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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소년, ‘입산(入山)’하다

목적지를 모르는 채 길을 갈 때가 있다. 인생행로에서 청소년기는 대개 그렇지 않을까. 이 길이 맞는지, 길을 잃은 건 아닌지 의심하면서 혹은 그런 생각조차 없이 걸어간다. 어쩌면 그게 정상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맞은편에서 마중이라도 나온 듯한 누군가를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경우가 있다. 성우 스님은 고등학교 때 그런 자신과 만났다. 성우 스님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밀양에서 연례행사로 열리는 ‘아랑제’(현 ‘밀양아리랑대축제’)에 참가했다. 아랑제는 정절을 지키려다 죽음을 당한 아랑 낭자를 기리는 데서 시작된 축제인데, 그 행사의 ‘백일장’에 나가게 된 것이다. 별 뜻 없이 그저 학교에서 보내서 갔을 뿐인데, 덜컥 입상했다. 장원 없는 차상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상’이었다. 이렇게 해서 스님의 삶 속으로 시(詩)가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스님은 자신에게 문재(文才)가 있는지 몰랐다. 스님의 문학적 재능이 백일장에 참가했을 때 벼락처럼 깨어났을 리는 없다. 이미 조금씩 자라나오던 것이 백일장을 계기로 움을 틔운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상’의 의미는 비유컨대 무지개다리의 쐐기돌(키스톤) 같은 것이었다. 무지개다리[홍예교(虹蜺橋)]는 교각이 없다. 마름모꼴의 길쭉한 돌을 양쪽에서 아치 형태로 쌓아오다가, 가운데에 딱 들어맞는 쐐기돌을 끼우면 돌끼리 서로 의지하여 다리가 완성된다. 그런데 허공에 돌을 쌓을 수는 없다. 흙더미나 임시 구조물로 받쳐 돌을 쌓고 쐐기돌을 끼워 넣은 다음 흙더미나 구조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다리를 축조한다. 성우 스님에게 모친의 사랑은 돌덩이가 스스로 다리가 될 때까지 떠받쳐 준 흙더미 같은 것이었다. 그 덤덤한 사랑이 감수성 풍부한 한 소년을 길러낸 것이다. 그 소년이 어느 날 우연히 새로운 길에 섰다. 시를 짓는 한 소년이 마중 나와 있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마냥 놀기 좋아하던, 그 아이였다. 성우 스님은 백일장에서 상을 받고 나서 ‘시’라는 걸 써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무렵 밀양에는 몇몇 시인이 있었다. 박재호(1927-1985) 시인이 대표적이었는데, 1955년 조지훈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하여 1959년 『사상계』 신인상에 당선됐고, 훗날 『경남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낸 분이었다. 당시 박재호 시인은 30대 중반이었다. 스님은 습작 시를 박재호 시인을 비롯한 지역 시인들에게 보여 주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더 나은 표현법을 예시하며 첨삭을 해주었다. 이것이 문학 공부의 전부였지만 그렇게 조금씩 문사의 근력을 키워나갔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세계를 확장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성우 스님은 김지행(金智行)이라는 원불교 교무를 만나 문학과는 또 다른 세계에 눈떴다. 스님은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원불교학생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당시 원불교 밀양교당의 교역자가 지행 교무였다. 지행 교무는 스님을 각별히 대했다. 스님은 지행 교무를 ‘아주 어진 분’으로 기억한다. 종교적 관심보다는 지행 교무와 나누는 대화가 좋았다. 그때 지행 교무로부터 처음으로 참선(參禪)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마음에 불이 켜진 것 같았다. 깨달음 같은 것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선(禪)의 세계’를 알게 된 것만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활력이 되었고 생의 진실을 어렴풋하게나마 감득하는 단초가 되었다. 어쩌면 이미 그때 소년의 마음은 산문 앞에 성큼 다가섰는지도 모른다. 성우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산으로 들었다.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집을 나왔으니, ‘출가(出家)’보다는 ‘입산(入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여기서 ‘왜?’