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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태교 창안

“어느 구름 속에 비가 들었는지, 어느 바람이 구름을 몰고 가려는지 아무도 모른다.” 성우 스님이 ‘인연’을 말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한 인연의 묘체는 불가사의하게 존재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스님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詩)와 차(茶)가 그렇게 왔다. ‘태교(胎敎)’ 또한 그랬다. 성우 스님은 중앙승가학원을 조계종단에 귀속시킨 후 자유로운(?) 몸이 됐다. 승랍 17년이 된 해였다. 삶의 외연을 넓히겠다거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1980년에 ‘불교문학’ 특강으로 대만에 갈 일이 생겼다. 그곳에 머무르던 어느 날 도서전람회에 들르게 됐다. “책을 둘러보는데 ‘태교와 위생학’이라는 책이 보이더라고. 그 순간 감전이 된 것처럼 찌릿한 느낌이 와요. 아, 지금부터 내가 연구해야 할 것은 태교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웃었지요. ‘비구승이 태교 알아서 뭘 할라고.’ 그러면서 책을 샀어요. 대만의 의대 교수가 쓴 책이었는데, 숙소로 돌아와서 읽어 보니까 ‘태교는 비과학적이다’는 내용이었어요.” 뜻밖이었지만 허탈감보다는 태교에 대한 더 큰 관심이 솟구쳤다. 앎을 향한 순수한 욕구의 유쾌한 반발력. 이것이 호기심의 힘이다.
대만 홍법원
성우 스님은 마침 대만 홍법원이 비게 되어서 1981-1983년까지 원장 소임을 맡았다. 당시 대만에서는 태교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도 태교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방송되곤 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어서 방송국으로 찾아가서 대본을 구해 본 적도 있다. 그래도 불교와 태교를 접맥시킬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조계종 단일계단(1981년)이 처음으로 만들어지면서 그 일에 관여하게 됐다. 그렇게 한국과 대만을 오가던 중 홍콩 홍법원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왔다. 스님은 ‘교민 포교’ 같은 명분보다는 “참선하면서 글도 쓰고 차도 마실 수 있겠다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주지를 승낙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밝힌다. 스님은 1984-1994년까지 10년 간 홍콩 홍법원 원장 역할을 했다. 이 기간에도 한국을 오가며 글을 쓰고 책을 내는 한편 잡지 발행도 했다. 소리 없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종단의 주요 소임이나 큰 절 주지를 맡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홍콩 홍법원에서도 태교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만에서부터 아무리 궁리해도 불교와 태교를 연결시킬 답이 보이지 않아요. 홍콩에 와서 어느 날 아침 예불을 모시고 참선을 하는데 화두가 들리지 않아요. 한참 앉아 있다 보니 화두를 들고 있는 게 아니라 태교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 그런데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불교의 업보사상. 아, 이거다 싶었죠. 업보사상으로 풀면 되겠더라고요. 업보중생이라고 하잖아요. 사람은 다 자기 업으로 태어난다는 거죠. 그건 누구도 막지 못해요. 자기 업으로 살다가 업 다하면 이 세상을 떠나는 거예요.” 이때부터 스님은 업보사상을 핵심으로 불교 태교 연구에 몰두한다. 스님은 불교학 연구에서 우리보다 앞선 일본으로 갔다. 응용불교학도 발달한 만큼 이미 불교 태교가 정립돼 있다면 아류가 될 터이므로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상 밖으로 일본에서도 불교사상을 바탕에 둔 태교 이론은 정립돼 있지 않았다. 성우 스님으로서는 이 일을 해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진 셈이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사람이에요. 사람보다 귀한 건 없어요. 그래서 사람은 사람다워야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IQ뿐 아니라 EQ도 높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혼이 맑고, 마음자리가 따뜻하고 빛으로 가득하지요. 이런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 태교입니다. 태교는 인류를, 세상을 밝게 만드는 일입니다.” 스님은 불교태교의 이론적 근거와 실천 방법론을 부처님의 전생과 경전, 대승불교의 수행법에서 찾아 『태교』(1986, 백양출판사)라는 책으로 묶었다. 스님은 ‘부처님의 전생’을 불교 태교의 사상적 바탕으로 삼는다. 부처님은 5백 생을 거듭하면서 오로지 보살의 마음으로 수행하여 인류의 등불이 되었다. 그 500생 동안의 보살심에 착안하여, ‘좋은 사람이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것’을 ‘원력소생(願力所生)’이라고 개념화했다. 스님이 제시하는 불교 태교의 핵심이다. 원력소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태아의 원력소생인데, 부처님의 탄생이 바로 자기 원에 의한 원력소생이다. 다른 하나는 부모가 원을 세워 훌륭한 사람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자장 스님의 경우다. 자장 스님의 아버지 김무림은 진골 출신으로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삼보에 귀의하고 천수천안관세음보살에게 기도했다.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홀연히 (자장 스님)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더니 태기가 있었다. 태어난 날이 부처님과 같았으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삼국유사』 「의해편」) 스님은 『태교』를 출판한 이후에도 『하늘 맑은 날』(1995, 토방)이라는 태교 시집과 『태교 에세이』(1996, 토방), 『태교: 전통태교 의미의 재조명』(1996, 토방), 『태양처럼 솟아나소서:임신부가 부처님께 올리는 발원문』(1997, 토방), 『사랑,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모자라는 아기에게』(2003, 고요아침) 같은 다수의 태교 관련 책을 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중법문, 대중매체 강의, 청소년수련회 강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 태교를 널리 전파했다. 스님은 1994년 홍콩 홍법원 원장 소임을 놓고 개혁종단 출범과 함께 종회의원(11대, 12대)에 이름을 올렸다. 1995-2008년까지 파계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태교 강의는 열정적으로 펼쳤다.
저서(태교에세이)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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