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계를 받은 성우 스님은 팔공산을 떠나 영축산으로 갔다. 통도사 강원에 입방한 것이다. 나이 지긋한 스님들은 강원 공부를 일러 ‘이력(履歷)을 본다’ 또는 ‘이력을 마친다’고 말한다. 반드시 밟아야할 과정을 일컬어 ‘이력’이라 했으니, ‘강원’보다는 행위의 본질적인 뜻이 더 생생하게 담긴 말이라 하겠다.
강원은 구족계를 받기 전 입문 단계의 스님들이 경전과 선어록을 공부하는 곳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납자로서의 삶을 길들이고 대중이 모여 사는 묘리를 익히는 것도 강원 공부의 요긴한 뜻이다.
통도사 일주문 앞 길 양쪽에는 두 개에 돌기둥이 서 있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인데, 돌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돌기둥의 문구는 ‘方袍圓頂常要淸規(방포원정상요청규), 왼쪽은 ‘異姓同居必須和睦(이성동거필수화목)’이다. 새겨 읽으면, ‘가사를 입고 삭발한 스님들은 항상 청규를 지켜야 하고, 각기 성(姓)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까닭에 반드시 화목해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1915년에 구하 스님(1872~1965)의 글귀를 박아 세운 것이라 한다.
통도사 일주문
위 글귀가 뜻하는 바는 통도사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절집에서 통한다. 그래도 통도사여서 각별하다. ‘통도사(通度寺)’란 이름의 가운데 글자 ‘度’는 ‘바라밀다’ 즉 ‘도피안(到彼岸)’을 의미한다. 재가자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피안을 향한 길의 원점이다. 그래서 통도사가 ‘불지종가(佛之宗家)’인 것이다.
성우 스님은 처음부터 통도사가 편안했다. 스님은 그 첫 느낌이 ‘방금 나갔다 들어온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순조로울 것 같은 통도사의 강원 생활은 1년을 넘지 못했다. 강사 스님의 자리가 비어서 공부를 이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통도사 강원 공부는 1년에 그쳤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 우연히 경봉 스님이 내 주신 차 한 잔 마신 인연의 지중함은 한 철 공부 소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한 잔의 차를 통해 스님은, 차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이후 시작된 스님의 차 생활은 모든 인연에 차향이 어리게 했다.
성우 스님이 존경한 석정 스님(1928~2012, 중요무형문화재 불화장)을 처음 만난 곳도 통도사였다. 두 스님은 격세를 느낄 만한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평생 고담한 연연을 이어갔다. 평생 도반이었던 철우 스님을 만난 곳도 통도사 강원이었다. 서로를 존중하며 아끼던 사이였던 명정 스님을 만난 곳도 통도사였다. 오랫동안 경봉 스님을 시봉했고, 경봉 스님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소굴 소식』이라는 귀한 책을 우리에게 안겨 주신 그 명정 스님이다. 훗날 명정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하며 틈틈이 번역한 『신심명』을 책으로 만들어 파계사에 계시는 성우 스님을 찾아왔다. 늦은 밤이었다. 우편으로 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먼 걸음을 했다는 것이었다. 두 스님의 인연은 이렇듯 은근히 깊었다.
성우 스님이 통도사에서 보낸 강원 생활은 비록 한 철이었지만 스님의 수행을 정좌시키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스님의 통도사 학인 시절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한 가지 일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아주 조심스러운 얘기다.
거듭 강조하건대 아주 조심스런 얘기다. 스님의 연비(燃臂)에 관해서다. 연비는 스님들은 물론 재가불자들의 수계의식에서도 행한다. 쉬쉬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스님 스스로 그것에 대해 공개적 발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우 스님은 왼손 검지가 없다. 손가락 전체를 연지(燃指)한 것이다. 몇몇 대중 매체 인터뷰에서 기자가 그에 관해 질문하자 “한창 젊었을 때 한 일”이라고만 하며 웃고 말 뿐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좌들도 그에 관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사실 불교학술원 인터뷰에서도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역시 스님은 싱긋 웃으며 “그냥 통과하지요.” 하고 말 뿐이었다. 그래서 새삼 그 얘기를 거론하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결례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말을 꺼낸 까닭은 첫째, 가치 판단의 차원에서 비켜나서 사실 그 자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직접 겪지 않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추체험—이것을 과연 체험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라도—해 보자는 것이다.
