작으로 가면 선취(禪趣)가 그윽해진다.
이 세상 오기 전에 나의 모습 어땠을까
사바를 여의고 그 어디로 갈꺼나
봄볕에 작설차 달여 돌미륵에 올리렴
—‘禪詩·17’ 전문. 『선시』(토방, 1996)
시의 화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소식을 묻는다. 그리고 자답한다. ‘아서라, 지금 이곳을 떠나 무엇을 찾지 말라’고. 그리고 자신에게 권한다. ‘돌미륵’에 차를 공양하라고. 과거·현재·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토를 떠나 정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일깨운다. 하지만 그것이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아닌 듯하다. 막연히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는 식의 뻔한 읽기를 하지 말자는 얘기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봄볕’으로 ‘차’를 달여 ‘미륵’에게 공양하는 데 있다. 삼세가 녹아든 차 한 잔. 그 차의 온도는 봄볕의 온도다. 생명에 바치는 ‘자비의 온도’인 것이다. 자비가 없다면, 깨달음이 무슨 소용일까.
성우 스님의 ‘선시’는 ‘묘오(妙悟)’를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붙들고 씨름한 결과물이 아니다. 위에서 본 시는 스님이 1990년대 중반 호주 타즈매니아의 흔히 무문관이라 칭하는 골방에 자신을 가두고 밤낮으로 참선을 할 때 문득 쏟아져 나온 것들을 묶은 시편들 가운데 하나다. 스님은 그 시집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웃자란 봄바람이 천 년 소나무를 자르는 풍광을 떠올린다면 그저 모골이 송연할 따름이다.” 스님은 언어 표현이 본질에 앞서는 위험성을 ‘웃자란 봄바람’에 비유했다. 하여 스님은 화두를 밀치고 번뇌가 끼어 들 때도 그 심지(心地)를 그대로 드러냈다. “절름 절름 저는 도야지 다리 고치려/ 뜸을 놓는다는 게 아뿔사 잘못 짚은 맥/ 바람난 석등허리에 불만 질러 놓았구려”(‘禪詩·3’ 전문) 같은 시가 그렇다.
성우 스님은 당신의 시작에 대해 ‘부질없다’ 하면서도 시를 거둔다. 근작 시집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쓴 시를 묶은 『봄볕에 차를 달이며』(토방, 2022)이다. 이 시집을 빚은 화두는 ‘사람’, 그 사람의 ‘삶’이었다. 스님이 직간접으로 만났던 99명의 사람에 대해 쓴 시다. 스님 삶에 빛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그 중 한 편, 스님의 은사였던 고송(古松, 1906~2003) 스님을 기린 시를 보자
대통령 지낸 이가 찾아와 삼배를 하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대통령까지 해봐도 별수 없제?”
이 말씀 한 마디로 생을 가늠했네.
—‘고송(古松) 스님’ 전문. 『봄볕에 차를 달이며』(토방, 2022)
예전 노스님들의 용심이 어떠했는지를 선명히 보여주는 시다. 진정한 선지(禪智)는 이런 태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스님은 이 시 아래에 “수행 방법으로 하심과 인욕을 강조했다.”는 짧을 주석으로 고송 스님의 가풍을 요약했다.
1998년 고송 스님의 생신
성우 스님은 평생 시를 썼다. 화두가 잘 들릴 때는 들리는 대로, 도망가면 가는 대로 흘러나오는 것들을 거두어 언어라는 그릇에 담았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