를, 다시 말해 ‘입산 동기’를 거론하는 것은 섣부르다. 아니 성마르다. 대신 이백(李白)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 말에/ 대답 대신 웃는 마음 절로 한가롭네(問余何意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이 두 구절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성우 스님은 70년대 중반 『엘레강스』라는 잡지의 청탁으로 쓴 글에서 입산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입산할 때의 내 심정은 참으로 비장한 것이었다. 밀양읍에서부터 줄곧 걸었다. 자그마치 60리 길은 되었을 것이다. 절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주 어두운 밤이었다. 나는 스스로의 의지를 실현하겠다는 그런 심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어 디뎠다. 내 삶의 앞날에 대한 환상과 지난날의 사실들이 무슨 영화의 한 장면같이 어지럽게 머리를 스쳐갔다. ―석성우 산문집 『승방일기—우리들의 약속』(한겨레출판사, 1997), 175쪽. 60리 길을 걸어서 깜깜한 밤에 도착한 그 절은 ‘표충사’였다. 성우 스님이 입산을 결심했을 때 떠올린 유일한 절이었다. 다른 절은 생각할 여지조차 없었다. 스님의 집에서 산 하나만 넘으면 되는 곳이었다. 지금도 표충사는 사명대사와 함께 밀양을 대표하는 위상을 지닌 절이다. 입산 당시 성우 스님은 불교는 물론 절집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표충사 말고 가 본 절이라고는 고등학교 졸업여행 때 들른 불국사와 석굴암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떻게 출가까지 하게 되었을까? 지행 교무의 영향이 컸다. 상상력 풍부한 문학 소년이, 지행 교무와의 대화를 통해 ‘정신적 귀족’으로 대책 없이(?) 성장한 나머지, 세속적 세상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해야 할까. 성우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술원 고승아카이브팀과의 대담(2023.04.26.)에서 ‘출가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라는 한심한(?) 질문에, “절에 가서 ‘문학 공부’를 맘껏 하고 싶었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웃으며 말했다. ‘중생 구제’니 ‘해탈’이니 하는 거창한 의미의 발심 같은 건 없었다는 말을 한 다음이었다. 위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스님의 입산 동기에는 환상 같은 것이 있었다. 표충사에서 행자 생활이 시작됐다. ‘문학 공부 맘껏 해 보겠다.’던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공양간 일에, 청소에, 반야심경·천수경 외우기도 벅찼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바랑을 맨 객승이 찾아들었다. 스님의 기억 속 그 객승의 등장은 ‘폭풍’ 같았다. 사중에는 누구도 객승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행자였던 성우 스님만이 객승의 존재를 의식했고 자연히 둘만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며칠이 지나서 그 객승이 자못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행자님, 여기 있지 말고 다른 절로 가십시오. 여기는 행자님이 있을 곳이 못 됩니다.” 스님은 왜 그러냐고 까닭을 물었지만, 구체적인 언급은 피하고 거듭 “다른 절에 가서 행자 생활을 하고 사미계를 받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하는 말만 반복했다. 더 묻지 않았지만 스님의 마음에 회오리가 일었다. 직관적으로 ‘뭔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에는 스님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모종의 믿음이 깔려 있었다. 이미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객승의 그 말은 알게 모르게 주눅들 수밖에 없는 행자살이의 굽은 허리를 한 뼘쯤 일으켜 세우는 격려이기도 했다. 성우 스님은 표충사를 떠났다. 두 달 반 정도 지난 때였다. 행장을 꾸릴 것도 없었다. 어차피 빈 몸이었으니까. 산에서 산을 찾아가는 그 길은 밝고도 어두웠다. 한 모퉁이 돌면 또 어떤 굽이와 절경이 펼쳐질지 아득한 벼랑이 다가설지 모르는, 아득한 길이었다.
표충사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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