성우 스님이 쓴 책에, 신라 왕자로 태어나 당나라로 건너가 28년 동안 수행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친 무상(無相, 680~756) 스님에 관한 글이 있다. 그 글에 무상 스님의 연비 공양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그 글에서 당신의 연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무상 스님은) 왕족이었으므로 신라에서 수행하는 데 장애가 많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나라로 갔다.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자주의 덕순사로 갔다. 처적(處寂) 화상을 배알하고자 했으나 화상은 신병이 있어 만나 주지 않았다. 그래서 무상은 손가락에 불을 붙여 등불로 삼았다. 그때서야 처적 화상은 입실을 허락하였다.
(…) 말이 쉬워 손가락을 불에 태우는 일이지, 사실을 당하면 그것은 인력으로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신심으로 하는 것이다. 신심, 그것은 바로 진리를 얻는 길이다.
부처님도 전생 그 어느 전생에 게송 반 구절을 얻으려고 목숨을 던진 일이 있었다. (…) 『범망경』 보살심지계를 바탕으로 한 보살계에 “가죽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뽑아 먹을 삼고, 골수로 벼룻물을 삼고, 뼈를 쪼개어 붓을 삼아서 불계(佛戒)를 서사할지어다.” 하는 구절에서 어떻게 보면 섬뜩함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참 성스러운 일이다.
―『선의 메아리』(2011, 불교춘추사) 75쪽.
위 인용문에서 밑줄 친 부분 ‘사실을 당하면’이라는 표현이, 스님의 경험을 내비친 유일한 대목이다. 글의 목적도 무상 스님의 발심과 신심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성우 스님의 연비 사실을 모르는 독자라면 문맥상 일반론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성우 스님이 연비 공양을 언제 했는지는 당신이 밝히지 않는 이상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통도사 학인 때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있다. 성우 스님의 상좌인 허주 스님(파계사 주지)이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할 때 한 노스님으로부터 ‘너거(너희) 스님 때문에 강당(강원) 돈 좀 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다고 한다. 아마도 연비 공양 얘기를 돌려 말한 듯하다. 그 노스님은 경봉 스님의 사제로, 학인들이 허튼짓을 하면 목침부터 날렸다 해서 ‘목침할배’라는 별명으로 불린 경하 스님이다.
위법망구(爲法忘軀). 진리를 얻기 위해 몸을 바치는 신심의 깊이를 범상한 우리가 체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깊은 신심 없이 부처님이 통찰한 진리를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인데, 그것조차도 머리로 헤아려 알 뿐이다.
어느 정도의 신심이어야 ‘위법망구’ 할 수 있을까. 그 경계는 흔히들 말하는 ‘사즉생(死卽生)’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 적을 상대로 한 죽음의 불사, 살기 위한 죽을 각오를 하는 것과는 다른 경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망구(忘軀)는 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잊는’ 것이다. 손가락이 불타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상상으로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고통 받는 몸’은 극단적으로 ‘나’를 주장하는 ‘오온(五蘊)’의 각축장이다. 그 상태에서 나를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이 정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성우 스님은 ‘사실을 당하면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신심으로 하는 것’이라 했다.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함은, ‘나’를 싸움의 상대로 상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의 의지’를 전제로 한, ‘자신과의 싸움’ 운운할 일은 더욱 아니다. 여기에 승패라는 개념은 발붙일 자리가 없다.
성우 스님이 감수한 연비 공양의 고통에 대해 제3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고통의 속성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므로 원천적으로 공유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는 스님의 그 위법망구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확고한 믿음의 우직한 실천. 스님의 지난 모든 행보가 그러했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