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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와 만찬’―‘은사의 인연’

늦은 저녁, 한 행자가 행색이 초라한 사람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있다. 도심 주택가에 자리한 작은 절이었다. 음력 정초여서 추운 밤이 일찍 찾아들었다. 표충사를 떠난 성우 스님은 어떤 인연에 끌렸는지 대구의 대성사에 머물게 되었다. 대성사가 자리한 곳은 구한말 대구읍성을 허문 자리에 들어선 대구의 중심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 밀집 지역이었다. 대성사(대구광역시 북성로 19-1)는 일제강점기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2002년에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어졌고 현재는 은해사 대구 포교당이다.
대성사
도심의 큰길가에 있는 대성사에는 공양 시간 때만 되면 거지들이 밥을 얻어 먹으러 오곤 했다. 그날도 한 거지가 성우 스님에게 밥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밥이 없었다. 밥이 떨어져서 스님도 끓인 누룽지를 먹던 참이었다. 스님은 먹던 누룽지 그릇을 내밀어 보이며, 이거라도 먹겠냐고 물었다. 좋다고 했다. 그래서 누룽지 한 그릇을 놓고 둘이서 나누어 먹게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 모습을 지켜 본 스님이 있었다. 정초기도 기간이어서 인근 사찰에서 온 스님이었다. 그 스님은 대성사 원주 스님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행자인데 아직 은사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며칠 후 그 스님은 자신의 본사로 돌아가면서 성우 스님을 데리고 갔다. 팔공산 파계사였다. 성우 스님을 데려 간 분은 고송(古松, 1906-2003) 스님이었다. 성우 스님은 그렇게 해서 고송 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고송 스님과 1989년에
만약 성우 스님이 자신은 굶고 걸인에게만 제대로 한 상 차려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고송 스님은 성우 스님을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이다. 성우 스님과 누룽지를 나눠먹은 걸인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문둥이’였다. 요즘이야 ‘한센병’ 환자라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나환자’라고만 해도 예의를 차린 것이었고, 그냥 문둥이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한센병은 ‘천형’이었다. 설사 치료가 되어 감염력이 없어도 얼굴과 손발의 변형 때문에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었다. “해와 하늘빛이 서러워/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밤새 울었다.”는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 시처럼, 문둥이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간을 내어 먹는다’는 괴담이 떠돌던 시절이었다. 성우 스님은 누룽지를 각자의 그릇에 덜어 먹지 않았다. 세간의 시선대로였다면, 잔뜩 예의를 갖춰 한 상 차려 주고 자신은 굶으면서 거룩함 가득 담은 눈빛으로 지켜보는 편이 훨씬 수월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스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혜자의 시선으로 고결한 양하지 않았다. 거지의 배고픔에 공감했고, 자신의 배고픔에도 솔직했다. 스님의 그 마음은 천연(天然)이었다. 고송 스님은 성우 스님의 그 마음을 본 것이다. 고송 스님은 한암(1876-1951) 스님으로부터 법맥을 이어받은 선지식이었다. 고송 스님은 15살이던 1920년 10월 15일 팔공산 파계사에서 상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1923년에 용성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25년에는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 스님이 주도한 30년 결사에 동참하기도 했다. 1930년부터는 15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 유점사, 신계사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에서 정진하였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에서 정진할 때 한암 스님으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그때 받은 법호가 ‘고송(古松)’이다. 훗날 알려진 그 전법게는 다음과 같다. 不讀金文不坐禪 경전도 보지 않고 좌선도 않으면서 無言相對是何宗 묵묵히 마주하니 이 무슨 종(宗)인고. 非風流處風流足 바람 없는 곳이 바람 일어나니 碧峰千年秀古松 푸른 멧부리에 천년 고송 빼어나도다. 고송 스님은 한때 서울 선학원에서 만해 스님이 발행하는 잡지 일을 돕기도 했다. 1942년 출가 본사인 파계사로 돌아와 주지 소임을 살았고, 1954년부터는 조실로 후학들을 제접했다. 1942년 이후 2003년 열반에 들 때까지 팔공산을 벗어난 적이 없다. 선승이었던 고송 스님은 “참선은 아무나 못하지만 별것도 아닌 것”이라 했다. 온갖 망상을 피우면서 벽만 보는 것은 참선이 아니므로 ‘아무나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쉬는 것, 번뇌 망상을 내려놓는 것이 참선이므로, ‘별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씀이다. 고송 스님은 문둥이 걸인과 아무렇지도 않게 밥그릇을 나누는 행자에게서 ‘식업양신(息業養神)’의 경지를 보았을 것이다. 성우 스님은 파계사에서 출가 수행자로서의 근골을 다져나갔다. 당시 파계사에는 노스님들이 많이 계셨고 동승(童僧)들도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스님은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표충사와 다른 점이었다. 이 대목에서 스님이 처음 입산한 곳이었던 표충사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해야 할 부분이 있다. 스님들은 고향 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성우 스님은 그렇지 않다. 고향인 밀양 얘기가 나오면 언제든 ‘참 좋은 곳’이라 말한다. 그 바탕에는 사명대사 이후 밀양에서 많은 스님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크게 자리한다. 표충사 또한 통일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할 때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였으나,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를 스님의 출생지인 밀양의 이곳으로 옮겨오고부터 절 이름도 그렇게 바뀌었다. 근현대 고승 경봉 스님이나 경우 스님, 지리산 칠불암에서 10년 묵언 정진한 현묵 스님 같은 분들이 밀양 출신이다. 스님의 평생 도반이었던 설악 무산 스님도 동향이다. 성우 스님은 행자 때 만난 객승으로부터 ‘다른 절로 가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고향 절 표충사를 떠났다. 객승이 그런 조언을 한 데는 당시 불교계의 분위기를 고려해야 한다. 성우 스님이 입산한 1963년은 불교정화운동이 끝나고 통합 조계종이 출범(1962년)된 이듬해였으나 정화의 후유증이 심할 때였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대처승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했던 비구승 측에서 옥석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자질 미달의 승려들이었다. 이후도 승려 자질 문제는 한동안 계속되어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당시 표충사는 행자를 제대로 가르칠 정도로 안돈된 사찰이 아니었다. 성우 스님은 파계사에서 착실히 절집 생활을 몸에 붙였다. 행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서는 매일 삼천배 정진을 했다. 행자가 그렇게 한 경우는 달리 찾기 어렵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시켜서 될 일도 아니었다. 마침내 행자 생활을 마치고 1963년 7월 15일 고송 스님을 은사, 한송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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