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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律) 공부로 입은 은혜, 율사(律師)가 되어 보은

성우 스님은 범어사 강원 졸업 후에도 공부를 이어갔다. ‘율장’ 공부였다. 당시 스님들의 일반적인 행보와는 상당히 다른 결정이었다. “강원에서 경과 논은 배우는데 왜 율은 빠져 있을까? 삼장이라 하면 ‘경율론’을 말하는데 이 셋을 다 배워야 하지 않는가.” 하는 당위적 의구심이 율 공부에 대한 의욕을 격발시킨 것이다. 당시는 총림도 없었거니와 큰 절에도 율원이 없었다. 범어사 강원으로 갈 때 그랬듯이 이번에도 시작은 무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무작정이야말로 출가 사문으로서 ‘본능적 자각’이 아니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합송하는 결집이 이루어졌다. 불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이 때 ‘율장’도 함께, 그것도 율장이 먼저 결집된 것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흔히 ‘경전 결집’이라 일컫는 언어 관습에서 비롯된 편향일지도 모르겠다. 마하가섭 존자가 부처님 입멸 직후 이루어진 1차 결집을 주재할 때, ‘경’과 ‘율’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결집할 것인지 대중에게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율은 부처님 가르침의 생명이다. 율이 확립되어야만 가르침도 확립된다. 그러므로 율을 먼저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팔리 존자가 율장을, 아난 존자가 경장을 구술했다. 시작할 때의 관용구도 달랐다. 가섭 존자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했고, 우팔리 존자는 ‘이런 일이 있었다’로 말문을 열었다. 율장이 구체적 사건—행위—를 계기로 제정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 하겠다. ‘율은 불교의 생명’이라는 인식은 부처님 입멸 후 제1차 결집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율을 제정함으로써 얻는 10가지 이익 즉 제계십리(制戒十利)를 여기서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 대의를 헤아려 보면, 화합과 지계를 통한 승가의 보존이 부처님 가르침을 항구적으로 생동하게 하는 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본디 율은 계와 달리 승가에만 해당되는 강제적 구속력이 있는 규율이다. 현실적으로 승가 없는 불교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승가 집단을 지탱하는 율을 불교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우 스님은 현재의 출가자 감소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요. 숙세에 걸쳐 수행하여 복덕을 갖춘 한 사람만 출가해도 불교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한다. 이 도저한 낙관은 인과의 도리와 율의 근원적 힘—계체(戒體)—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성우 스님은 해인사로 갔다. 율에 밝은 일타 스님이 해인사에 계신다는 것이 이유였다. 통도사를 거쳐 범어사 강원까지 한 반이었던 청엽 스님, 혜엽 스님, 철우 스님, 성도 스님도 따라나섰다. 일종의 ‘공부 울력’ 같은 의기투합이었다.
해인율원
성우 스님이 율장 공부를 위해 해인사로 간 1967년은 ‘해인총림’이 설립된 해이기도 하다. 때마침 율장을 배우겠다고 자발적으로 학인이 찾아갔으니 총림으로서 명색을 갖추는 데도 한 몫을 한 셈이다. 해인율원에서의 공부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걷는 것과 같았다. 교재도 없었다. 자운 스님의 말씀을 따라 대적광전에서 3천 배를 하고 백련암의 성철 스님으로부터 『범망경』 주석서를 빌렸다. ‘범망경’은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계본’을 줄인 이름이다. 노사나불이 설한, 대승보살이 밝혀야 할 심지(心地)와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을 설한 경이다. 쉽게 말하자면 대승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보살도의 실천 지침이다. 이 경의 이름 ‘범망(梵網)’은 ‘인드라망’을 말한다. 인드라망의 구슬은 중중무진(重重無盡)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법계의 실상을 상징한다. 화엄사상을 배경으로 사사무애한 삶의 진경, 그 그림을 현실 세계에서 그려 나가라고 독려하는 계경이 범망경이다. 그래서 『범망경』을 ‘소화엄경’이라고도 한다. 『범망경』은 대승 계경이다. 자운 스님은 왜 대승계를 먼저 배우게 했을까? 현대 한국불교 계율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자운 스님이 즉흥적으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계율의 진작에 헌신했던 자운 스님이 지녔던 시대의식의 투영이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당시는 불교정화 직후였고 불교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눈초리는 싸늘했다. 계율 정립을 통해 승가의 위의를 바로 세우고 불교계에 대한 사회적 신망을 회복하는 일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이에 부응하는 길은 자리이타의 대승정신에 투철한 율풍을 일으키는 것이었을 터. 그 바람이 율학 정진의 원을 세운 일군의 비구들에게 범망경을 공부하게 한 자운 스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자운 스님
성우 스님은 『범망경』을 공부한 다음 ‘사분율’을 배웠다. 이 때도 자운 스님의 원력이 유감없이 펼쳐졌다. “『범망경』을 공부한 다음 『사분율』을 배웠어요. 역시 책이 없었는데 마침 해인사에서 인경불사를 했어요. 해인사 장경각의 목판본으로 경전을 찍어내는 불사였는데 하루 이틀에 될 일이 아니었죠. 그때 자운 스님께 말씀 드렸죠. 그랬더니 당신도 가진 돈이 없으니까 해인사 총무, 재무를 보는 소임자들에게 돈을 빌렸는가 봐요. 그 돈으로 팔만대장경 안에 들어 있는 『사분율』을 인출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홍복이었죠. 그때 자운 스님이 아니었으면 팔만대장경판으로 찍은 『사분율』로 공부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그때는 어른 스님이니까 어련히 해 주시는 걸로 여겼는데, 세월이 지나서 보니까 당신의 계율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깊었는가 하는 것을 느끼게 돼요.” 율원장 역할을 한 일타 스님의 가르침도 따뜻했다. “일타 스님은 제가 만난 스님들 가운데 아주 머리가 비상한 분이었어요. 그것도 그렇지만 정말 자비로웠어요. 당신 몸 불편한 거나 힘 든 것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알뜰히 가르쳐 주셨어요.” 성우 스님은 해인사 어른 스님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율장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종정이었던 고암 스님과 함께 날마다 108예참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고암 스님이 손수 달여 주신 차를 마시며 졸음을 쫓았다. 당시 교무였던 보성 스님(송광사 방장 역임)도 율원생들을 각별히 챙겼다. 성우 스님이 해인율원에서 공부할 때 입은 은혜를 갚는 날이 찾아왔다. 자운 스님이 전계대화상이었던 1981년 제1회 사미·사미니계 수계산림(구족계는 제2회 단일계단부터 시행)에 3사 7증의 일원으로 참가한 이래 2015년 조계종 전계대화상(~2021) 때까지 조계종단의 수계산림 법회에서 맡은 바 소임에 정성을 바쳤다. 1990년 10월 자운 스님으로부터 전계(傳戒), 1996년에는 파계사에 ‘영산율원’을 설립하여 후학들을 길렀다. 영산율원은 조계종 단위 사찰 최초의 율원이었다. 영산율원에서 공부한 상당수의 스님이 훗날 총림의 율원장과 율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영산율원의 역할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게 한다.
영산율원 1회승가대학 졸업식
성우 스님은 BTN 회장 소임을 사는 가운데서도 수계산림 법회에서 당신을 찾으면 그곳이 어디든 만사를 물리치고 달려갔다. 인연에 따라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성우 스님에게 삶의 중심은 ‘율’이었다.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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