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사에서 사미계를 받은 성우 스님은 이듬해인 1964년 통도사 강원으로 갔다. 스님은 처음 통도사에 갔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방금 외출했다가 온 느낌이었어요. 마음이 그렇게 편안하더라고요. 통도사는 전각이 많잖아요.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여기는 무엇, 저기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어요.” 스님은 천생 절집에서 살 운명이었을까. 운명까지는 몰라도 절집에서 살 ‘복’은 타고난 건 같다. 스님은 평소에도 당신의 출가에 대해 ‘청복’이라고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출가 수행자로 살 것이라면서.
한국 절집의 강원은 전통적 승려 교육 기관이다. 강원의 특징은 ‘전통’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전통에 종종 따라붙는 ‘답습, 고루함’의 이미지도 강원의 전통에는 덧씌우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소임을 통한 대중 화합의 묘리 터득, 논강을 통한 절차탁마는 강원의 고유한 강점이다.
통도사 강원 첫 철 추석 때였다. 도량은 적막했다. 세간에서 흔히 조용한 곳을 일러 ‘절간 같다’고 하는데, 명절 때일수록 큰절은 말 그대로 절간 같다.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큰절 밖으로 나갔다. 영축산 기슭 곳곳에 산내암자가 있지만 어느 골짜기에 무슨 암자가 있고 거기에 누가 사는지는 관심에 두지 않았던 터라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30여 분 쯤 걷자 극락암이었다. 극락암도 텅 비어 있었다. 혼자 도량을 둘러보다가 ‘삼소굴(三笑窟)’이라는 당호가 걸린 방 앞을 지나는데, 노스님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스님은 방안의 노스님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스님, 계십니까?” 하고 여쭈었다. 방안에서, 들어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삼소굴
방안에 들어서고 보니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이었다. 몇 번 대중법문 때 뵀던지라 경봉 스님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오늘 복이 터진 날이구나’ 하고 감격하며 정례를 올리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경봉 스님은 어린애처럼 미소 지으며 “어디서 왔노?”하고 물었다. 밀양 사투리였다. 절집의 예법대로, 큰절(통도사)의 학인이고 파계사가 본사이며, 은사 스님은 ‘윗 자는 옛 고(古)자이고, 밑에 자는 소나무 송(松)자’라고 여쭈었다. 경봉 스님은 잠시 몸을 움직이시더니 유리컵 가득 차 한 잔을 내 놓았다. 경봉 스님은 학인이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는 인자한 목소리로 “편히 앉아 차 한 잔 묵어라. 이 차(茶)는 차가 아니라 그 이름이 차다. 이 차 한 잔 묵으면 삼세 숙업이 녹아지고 앞으로 성불한다.” 하시며 차를 권했다.
경봉 스님이 내 놓은 차는 무슨 열매로 만든 것인지 불그레한 빛깔이 곱고 맛도 상큼했다. 경봉 스님은 수행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일러주시며 통도사와 파계사에 전해오는 전설도 들려주었다. 그 중 한 이야기는 성우 스님의 고향 마을이 무대였다.
성우 스님의 고향인 밀양 산내면 동천에서 운문산 골짜기로 오르면 ‘석골사(石骨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서 두 시간 쯤 더 올라가면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천진보탑’이 있다고 한다. 형식을 갖춘 탑이 아니라 천연의 바위에 사리를 비장(秘藏)했다는 것이다. 전해 오는 얘기에 의하면, 오래 전 통도사에서 큰 불사를 할 때면 통도사 대중 가운데 대중공사로 신심 깊은 두 명의 스님을 뽑아 한 스님은 통도사 적멸보궁, 한 스님은 천진보탑에서 기도를 하게 했다. 입제는 한날한시에 하되 회향 날은 정하지 않았다. 두 곳의 서기가 맞닿는 날이 회향 날이었다.
위 전설의 진위를 가리는 일은 무망한 노릇이다. 기도 가피가 어떤 지극함에서 나오는지를 아는 것이 골자다. 성우 스님은 노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고향에 대한 생각이 한층 깊어졌다.
그날 극락암 삼소굴에서 물러나오는 성우 스님의 마음은 밝은 기운으로 차올랐다. 선지식의 자비에 흠뻑 젖는 희열을 맛본 것이다. 그 마음 그대로 극락이었다. “차(茶)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토록 가깝게 하는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다. 이를 계기로 스님은 ‘차’를, ‘내가 나를 만나게 하는’, ‘너와 나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일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때 싹튼 차에 대한 관심은 훗날 성우 스님이 차인(茶人)으로서 일가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경봉 스님이 사미계를 받은 지 일 년도 지나지 않은 학인과 차담을 나눈 데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을 대하는 데 가림이 없었다. 법문을 할 때도 알 듯 말 듯한 말을 구름 위로 띄워 올리지 않았다. 성우 스님은 경봉 스님의 법문을, “일반적으로 난해한 상당법어를 경봉 스님 특유의 솜씨로 여름날 소나기같이 시원하게 풀어냈다. 스님의 말씀은 우리네 가슴에 산소와 같았다.”고 기억한다. 스님에게 ‘경봉 가풍’은 ‘시원스러움’이었다.
삼소굴(三笑窟)이라는 당호에서도 경봉 가풍이 느껴진다. 경봉 스님이 작명한 것인데, 그 의미를 헤아리려면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동진(東晉) 시대의 고승으로 중국 정토종의 개산조로 일컬어지는 혜원(慧遠, 333-416) 스님은 어려서 유학과 도교에 정통했다. 21세에 도안(道安) 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했다. 그가 여산 동림사에 은거한 뒤로는 절 입구의 ‘호계(虎溪)’를 건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자이자 시인인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 406-477)이 찾아왔다. 청담을 나누다가 그들을 배웅하는 길에 또 이야기에 빠져 호계를 넘고 말았다. 그를 외호하던 호랑이가 포효했다. 그때서야 호계를 건넜음을 깨닫고 세 사람 모두 웃었다는 이야기다. 유불선 삼교회통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는데, 실은 창작된 이야기다. 세 사람의 생몰 연대가 사실이 아님을 일러준다.
경봉 스님은 ‘세 사람의 웃음’에서 울려 나오는 호방한 기운을 데려와 당신이 거처하는 집의 당호로 삼은 듯하다. 도(道)를 행함에 걸림 없는 ‘경봉 가풍’의 한 면모다. 성우 스님은 경봉 스님의 상좌로 오랫동안 경봉 스님을 시봉한 명정(明正, 1943-2019) 스님과도 서로 아끼는 도반 사이였다.
경봉 스님의 차 한 잔은 성우 스님을 차의 세계로 이끄는 길잡이별이 되었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