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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다음으로 제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성우 스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관세음보살의 후신’이라 말한다. 이것으로는 마음에 차지 않는지, “저는 부처님 다음으로 제 어머니를 존경해요.”하고 덧붙인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 시원한 물 달게 마시고 갈증 달랜 아이처럼. 스님의 모친에 대한 존경심은 회고적 감정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이데올로기가 된 듯한 ‘모성’ 예찬과도 다르다. 그것은 지금도 스님의 인격과 행동에 근원적으로 작용하는 에너지의 일부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의 일이다. 토요일이면 집으로 왔는데 어느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부엌에서 누나와 형수가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머니께서 둘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나가 당신께서 아침밥을 지었다. 밥을 먹고 난 다음 둘만 있을 때 스님이 어머니께 왜 그러셨냐고 여쭈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좋은 마음으로 밥을 지어야지, 그렇게 고르지 않은 마음으로 지으면 그 밥을 먹은 사람이 제대로 하루를 보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인격과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친은 7남매를 키우면서도 큰 소리로 나무라거나 화를 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스님의 형님들이 군대에 갔을 때는 밥때마다 한 그릇씩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두었다. 겨울에도 두꺼운 이불을 덮지 않았다. 자식이 ‘나라 시집살이’하는데 어떻게 편히 잘 수 있냐면서. 스님의 동생이 월남으로 파병되었을 때는 매일 치성을 드리고 저녁은 먹지 않았다. 모친은 당신의 삶 앞에 경건했다. 어떤 성스러운 대상을 향한 경건이 아니었다. 삶 자체를 성스럽게 하는 경건이었다. 이보다 종교적인 삶이 있을까. 스님의 모친은 ‘문맹’이었다. “문맹: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름. 또는 그런 사람.” 문맹에 대한 사전의 뜻매김이다. ‘배우지 못하여’라는 전제가 매우 불편하다. 인간의 배우는 행위에서 ‘문자’를 익히는 데 들이는 노력은 일부분이다. 문자를 몰라도 말과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 순서를 따져도 ‘말’이 먼저다. 사전의 뜻매김에서 ‘배우지 못하여’라는 전제는, ‘문맹=무식’으로 여기는 세상의 편견과 오해가 은연중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꼬리잡기식 문제제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문자를 모르고도 사물의 이치에 두루 밝고 현명한 사람들이 많다. 불교 역사는 ‘일자무식’이었다는 선종 6조 혜능 스님을 통해 ‘문자에 구속된 앎’의 위험성과 한계를 직절하게 보여준다. 유식·무식의 경계는 문자가 아니다. 세상에는 유식하지만 무지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세상은 자꾸만 앎을 문자에 가두려 한다. 문자가 권력이던 시대의 그림자는 아직도 짙다. 스님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에 어머니의 성품을 내면화한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어머니를 스스럼없이 ‘부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스님의 이런 발언은 한국불교 출가 수행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에 비추어보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과거 한국불교의 한 단면을 돌아봐야 한다. 한때—조금 느슨하게 말하자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한국의 스님들은 출가를 세상과의 단절로 간주했다. 출가를 ‘세상을 버리는 일’로 표현한 것도 그러한 초세속주의의 일면이다. 혈육과의 인정도 냉정하게 잘라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어머니를 ‘보살님’, 아버지를 ‘처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연시했을 뿐만 아니라 수행자의 위의인 양 여기기도 했다. 정치한 분석은 아니라는 단서를 붙이고 말하자면, 불교정화운동(1954-1962) 때 비구와 대처 간의 선명성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비구 정신이 과잉 발현하여 하나의 현상으로 굳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행자교육원’이 설립(1991)되고 13세 이상 19세 미만 출가자의 경우 부모 또는 친권자의 동의가 필수 요건이 되면서 조금씩 묽어졌다. 물론 요즘은 사미·사미니 수계식 때 속가 인연을 초청할 정도로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스님은 출가 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났다. 가을이 깊어 가는 범어사에서였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오는데 행자가 말하기를, 손님이 오셔서 방으로 모셨다고 했다. 아는 신도려니 했는데 어머니였다. 시골에서 일할 때 모습 그대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계셨다. 스님은 장삼을 입은 채로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잘 지내느냐.”고 물으시는데, 어릴 적 인자하신 음성 그대로였다. 늙고 야윈 모습을 보며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와 주체하기 어려웠지만, “예.”하고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보여 드리면 두 번 불효하는 일이 될 터인즉, 솔직한 심사를 내비칠 수도 없었다. 어머니께서 스님을 찾은 이유는 스님 동생의 결혼 때문이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세상의 법도를 어기고 동생이 먼저 결혼하는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스님은 “부처님 품 안에서 수행 잘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좋은지 모릅니다.”하고 말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가볍게 해 드리려 애썼다. 어머니께서는 난생처음 불교니 수행이니 하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당신으로서는 자못 비장한 선언을 하셨다. “그럼, 네 좋은 대로 하려무나.” 어머니에게 처음 듣는 입산 허락이었다. 스님은 부모님 몰래 출가를 한 터였다. 스님도 어머니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다음, 마침 공양 때고 해서 어머니께 공양을 권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절에서 공으로 밥을 먹어.” 한번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되돌리는 일이 없는 어머니의 성정을 아는지라 재차 권하지는 않았지만, 스님의 심정은 아쉬움을 넘어 섭섭할 정도였다. 대신 절 구경이라도 하시라고 하자 이번에도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미 도량을 다 밟아 보았다. 이곳이 어디냐. 네가 있는 곳 아니냐. 아까 법당 앞에서 보니 네가 장삼 입고 지나가더구나.” 어머니는 이런 분이었다. 절 구경이 아니라 오직 아들의 무탈을 기원하며 도량을 밟았던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봤으면 큰 소리로 부를 법도 했으련만, 조용히 방에서 기다렸다. 스님은 이런 어머니 앞에서 수행자가 아니라 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시는 출가 십여 년이 지난 무렵 어느 날 밤 범어사에서 쓴 ‘사모곡’이다. 잠 잃은 밤은 깊어 성하(星河)도 돌아앉고 어머님 생각에 염불마저 잊은 새벽 창밖엔 창망한 달이 산마루에 걸렸네. 십년도 더한 세월 정도 인연도 멀어 업을 싼 납의는 바람결에 낡아가고 비원(悲願)에 타는 정념(情念)은 사리(舍利)로나 이울까. ―「사모곡」 전문, 석성우 산문집 『승방일기—우리들의 약속』(한겨레출판사, 1979), 99쪽. 성우 스님은 속가 인연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인간적 정리마저 애써 감추려 하지는 않았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인품 앞에서는 기꺼이 아들이었다.
범어사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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