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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가락지』로 맺어진 장욱진 화백과의 인연

1979년 여름 어느 날, 파주 보광사에서 한 스님이 목판에 성우 스님의 시를 새기고 있었다. 선방 수좌이자 선화(禪畫)를 그리는 정현(1941-2023) 스님이었다. 키가 껑충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와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자기 그림도 끼워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남겼다. 장욱진(1918-1990) 화백이었다. 30대 중반 젊은 성우 스님과 60대 초반 장욱진 화백의 만남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장욱진 화백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적어도 교만은 겸손보다는 덜 위험하며, 죄를 만들 수 있는 소지가 없기 때문에, 소탈은 쓸데없는 예의나 격식이 없어서 좋은 것이다.”(『강가의 아뜰리에』 「새벽의 세계」에서) 정현 스님은 파계사에 있던 성우 스님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를 받은 스님은 내심 놀랐다. 마침 장욱진 화백의 『강가의 아뜰리에』를 읽고 나서 깊이 공감했고, 주위 화가들로부터 ‘최고의 화가’, ‘도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터였다. 스님으로서는 장욱진 화백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장욱진 화백 1973년
장욱진 화백은 선사 같은 삶을 살았다. 스스로 말한 대로 심플한 사람이었다. 서울대 교수(1954-1960) 자리를 내려놓은 것도, ‘그림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이유에서였다. 장 화백은 절집과 인연이 깊었다. 16살 때 수덕사 견성암에서 6개월 산 적이 있다. 7살 때 부친을 여의고 고모 손에서 자랐는데, 고모가 독실한 불자였다. 고모는 장 화백이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성홍열을 앓고 난 후 요양 겸 수덕사로 보냈는데, 그림으로부터 관심을 돌려놓으려는 의도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공 스님으로부터, ‘참선 공부나 그림 공부나 같은 길’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그림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장 화백은 평생 만공 스님을 존경했다 한다. 장욱진 화백은 1977년 통도사에서 우연히 경봉 스님을 만났다. 그 만남의 한 장면을 자신의 수필에 남겼다. “어떤 암자 앞을 지나가는데 노스님 한 분이 ‘뭐하는 사람이여?’하고 물으셨다. ‘까치 그리는 사람입니다.’ ‘입산(入山)을 했더라면 일찍 도(道)꾼이 됐을 것인데….’ ‘그림 그리는 것도 같은 길입니다.’ 그분이 유명한 경봉 스님이었다.”(『강가의 아뜰리에』 「나는 행복하다」에서.) 장 화백은 경봉 스님으로부터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장 화백은 스스로를 ‘화가’라 칭하지 않고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 했다. 경봉 스님은 거기서 장 화백의 선기(禪機)를 봤을 것이다. 1980년 성우 스님의 시 31편, 장욱진 화백의 그림 14점 외에 산수화를 정현 스님이 목판에 새겨 30부 한정판으로 인쇄한 시화첩 『금가락지』가 세상에 나왔다. 장욱진 화백은 성우 스님의 시를 읽고 어떤 점에 끌려 자신도 끼워 달라고 했을까? 표제작 「금가락지」를 찬찬히 읽어 보면 그 단서가 보인다. 지난 밤 내 꿈자리에 와서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금가락지 끼워 놓고 부끄러워 고개 못 드는 너는 누구인가 —「금가락지」 전문. 알 듯 말 듯, 알쏭달쏭한 시다. 얼핏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시라는 것은 본시 그렇다. 선시라면 더욱. 하지만 이 시는 독자와의 소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난해시가 아니다. 이 시를 이해하려면 핵심어이자 제목이기도 한 ‘금가락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익히 아는 금가락지의 이미지에 갇히면 미궁에 빠진다. 금가락지는 ‘일원상(一圓相)’ 즉 ‘깨달음’의 메타포다. 이것을 실마리 삼아 다시 읽어 보자. 지난밤 꿈에 (누군가 와서)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금가락지를 끼워 놓았다. 여기서 새끼손가락의 의미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깨달음의 서원’이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든다. 독자는 잠시 연애시를 읽는 듯한 혼란에 빠지는데, 시인은 그를 향해 ‘너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 4행의 비약이 독자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시인 자신이다. 다르게 읽을 여지가 없다. 문제는 4행의 ‘너’를 누구로 볼 것인가 인데, 역시 시인 자신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게 읽으면 이 시는 새로운 국면으로 다가온다. 꿈에도 깨달음을 얻기를 자기 자신과 약속하는 시인이 거기 있다. 그런데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한다.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는다. 도대체 ‘넌 누구냐?’고. 결국 이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금가락지」는 ‘나’를 찾는, 찾아야만 하는, 하지만 아직 찾지 못한 선(禪) 수행자의 자기 고백이자 자기 경책의 시로 읽을 수 있다. 그런 한편 독자 입장에서도 ‘너’를 ‘나’로 읽을 수 있다.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의 심상을 담은 뻔한 시가 될 뻔했는데, ‘깨달음’을 그것과는 10만 8천 리나 먼 세속적 욕망의 상징인 ‘금가락지’로 ‘생소화’ 함으로써 시적 성공을 거둔 것이다. 장욱진 화백은 「금가락지」에서 자기 자신을 봤을 것이다. 장 화백은 평생 치열하게 ‘나’를 찾은 사람이었다. 또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1979년 ‘화집발간 기념전시회’에 유화 25점 외에 13점의 ‘판화’와 18점의 ‘먹그림’을 출품했다. 판화와 먹의 질박하고도 단순한 미감에 젖어 있을 무렵이어서 나무에 새겨지는 성우 스님의 시가 더 깊이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얘기다. 1980년 초 성우 스님은 정현 스님과 함께 장욱진 화백의 집을 다시 찾았다. 원화를 돌려 드리면서 30부 제작한 시화첩 중 10부를 증정했다. 장 화백은 스님에게 가족을 위해 ‘금강경’을 한 번만 읽어 달라 했다. 스님은 금강경을 읽어 드렸다. 성우 스님과 장욱진 화백은 반드시 만나야 했을 인연이었다. 그 만남의 외양은 우연이었다. 시화첩 『금가락지』가 세상에 나온 지 40년이 된 해인 2020년, 장 화백의 기일에 가족들이 BTN 법당 ‘무상사’에 제사를 드리러 왔다. 성우 스님은 우연히 가족들을 만나 『금가락지』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금가락지』 1부를 가족들에게 기증했고, 2021년 장욱진 30주기 기념전에 전시되었다. 장욱진 화백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성우 스님 꿈을 꾸었다 한다. ‘금란가사를 입은 모습을 꿈에서 보았다’면서 부인에게 그 얘기를 스님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해에 성우 스님은 자운 스님으로부터 전계를 받았다. 성우 스님과 장욱진 화백은 서로에게 ‘금가락지’를 끼워주었다.
금가락지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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