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한국 차(茶)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성우 스님은 통도사 강원에서 1년을 보낸 후 범어사로 갔다. 강원에 강사 스님이 자리를 비워서 불가피하게 범어사로 간 것이었는데 그곳 역시 강사 스님이 없었다. 통신이 요즘 같지 않아서 사전에 사중 형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범어사로 간 것이었다. 다행히도 때맞춰 강사 스님을 모시게 됐고 범어사에서 강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강원 학인들의 일과를 보면,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빡빡하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밤 9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예불하고 일하는 틈틈이 공부를 하는 건지 공부하는 틈틈이 일을 하는지 혼동될 정도로 예불과 공부와 일을 병행한다. 만약 이런 일들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면 인권 침해로 의심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유의지의 소산이므로 세속적 시선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한편 그것은 빨리 속기를 빼고 잡념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 방편이기도 하다. ‘강원 1달은 세간 3년에 버금간다.’는 절집 말에서는 고충보다는 자부심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나중 일이야 어찌 되든 내심 출격장부의 기상을 품지 않은 학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우 스님은 노스님들이 계시는 산중에서 행자 생활을 했고 이미 통도사 강원에서 사미반을 마친 터였으므로 범어사에서의 생활은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윗반이 되어서는 입승(立繩) 소임을 맡았다. 입승의 승 자는 ‘줄 繩(승) 자’로 목수가 치목을 할 때 나무에 매기는 먹줄 즉 ‘법도’를 뜻한다. 따라서 입승 소임은 학인들의 공동생활 규율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사중 어른 스님들의 심중도 헤아려야 하지만 무엇보다 동료 학인들로부터 신망을 받아야 하는 자리다. 입승을 맡은 덕분이었는지 스님은 방을 하나 배정받을 수 있었다. 스님은 그 방을 최대한 넓게 사용하고자 했다. 통도사에서부터 줄곧 마음에 두었던 ‘차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범어사
“범어사에서는 방을 한 칸 주더군요. 사실 큰 절에서는 사미한테 방을 안 줘요. 얼마나 좋은지 몰랐어요. 그래서 처음 한 일이 차 도구를 마련하는 것이었어요.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 골동품 가게에 간장 종지 같은 찻잔이 있더라고요. 또 어찌어찌하여 차를 구해 그때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스님은 주위 스님들에게 차를 공양했다. 반응은 ‘이거, 중 이마 씻은 물 같다.’는 것이었다. 한국 차문화의 본령이라 할 절집 스님네들의 이런 반응은, 빈사 상태에 이른 당시 차문화의 형편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하겠다. 그러던 어느 휴일 범어사를 찾은 수녀님 두 분을 만나게 되었다. 스님은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겨 ‘차 한 잔 하시겠느냐.’고 의향을 물었다. 이렇게 하여 차를 달여 드렸더니 외국인 수녀 한 분이 차를 마시다 눈물을 머금었다. 까닭인즉 ‘수녀가 되고 나서 이런 극진한 대접은 처음이다. 그것도 산중에서 스님께 이런 대접을 받고 나니 눈물이 난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수녀와 만남을 계기로 ‘차’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 준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때부터 차의 모든 것이 궁금해졌지만 배울 방법이 없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한 사람을 가리켰다. 효당 최범술 스님이었다. 그분이 대학생 불교학생회 수련회에서 차 강의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강원 생활이 아무리 빡빡하다 해도 그곳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다. 때때로 숨통을 틔워 줄 방도를 갖추고 있다. 방학이 그렇다. 봄방학(초파일 전후 10일 안팎), 여름방학(백중 무렵 1달 정도), 가을방학(김장 방학, 10일 안팎), 겨울 방학(정월 보름 무렵 1달 정도), 이렇게 철마다 방학 기간을 둔다. 이때는 학인들도 ‘집’으로 간다. 그 집이 출가 본사라는 점만 세간과 다르다. 성우 스님은 방학 기간을 차 공부에 요긴하게 썼다. 최범술 스님을 찾아 나섰다. 당시 최범술 스님은 경남 하동의 다솔사에 있었다. 다솔사에서 조금 더 가면 남해(도)이니 제법 먼 곳이었다. “어렵게 찾아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제헌동지회 모임을 하더군요. 