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우렁찬 한 시절이 있다. 대개 젊은 시절이 그렇다. 그 시절에는 목소리뿐 아니라 신념 따위 정신적 기개도 우렁차다. 하지만 성우 스님은 기질적으로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매듭을 짓는 성미였다.
성우 스님이 행자 시절 3천 배를 한 것도 사실은 염불을 못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내린 죽비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가령 행자 가운데 누군가 ‘묵언’을 하겠다고 스스로 결정했다 치자.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스님의 경우라 해도 대중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하물며 행자가 그럴 수는 없다. 은사 스님이 ‘경책’으로 ‘묵언패’를 채웠다면 모를까. 행자 3천 배도 마찬가지다. 원주 스님의 허락 내지는 그에 준하는 동의 없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행자가 3천 배를 한다고 하여 ‘그놈, 신심 장하구나’ 하고 마냥 기특해 할 노스님은 없다. 어설픈 신심은 만심(慢心)만 키울 수 있다는 것이 불가의 오랜 경험칙이다.
1963년 7월 15일. 성우 스님이 사미계를 받은 날이다. 1963년 대구 대성사에서 정초기도 때 은사 고송 스님을 만나 파계사로 오게 된 그해 음력 정월 초하루가 1월 25일이었으니, 6개월 남짓 행자 생활을 하고 사미계를 받은 것이다. 이 6개월의 행자 기간을 길다 혹은 짧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해진 기간이 없기 때문이다. 은사 스님이 ‘이 정도면 됐다’고 판단하면 그것이 적당한 때였다.
성우 스님은 사미계 받을 때의 사정과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한다. “저의 은사 스님께서 한송 스님한테 부탁해서 저에게 수계를 하도록 했습니다. 한송 스님은 깐깐한 스님이었어요. 보통 깐깐하신 스님이 아니었어요. 계를 받고 나니까 얼마나 좋은지, 아마 머리 안 깎아 봐서 잘 모를 텐데, 사미계를 받고 장삼을 입고 보니 처음 임금이 돼서 곤룡포를 입은 느낌이 이렇지 않을까 할 정도로 큰 자유, 큰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아마 숙세의 업인 것 같아요.”
스님은 ‘계’를 받고 큰 ‘자유’를 얻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처음 곤룡포를 입은 임금에 빗댔다. 사실 ‘계’를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구속감이 따르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극도로 제한하는,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다. 생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감옥 같은 삶을 자청하는 것이다. 그런 삶의 길로 들어서면서 느낀 ‘자유’는 어떤 종류의 자유일까. 이에 대해서는 조금 미루기로 하고, 성우 스님의 사미계 수계사인 한송 스님, ‘깐깐했다’는 그 스님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송 스님[1902(?)~1964(?)]의 행적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국불교 근현대사에서 쉽게 잊혀서는 안 될 스님이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 불교의 수행 풍토 진작에 큰 역할을 했다. 한송 스님에 대해서는 생존 시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었던 스님들의 술회를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 온다. 『보문선사―신화 속으로 사라진 선승』(보문문도회·김광식 엮음, 민족사, 2012)이라는 책을 보면 보문 스님(1906~1956)과 관련된 한송 스님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팔공산 파계사 현판
한송 스님은 만년을 파계사에서 보내며 주지와 조실을 지내기도 했는데 파계사를 수행 도량으로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스님은 불교정화운동 시기 경상북도 종정원 종정원장을 지냈다. 당시 경북 종정원의 총무가 전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이었다. 한송 스님은 경북 종무원장으로서 대구·경북 지역 사찰 대중을 비구화 하는 과정에서 보현사(동화사 대구 포교당)를 보문 스님에게 맡겼다. 그때 보문 스님은 팔공산 삼성암 토굴에서 정진 중이었는데 추종을 불허하는 두타행으로 지역 불자들에게는 생불로 추앙받는 스님이었다. 이런 스님을 한송 스님이 간청하다시피 하여 주지를 맡긴 것이다. 보현사가 지역 포교의 핵심 사찰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현사의 대처승들은 보문 스님이 주지로 온다는 얘기를 듣고는 흔쾌히 자리를 비워 주었다고 한다.
보문 스님은 성우 스님의 은사이신 고송 스님과도 인연이 깊다. 두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까지도 보문 스님은 구족계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송 스님이 보문 스님을 오대산으로 데려가 한암 스님의 상좌가 되게 했다.
성철 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 장좌불와를 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그 배후에 한송 스님이 있다는 건 아는 사람이나 안다. 한송 스님의 권유로 성철 스님이 성전암으로 오게 된 것이다.
성전암
한송 스님은 보문 스님이나 성철 스님보다 세수가 꽤 높았다. 그런데도 두 스님을 모시다시피 보현사와 성전암으로 불러들였다. 선지식을 알아보는 안목과 하심의 성품이 오늘날 한국불교의 한 지평을 이룬 것이다.
한송 스님과 고송 스님의 행적 가운데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대목은, 1957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이 전계대화상으로 계를 설한 중앙선원 금강계단 금강계첩에 한송 스님과 고송 스님이 ‘존증아사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스님이 율사는 아니었지만 수계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존증아사리란 수계의식을 증명해 주는 아사리 즉 사표가 되는 스님을 말한다.
한송 스님, 보문 스님, 고송 스님, 성철 스님은 모두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한 인연이 있다. 이런 스님들의 정진력이 있었기에 일제 35년 동안 왜색 불교의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정법은 이어졌고 상당한 진통이 따르긴 했지만 정화불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성우 스님은 정화불사의 후유증이 남아 있을 때 출가했지만 노스님들의 수행 가풍이 성성하던 시절에 행자 생활을 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수행자로서 진정한 복이라 하겠다.
성우 스님은 수계라는 그 무거운 약속에서 자유를 느꼈다고 했다. 행자 생활을 마쳤다는 후련함도 얼마간은 담긴 표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승가의 법도를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출가 사문이 된 것을 ‘숙세의 업’이라고 생각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흔한 말로 ‘스님 될 팔자’였다고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어떤 운명 앞에 흔쾌히 무릎을 꿇는 것. 어떤 자유는 그렇게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님은 훗날 당신이 율사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걸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사실상 행자 때 이미 그 길로 들어섰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