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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우주도 키가 쑥쑥 큰다”고 믿은 어린 시절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무겁게 받아들이자면 ‘화두’만큼이나 높고 단단하다. 반대로 물어보자.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또한 가벼운 질문이 아니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유아기(幼兒期)를 지난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세상이 텅 빈 듯한’ 혹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을 느낀다. 그 느낌은,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임을 승인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한 세계가 태어나는 일이다. 성우 스님은 1943년 4월 15일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천 강씨 대봉 청신사, 모친 파평 윤씨 복순 청신녀 사이의 7남매 중 다섯째였다. 집안은 평범한 농가였다. 가정 형편은 ‘어디 빌리러 다니지는 않아도 될 정도’였다. 스님의 유년기는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6·25전쟁기와 겹친다. 주리기를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정신적 외상으로 남을 정도의 가난을 겪지는 않았다. 부모님과 나고 자란 마을의 은덕이라 해야 할 것이다. 밀양의 남쪽은 낙동강에 넉넉히 몸을 적시고 있지만 성우 스님이 태어난 산내면은 밀양의 동북쪽 끝 산골이다. 북으로 운문산(1,188m), 동으로 가지산(1,240m), 동남으로 천황산(1,189m)과 재약산(1,188m)으로 둘러싸였고 서남쪽으로만 입구가 열린 협곡지대다. 그 골짜기의 동쪽 끝자락이 ‘얼음골’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산내면을 그 형상에 빗대어 ‘호리병 속의 별천지(壺裏乾坤)’라 일컬었다. 골짜기 사이로는 산내천(동천)이 들판을 이루어 사람을 거두었다. ‘물 좋고, 반석 좋고, 땅이 비옥하다’ 하여 ‘삼락(三樂)의 가경(佳景)’이라고도 불리었다. 이곳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깃들어 살았다. 산내면 임고리, 송백리, 가인리의 고인돌이 그것을 말해준다.
스님의 출생지 산내면
성우 스님의 어린 시절은 온전히 자연과 함께였다. 눈 뜨면 산이고, 한달음이면 개울이었다. 들판에 누우면 산마루가 아름 가득 하늘을 펼쳐 놓고 구름을 불러와 온갖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 시절 사람들에게 자연은 요즘 사람들이 짐짓 과장된 어조로 예찬하는 식의 대상화된 자연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뭇잎이 고스란히 비바람을 맞듯이 아침과 저녁 그리고 사계절을 맞이했다. 예전의 농촌에서는 아이들이 일찍 철들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자기 몫의 집안일을 감당했다. 농번기에는 너끈히 한 품을 맡았다. 특히 맏이인 아이들은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으므로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우 스님은 그렇게 일찍 철든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 7남매의 다섯째로 위로 형 3명, 누나가 1명 있어서, 집안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였다. 더욱이 스님은 13개월이나 어머니 태중에 있었다 한다. 그래서 어릴 적 별명이 ‘열석달이’였다. 물론 의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머니의 착각과 일반적이지 않게 길었던 임신 기간이 불러일으킨 오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은 별 의미가 없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산달이 지나서부터는 매순간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었으니 그저 탈 없이 자라는 것만으로 기특했을 것이 당연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다. 사회적 개체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로부터 해방된 그런 시절. 길고 짧은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어린 시절은 누구에게나 그렇다. 성우 스님에게는 그런 시절이 좀 길었다. 적어도 중학교 졸업 때까지는 그랬다. 늦된 데다 열심히 ‘놀기’만 한 아이였다. 생활 여건도 노는 데 최적이었다. 초등학교는 집과 담장 하나 사이여서 종소리를 듣고 뛰어가도 지각을 면했다. 대신 공부는 꼴찌였다. 중학교 또한 몇 백 미터 남짓 거리에 있어서 초등학교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는 그저 혼자 놀 수 없으니까 가는 곳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점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성우 스님은 혹시 방임에 가까운 어린 시절을 보낸 건 아닐까? 다음 시는 그 의문을 해소할 하나의 단서가 될 듯하다. 밤에는 우주도 키가 쑥쑥 큰다시던 삼촌 말만 믿고 잠을 청해 보았다 민숭한 앞산 허리에 구름 같은 꽃가마. ―「선시·2」 전문, 석성우 시집 『禪詩』, 12쪽. 성우 스님이 아이 적에 삼촌으로부터 “밤에는 우주도 키가 쑥쑥 큰다”는 얘기를 들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밤늦도록 눈 초롱초롱한 아이에게 ‘일찍 자야 키가 큰단다’ 하는, 어른들의 흔한 말이었기가 쉽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조금도 채근하는 기색 없이 따뜻했던 듯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밤을 구름 같은 ‘꽃가마’로 지날 수 있었겠는가. 스님은 그렇게 좋은 양육자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냥 내 편일 것 같은 시간이 냉정한 심판자로 변하는 때가 있다. 성우 스님에게는 중학교를 졸업하는 때가 그랬다. 사실 시간 그 자체는 감정도 실체도 없다. 시간은 그저 빈틈없이 재깍거리며 지나갈 뿐인데 사람이나 사물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애착 없이 놀이 삼아 중학교까지 마친 스님의 학력은 밀양읍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당시는 입학시험을 쳐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던 때였다. 스님은 새로운 시간 앞에 무방비 상태였다. 중학교로 학업을 끝낼 상황에서 어머니가 해법을 찾았다. 밀양읍에 있는 중학교로 보내어 3학년 과정을 다시 밟게 한 것이다. 재수라는 말조차 모르던 시골이었고, 당시 농촌의 경제 사정까지 감안하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성우 스님은 난생 처음 집을 떠나 밀양읍에 있는 세종중학교에서 3학년을 한 해 더 보낸 다음 밀양 세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어머니의 뒷바라지 덕분이었다. 만약 어머니의 그런 결정과 헌신이 없었다면 스님의 인생 경로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스님은 어머니를 ‘관세음보살의 후신’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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