최범술 스님이 제헌 국회의원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저분들은 일생 같이했던 사이이고 저는 오늘 처음이니 저와 얘기를 좀 나누자고 그랬죠. 그랬더니 그분이 정신이 번뜩 드는지 차 관련 자료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더군요. 캐비넷이 28개나 됐어요. 이것저것 보여 주시면서 차에 대한 얘기를 하셨는데, 골자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이었어요. 다도의 요체가 화·경·청·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일본 다도 정신이에요. 그분이 일본 유학을 하셨거든요. 그 얘기를 듣는데, 이 건 한국의 차문화 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무엇 때문에 아닌지 반박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때는 그걸 몰랐으니까요. 그래도 그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고 돌아왔어요.” 성우 스님은 효당 스님을 만난 후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응송 스님과의 만남이다. 응송(1893~1990) 스님은 십대 후반인 1908년 항일의병 가담을 계기로 해남 대흥사에서 출가하여 강원을 마친 후 서울 불교중앙학림에서 근대 불교학을 공부했다. 불교중앙학림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불교계의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만당 해체 후 조선불교청년동맹 서기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응송 스님은 오랫동안 대흥사 주지를 하면서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스님의 다법을 이은 차인(茶人)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근래에 응송 스님이 재조명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성우 스님이 응송 스님을 만났던 1966년 무렵은 지금의 평가와는 천지현격의 상황이었다. 대처승이었던 응송 스님은 불교정화 이후 대흥사에서 나와 대흥사 반야교 아래 사가에 ‘白化寺(백화사)’라는 현판을 걸고 살 때였다. 그때도 응송 스님은 대흥사로 내려온 다법―곧 초의 다법―을 이어 차를 만들고 차를 마시는 일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시절에 범어사라는 대찰의 학인이 차를 공부하겠다고 찾아왔으니, 응송 스님의 입장에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응송 스님이 저를 무척 좋아했어요. 얼마나 좋아했느냐 하면 초의 스님이 쓰시던 찻잔을 저에게 줄 정도였어요. 언젠가는 저도 이 찻잔을 누군가에게 주거나 해남 대흥사 박물관에 기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응송 스님한테서 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핵심은 ‘차는 식혀서 먹는 게 아니야. 그건 일본식이야. 차는 따시게 먹어야 돼.’라는 말씀이었어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성우 스님은 조금씩 차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갔다. 화경청적이 왜 일본의 다도 정신인지도 알게 됐다. 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화·경·청·적을 처음 주장한 이는 리큐(利休, 1522~1591)예요. 이 말 역시 무리타(村田珠光, 1422~1502)가 주장한 근경청적(謹敬淸寂)에서 ‘근(謹)’ 자를 ‘화(和)로 바꾸어 리큐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경청적’이 우리나라의 전통 차 정신인 양 잘못 인식된 때가 있었습니다.”
저서 다도
스님은 『다도』(한겨레출판사, 1989)를 비롯하여 차와 관련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다도』는 차의 역사 문화를 집대성한 이론서인데 우리 차의 맥을 이어온 사찰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의 행적과 사상에서 우리 차 문화의 실제 모습을 규명한 점이 돋보인다. 『차와 시와 그림』(다보문화사, 1989), 『차와 선』(토방, 1997), 『차향기—석성우 시집』(다도, 2001) 같은 책 외에도 스님의 글이나 저술에는 차와 관련한 이야기가 무시로 등장한다. 스님은 1988년 『다담』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런 스님의 노력에 대해 세상은 ‘한국 차문화 학술상’(1998), ‘초의 차문화상’(1999), ‘명원 차문화상’(2000)으로 상찬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짚어 두어야 할 점은 스님이 차에 공력을 기울인 근본적인 목적이다. 스님이 차에 관해 공부하고 잡지 발행과 저술을 한 궁극적 목적은 우리 차 문화의 바탕이 한국의 불교문화라는 점을 규명하는 데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제4부 〈사상편〉에서 밝히기로 한다.)
파계사 다로경권(茶爐經卷)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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