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스님은 많은 책을 냈다. 장르도 다양하다. 스님의 문학적 본령인 시집뿐 아니라 시화집, 산문집, 선화(禪話), 오도송·열반송(편저), 차(茶) 이론서, 차시(茶詩), 번역서, 태교시, 태교 에세이, 영가천도법문 등 많은 책을 저술했다. 『현대불교』라는 포교 지와 『다담』이라는 차 전문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단행본만 합해도 60종에 가깝다. 평생 책만 쓴다고 해도 쉽게 도달하기 어려운 양이다.
스님은 어떻게 그 많은 책을 내게 되었고, 낼 수 있었을까? 오로지 책 쓰는 일에만 매달린 건 아닐까, 하고 오해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스님에게 책 쓰는 일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선가(禪家)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물 긷고 땔감 나르는 일’과 같았다. 저절로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 긷고 땔감 나르는 일이라 해서 어디 절로 되는가. 가장 어려운 일이 그것이기도 하다. 사람 일이 다 그렇듯, 책 내는 일 또한 쉽게 될 때도 있었고 모질게 어려운 과정이 따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수행자로 사는 일이었다. 배우고자 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그래서 즐거웠고, 뭔가를 얻었고, 그것을 나눈 것이 책이었다. ‘공부와 회향’이었다.
공부와 회향. 스님이 세상을 만나는 방식이자 수행자로서 일상을 오로지하는 일이었다. 차(茶)를 예로 들어보자. 스님은 출가와 거의 동시에 차와 인연을 맺었다. 경봉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였다. 이후 스님은 차 생활을 즐기게 됐고, 호기심이 솟아났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니 공부가 되었다. 그런데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부터 한국 사회에 민예 운동과 함께 차에 대한 관심이 일었고, 88올림픽 이후는 붐을 이루었다. 여러 차인회가 생겨나고 ‘다도’를 거론하며 저마다 자기가 최고이고 제 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미 우리 차의 뿌리에 대해 깊이 공부한 스님으로서는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는 ‘일본식’ 다도였기 때문이다. 반일에서 극일을 외치는 사회 분위기와도 모순이었다. 그래서 낸 책이 『다도(茶道)』, 『차와 시와 그림』, 『차와 선』, 『차 향기』 같은 책이다. 특히 『다도(茶道)』는 한국 차 문화의 뿌리가 불교 의례에 있음을 규명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큰 책이다. 출판도 되기 전에 700여 권이 예약 주문될 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이 책 이후로 많은 차 이론서가 나오고 완성도도 높아졌지만 이 책의 입론과 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이 책의 영향력이 컸다. 스님 입장에서 『다도(茶道)』라는 제목이 마뜩치 않았지만, 이미 굳어진 말이어서 그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다도(茶道)』보다 앞서 나온 『반야사상』, 『열반사상』도 출판이 주목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깨달은 경지를 알고 싶어서 선지식을 찾았다. 참학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으고 보니, 일타 스님 같은 노스님들이 보시고 혼자만 보지 말고 요긴하게 필요할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하라고 권유해서 책을 내게 되었다.
성우 스님에게 책과 일상이 어떻게 밀착돼 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 『연꽃』일 것이다. 이 책은 동시집이다. 스님이 어린 상좌에게 읽히려고 쓴 동시를 묶은 것이다.
1975년 성우 스님은 15살 어린 상좌를 통도사 강원으로 보냈다. 당시 통도사 강원 강주는 종범 스님이었다. 훗날 중앙승가대 학장을 역임하기도 한 종범 스님은 20대 중반에 통도사 강원 강주를 할 정도로 우뚝한 학승이었는데, 성우 스님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성우 스님은 친한 스님에게 상좌를 맡기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문도 제대로 모르는데 공부는 따라갈 수 있을지, 집 떠난 외로움에 마음고생을 하지는 않을지, 나이 많은 도반들과 제대로 지낼 수 있을지, 모든 게 걱정이었다. 스님은 이런 마음을 동시(童詩)에 담았다. 집에 대한 그리움을 부처님을 향한 마음으로 돌이켜 착실히 공부하기를 바라는 기도이자 격려였다. 언제나 잊지 않고 너를 생각한다는 다독임이었다. 이런 동시를 담은 편지를 한 달에 두세 통, 어떤 땐 사나흘에 한 통씩 보냈다.
1년이 지나 강원 방학 기간에 상좌가 스님을 뵈러 왔다. 스님은 상좌에게 붓과 종이를 내밀며 ‘연꽃’을 쓰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동시집 『연꽃』의 제자가 돼 있었다. 표지화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영주라는 아이가 그린 연꽃 그림, 책 뒤에는 최고의 불화가 석정 스님(국가무형문화재 불화장)이 그린 선화(禪畵)를 실었다. 소박하지만 온 정성을 담은 책이었다. 그 상좌가 현재 파계사 주지 허주 스님이다.
이 책에 대해 스님은 “본격적인 문학 작품은 아니었다. 불교사상을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봤다. 기량의 모자람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이 책의 또 다른 의미는, 동시(童詩)에 어린이의 그림, 사미승의 글씨, 대가의 선화를 어우러지게 한 문화 기획자로서 스님의 선구적 안목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성우 스님은 다수의 시집을 냈다. 그 중 상당수는 선시(禪詩)다. 스님의 선시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작시의 큰 원칙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스님은 문학 행위로서 선시를 지양한다. 선시 짓는 행위를 참선의 한 형태 또는 선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명확히 선을 긋는다. “선시를 쓴다고 해서 시작을 수행의 차원으로 볼 수는 없어요. 그건 망상이에요. 진정한 정진이 아닙니다. 저에게 선시라고 하는 것은 화두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것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은 것일 뿐입니다. 화두 한다고 앉아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글이 나와요. 그걸 적어보면 시도 되어 있고 시조도 되어 있더라고요.” 스님은 화두 하기 즉 실참 수행과 시작(詩作)을 등가의 행위로 보지 않는다. 부언하자면, 스님은 화두를 한 결과로서 선시를 얻었지만, 수행으로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성우 스님은 책을 내는 것에만 목적을 두고 글을 쓰지 않았다. 무언가—그것이 공부든 참선이든 포교든—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을 책으로 묶었을 뿐이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그렇게 많은 저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결과에 집착하게 되고, 독자들의 반응에 전전긍긍해야 했을 것이다. 스님에게 그것은 전도망상이다. 글을 위해 절집의 삶을 수단시하지 않았다.
저서(다도)
저서(차와 선)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