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수행자는 반드시 ‘행자’ 시절을 통과해야 한다. 그 통과는 의례적이지 않다. 돌잔치의 돌잡이 같은 것과 다르다. 행자는 스스로 관문이 되어 스스로를 통과해야 하는 존재다.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니므로, 중도에 돌아선다 해도 퇴속은 아니다.
행자살이는 무한을 향한 수행의 도정에 오를 힘을 기르는 일이다. 행자에게 ‘출가 본사’는 그 힘의 발원지이자 길을 잃었을 때 다시 돌아올 원점 같은 곳이다. 성우 스님의 출가 본사는 팔공산 파계사다. 표충사로 입산 후 두어 달 동안 득도식도 하지 못한 채 스스로 알아서 절집 생활을 하다가 대구 도심의 대성사로 흘러들었다가, 그곳에서 고송 스님을 만나 파계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파계사 경내
“파계사에 와 보니까 그렇게 큰 절은 아니어도 여법하게 대중생활을 하더군요. 노스님도 몇 분 계셨고, 나 말고도 행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모든 대중이 발우 공양을 하는데 행자들도 같이했어요. 그때 발우를 처음 펴 봤지요.” ‘발우를 처음 펴봤다’고 말하는 스님의 얼굴 깊은 곳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60년 전, 비록 사미계도 받지 못한 행자였지만 당당히 출가 사문이 되었음을 처음으로 실감한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 듯했다.
출가 사문의 섭식은 걸식을 원칙으로 한다. 오늘날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부처님께서 1,250명의 비구와 함께 사위성으로 들어가 한 집씩 차례로 밥을 빈 다음 자리로 돌아와 공양을 하고 좌정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먹는 일이, 그것도 얻어먹는 일이 장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광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부처님처럼 걸식하지는 않았다. 대신 우리나라에서는 ‘탁발’이 행해지다가 산업사회로 들어선 1970년대를 전후하여 사라졌다. 조계종은 1964년 종법으로 금지했다. 스님들의 위의를 지키고 타종교인을 배려하기 위한 조처였다.
발우 공양엔 걸식과 탁발의 정신이 온축되어 있다. 따라서 발우 공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식(儀式)이자 수행이다. 스님이 파계사에 갔을 때, 행자들도 대중들과 함께 발우 공양을 했다는 건 현재와 견주어도 진보적(?)이다. 요즘도 큰 절에서는 발우 공양을 하지만 행자들에게는 선망의 풍경일 뿐임을 감안하면, 당시 파계사의 가풍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법랍이나 소임의 위계에 따른 차별 없이, 행자라 할지라도 불문에 귀의한 사람에게는 수행자 대접을 해 준 것이다. 그래서 행자가 분수를 넘거나 본분을 망각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면 억측이다. 오히려 반대였다. 성우 스님이 행자 시절 3천 배를 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부처님께 하루에 3천 배씩 절을 했어요.” 여기서 잠시 호흡을 고를 필요가 있다. ‘3천 배’라는 단어의 압도적 어감 때문이 아니다. 스님은 3천 배를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다. 지난 일을 말하는 가운데 무심히 따라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따로 불러내 앞세운 이유는, ‘중 시집살이’라 불릴 만큼 혹독한 행자 시절에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우선 행자에게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신심이 장하다 해서 시간을 늘릴 수는 없다.
“3천 배를 하려면 8시간 정도 걸려요. 새벽 예불 하고 2시간, 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 저녁에 2시간, 이렇게 해서 3천 배를 했었죠. 누가 시켜서 한 건 아니에요. 제 스스로 하고 싶어서 했어요. 절을 하고 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팔을 옆으로 펴면 날아갈 것 같은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어요. 절 해 본 사람은 그 행복감을 알지요.”
행자의 하루는 바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공양간 일, 도량 청소, 채전 농사 등 그때그때 주어지는 소임과 울력은 기본이고 절에서의 일상 예법, 목탁 치는 법, 조석 예불하는 법, 기도하는 법, 축원하는 법을 익혀 나간다. 거기에 더하여 예불문, 반야심경, 천수경도 외워야 한다.
성우 스님이 행자 신분으로 3천 배를 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신심이 장해서만은 아니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열등감’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 같다.
“제가 음치예요. 그래서 남들 듣는 데서는 염불이나 축원을 안 해 봤어요. 이 탁한 목소리로 어떻게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이며 누구를 축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지요. 행자 때도 그랬어요. 행자에게는 하늘 같은 원주 스님이 ‘염불은 꼭 해야 한다’고 하니까, 면전에서는 ‘예~’ 하고 돌아서서는 안 할 수밖에 없었어요. 자신이 없으니까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 거예요. 누가 있는 데서는 통성 염불을 할 수가 없었어요. 염불은 스님네들에게 기본이죠. 그런데 그 기본을 못 했으니까 사실 한심한 겁니다. 그래서 3천 배를 하게 됐어요. 부처님 앞에 3천 배 하는 것을 염불로 삼자,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젊을 때였으니까 힘도 좋았고요.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정한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따랐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저녁 공양을 대중들과 못해요. 시간을 낼 수 없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준 원주 스님이 고마워요. 덕분에 행자 생활을 짬지게 할 수 있었어요.”
요즘 행자 생활은 (조계종의 경우) 행자교육원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집체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과거에는 출가 본사에서 행해졌다. 큰 틀에서는 대동소이했지만 기간이나 내용은 사찰의 형편이나 은사의 성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원주 스님이 행자를 통솔하는데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지는 않았고, 은사 스님이 일일이 행동거지를 일러 주는 것도 아니었다. 도제식이면서도 집단적이었고, 타율적인 것 같지만 자율적이었다. 언제든 절을 떠날 수 있었으니 결국은 행자 본인이 진퇴 결정의 주체였다. 행자 생활의 묘리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행자 때 지은 복으로 평생 중노릇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행자 시절 성우 스님은 ‘복’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절하지 않았다. ‘하심’을 위해 절하지도 않았다. 내세울 게 없는 데 무슨 하심을 할 것인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것 같아서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3천 배가 오늘의 성우 스님이 있어야 할 곳에 서게 하는 정초가 되었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파계사 앞 개울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