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해인사 선방에서 시작된 ‘깨달음의 세계’ 탐색

성우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출가했으므로, 성인이 된 후의 세상은 절집이 전부였다. 문학이라는 통로로 몇몇 문인들과 서신도 나누고 더러 만나기도 했지만 제한적이었다. 1971년 신춘문예 당선 후에는 조금 양상이 달라졌다. 여기저기서 찾는 일이 생기고 절 안팎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어느 정도는 신춘문예의 후광 효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1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자 문득 ‘아까운 젊은 시절을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마음이 선방을 가리켰다. 1972년 하안거 때 해인사 선방으로 갔다. 해인사는 율원에서 두 해를 보냈으니 내 집처럼 익숙한 절이었다. 80명 정도로 많은 대중들이 방부를 들였다. 젊은 스님들도 많았다. “임오생 동갑들이 열 몇 명이 모였어요. 제가 임오생 말 띠거든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말 열세 마리가 한 차례 꿀렁하면 해인사가 무너지겠다.’ 그랬어요. 그럴 정도로 젊은 스님들이 많이 모였어요.” 스님은 의기 왕성한 젊은 스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좋았지만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경계했다. “방선 죽비를 내리면 혼자 장경각으로 갔어요. 혼자서 장경각을 돌았어요. 화두하면서. 그러다가 입선 시간이 되면 선방으로 오고. 그때 선방 생활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좌복에 앉아 있으면 차에 젖어 있는지, 화두에 젖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정말 환희로웠어요. ‘선방에 오지 않았다면 금생에 헛출가 했을 거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스님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율 공부를 먼저 했으므로 화두 잡는 공부가 자연스럽게 몸에 붙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입선 시간이었다. “하루는 어쩌다 보니 어간(御間)에 앉게 되었어요. 앞에 발을 드리워 놓고 문을 활짝 열고 앉아 있으니 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요. 쳐다볼 것도, 내려다볼 것도 없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선방 생활을 하다 보니 드는 생각이,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인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은 사람의 마음의 차원은 어떨까?’ 이런 궁금증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스님네들이 일생 수행하면 딱 두 가지를 얻겠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치는 거예요. 오도송과 열반송. 깨달음의 경지가 흘러나온 것이 오도송이고, 이 세상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남기는 한 말씀이 열반송이잖아요. ‘이 두 가지를 알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경지를 알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이런 의문이 처음은 아니다. 다른 상황이긴 했지만 비슷한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성우 스님이 해인율원에서 공부할 때였다. 해인총림이 설립된 후 첫 동안거 기간이었는데 이때 성철 스님이 백일법문을 시작했다. 상당법문과 별도로 불교 교설 전반에 관한 강설이었다. 성우 스님도 그 법문을 들었다. 어느 날 법문이 끝난 다음 성철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법문 좀 쉽게 하이소. 제가 청법대중으로서는 아마 일급 대중에 들 겁니다. 이력(履歷)을 마쳤고 율장도 보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학교도 다닐 만큼 다녔습니다. 이런 제가 들어서 모를 정도면 이 법문은 어떤 법문입니까?” 이렇게 여쭈자 성철 스님으로부터 “설령 모르더라도 인(因)은 심는다고 생각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성우 스님은 성철 스님의 말에 흔쾌히 승복할 수 없으면서도, ‘어떻게 방장 스님의 법문을 알아들을 수 없을까’, 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물러났다. 이 얘기를 하면서 성우 스님은 “아마도 성철 스님한테 그렇게 말씀 드린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시각에 따라서는 당돌하게 보일 수도 있고, 솔직하게 보일 수도 있겠는데 사실은 후자 쪽이다. 성철 스님과 성우 스님은 이미 상당한 친밀감이 형성된 관계였다. 성우 스님이 율 공부를 할 때 극락전을 율원으로 썼는데 매일 그곳에서 아침, 저녁 예불 때 108 대참회를 했다. 그것도 고암 종정 스님과 함께. “108 대참회를 할 때는 향이 필요하잖아요. 그 시절에는 절에서도 향이 귀했어요. 그런데 성철 스님한테는 향이 있었어요. 향이 떨어지면 성철 스님한테 가서 ‘스님, 저희들 향 떨어졌습니다. 향 좀 주이소.’ 하면, 스님께서 벽장을 열어서 향을 챙겨 주시고는 했어요. 평소에도 이런 교감이 있었지요. 그리고 성철 스님이 율장 보는 학인들을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해인사 극락전(율원)
도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솔직함’은 미덕의 차원을 넘어서는 덕목이다. 세간의 학문 세계와 달리,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속고 남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식이 중요한 것이다. 성우 스님은 결제를 마치고 역대 조사들의 ‘오도송’과 ‘열반송’을 찾아 나섰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스님들은 거의 다 만나봤어요. 성철 스님은 물론 향곡 스님, 구산 스님, 송담 스님…, 대처승, 심지어 백봉 김기추라는 거사까지 만났어요.” 스님은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방의 선지식을 만나고 자료를 뒤졌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파계사에서 정리하고 있는데 일타 스님이 왔다. 다른 데 법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성우 스님에게 일타 스님은 법맥으로 직계는 아니지만 사제 관계였다. “일타 스님 슬하에서 2년 동안 율장을 봤기 때문에 그분은 저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한 번 모아봤습니다’ 하고 보여드렸어요. 그랬더니 그걸 다 손수 베껴 쓰시더군요. 약속도 미루시고 다음날 늦게까지 그걸 다 옮기시는 거예요. 그러시면서 남들도 볼 수 있게 책으로 만들라고 하시기에 ‘그냥 제 양식으로 삼으려고 해 봤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죠.” 복사기가 없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그걸 다 옮겨 적었다는 것은 그 일의 가치를 인정하는 의미였다. 일타 스님이 다녀가고 얼마 후 운허 스님이 파계사에 왔다. 운허 스님은 당대 최고의 강백으로 교학의 큰 어른이었다. “운허 스님이 당신의 은사께서 팔공산에 계셨다 하기에 그 노스님의 임종게를 보여 드렸어요. 그랬더니 깜짝 놀라요. 그동안 노스님의 임종게를 모르고 있었대요. 그러시면서 제 손을 꼭 잡으시고는 ‘이 늙은 사람이 팔공산에 오고 싶었던 게 노스님 임종게를 보기 위해서였구나’ 하면서 감격하시더군요.” 성우 스님은 자신이 한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느끼면서, 일타 스님의 말씀대로 책으로 내기로 결정했다. 책을 낸다는 것은 요즘도 쉬운 일이 아니다. 70년대에 하물며 특수한 분야의 책을 개인이 낸다는 것은 엄두 내기조차 어려웠다. 비용도 막대했다. 원고 작업보다 출판이 훨씬 어려웠다. 팔공산에서 서울을 스무 번도 넘게 오르내리자니, 남 좋으라 하는 일인데도 남들 보기에 민망했다. 천신만고 끝에 고마운 인연도 만나고 해서 오도송은 『반야사상』, 열반송은 『열반사상』이라는 책으로 1977년에 발행했다.(2020년에 증보판 발행) 『반야사상』과 『열반사상』의 가장 큰 의미는, 성우 스님의 개인적 성취와 보람은 차치하고, 한국 불교의 큰 공백 하나를 메웠다는 점이다.
반야사상
열반사상
· 집필자 : 윤제학

관련자료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