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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사의 길’로 들어서다

성우 스님에게 ‘통도사’는 특별한 곳이었다. 출가자로서 첫 도약이라 할 강원 공부를 시작한 곳이었다. 평생 서로를 비춰 줄 도반도 만났다. 경봉 스님과의 만남으로 ‘차(茶)’의 세계에 눈을 뜬 곳도 통도사였다. 그러나 스님은 통도사에서 강원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 강원 문을 닫아야 할 상황을 맞았기 때문이었다. 강원이 중도에 파하는 것을 스님네들의 말로는 ‘방이 깨졌다’고 하는데, 과거에는 더러 있던 일이었다. 당시 통도사 강원의 경우, 강사 부족이 문제였다. 학인 수는 30여 명 정도였는데, 강사를 모시려 애썼지만 여의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인연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범어사였다. 같은 반이었던 학인 몇 명도 스님과 함께했다.
범어사 강원
강원 공부를 이어가기 위해서 범어사로 갔지만 그곳 역시 강사가 없었다.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고 학인 입장에서 사전에 정보를 얻을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간 곳이 범어사였는데, 가 보니 그곳 또한 강원에 강사가 없는 막막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범어사에서는 곧 강사진이 갖추어져 강원이 제대로 굴러갔다. 무난히 강원 공부를 마쳤다. 1967년 7월이었다. 강원을 졸업하고 나자 어딘가 크게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한 구석이 느껴졌다. “불전은 삼장 즉 ‘경·율·논’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강원에서 ‘경과 논’은 배웠는데 ‘율’은 빠져 있는 거예요. 왜 율장 공부는 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인으로서의 순수한 의구심은 곧 ‘율장’ 공부에 대한 의지를 격발시켰다. 율장을 공부하기로 작심하고 보니 막연했다. 주위 스님들로부터 해인사 일타(1929-1999) 스님이 율에 밝다고 들었다. 해인사로 가기로 했다. 철우 스님, 청엽 스님, 혜엽 스님도 따라나섰다. 통도사를 거쳐 범어사 강원에서 같이 공부했던 도반들이었다.
해인사 율원
성우 스님이 율장 공부를 위해 해인사로 간 1967년은 통합 조계종 출범 후 설립된 최초의 총림인 ‘해인총림’이 출범한 해였다.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에는 성철 스님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방장을 보좌하는 수좌는 석암 스님, 유나는 혜암 스님, 도감(都監)은 지월 스님이 맡았다. 총림 설립 후 첫 안거인 동안거에 150명의 대중이 모여들었다. 성철 스님의 그 유명한 ’백일법문’은 이 결제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실질적인 해인총림 출범인 첫 안거를 한 달 쯤 앞 둔 1967년 10월 21일, 80명의 사미승들이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성우 스님도 이 가운데 한 명이었다. 총림이라 하면 ‘강원, 선원, 율원, 염불원 등을 갖추어야 한다. 당시 제정된 조계종 〈총림법〉에 그렇게 규정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율원이 없는 총림은 그 이름이 무색할 노릇이었다. 이런 참에 ‘율’ 공부를 하겠다고 자발적으로 학인들이 왔으니, 해인사에서는 반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율원에 학인이 간 것이 아니라 학인들이 와서 율원이 만들어진 셈이다. 해인사 노스님들이 성우 스님을 비롯한 율원 학인들을 어여삐 여겼다. 그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한국불교가 어떻게 굴절되는지를 똑똑히 지켜본 분들이었다. 소위 ‘왜색불교’는 한국불교의 흐름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사찰령〉을 통하여 전국의 절을 ‘총독부’에 예속시켰다. 1926년에는 〈본말사법〉을 개정하여 ‘대처승’도 주지가 될 수 있게 했다. 승려의 절대 다수는 대처승으로 바뀌었다. 술을 파는 절이 생겨날 정도였다. 명색이 율원이었으나 교육 여건은 백지 상태였다. 교수사는 물론 교재조차 없었다. 자운 스님으로부터 ‘삼천배를 하고 성철 스님께 책을 빌리라’는 말씀을 듣고 대적광전에서 3천 배를 했다. 그리고 책을 빌렸다. 『주범망경(注梵網經)』이었다. 당시 그 책을 보려면 국립중앙도서관 말고는 성철 스님밖에 없었다. 율원 학인들은 성철 스님으로부터 빌린 책을 필사하여 교재를 만들었다. 그 자체로 수행인 ‘사경’이었다. 그렇게 만든 책으로 뜻을 새기고 토론을 하며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율주 역할을 했던 일타 스님에게 가서 모르는 것을 묻고 막힌 곳을 뚫는 방식으로 공부를 지어나갔다. 그렇다. 이 공부는 그렇게 지어나가는 것이다.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듯이. 율원생들의 공부방 겸 처소는 극락전 옆 큰방이었다. 당시 극락전은 ‘종정원’으로 쓰였다. 종정 고암 스님은 당신이 율사이기도 해서인지 율원 학인들을 살뜰히 챙겼다. 손수 차를 달여 와서 ‘목 좀 축이고 공부하소’ 하며 들르시곤 했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고양이 걸음으로 와서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이 그럴듯해서 차일 뿐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종정이다 보니 손님을 맞게 되고 그럴 때면 생기는 사과, 배, 귤껍질 같은 것을 장판 위에서 말렸다가 주전자에 넣어 끓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찻값은 실로 무거웠다. 성우 스님은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그 찻값 하느라’ 조계종 행자교육원이며 단일계단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성우 스님은 율사가 되겠다거나, 계율을 바로 세우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율장 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공부가 스님을 조계종 전계대화상(2015-2021)으로 이끌었다.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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