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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지혜와 깨달음의 현실화

학림사 대원 스님은 많은 법문을 통해 ‘반야 지혜’를 강조한 바 있다. 이를테면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다들 공의 도리라고 강조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알면 부처님의 뜻과는 천 리나 거리가 멉니다. 거기에는 공과 무를 내세우고 전제하는 뜻이 있는데 그걸 알아야 합니다. 공과 무를 내세운 이면에 무변광대한 반야 지혜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라는 내용을 들 수 있다. 그 반야 지혜라는 건 어떻게 얻어야 할지, 대중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실 것을 청했다. “반야 지혜는 일체의 모든 바깥 천태만상의 차별 경계에 부딪혀 즉각적인 안목으로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는 데서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척척 나오는 지혜를 말합니다. 찰나에 나오는 지혜, 그것이 반야 지혜입니다. 그런데 일반 대중에게는 그런 즉각적인 바른 지혜나 안목이 나오질 않습니다. 국난이 닥친다든지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친다든지 어떤 직장에서 어려운 일로 해임을 당한다든지 할 때 바로 그에 대한 것을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척척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머리 싸매고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안 되면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다가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으며 병원에 가는 사람도 있고, 말할 수 없는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반면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날카로운 낫으로 풀을 베듯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그게 반야 지혜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반야 지혜를 얻기 위해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대원 선사가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 공의 도리를 강조하는 게 아니다.’라는 법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금강경오가해 강설
“공이나 무를 내세우는 것은 우리에게 막힌 게 있기 때문입니다. 막혀서 바로 가는 길을 모르니까, 막힌 부분을 그냥 썰어서 없애 치워야 반야 지혜가 드러날 수 있으니까 공과 무를 내세운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경지를 게송으로 일러보겠습니다.” 千年髑髏裏眼晴 천 년 된 송장 속의 눈동자가 맑고 靑天霹靂起波濤 푸른 하늘 천둥 번개 파도를 일으키네. 대개 선방 수좌들은 깨달음을 얻은 뒤 ‘보림(保任)’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보림은 보호임지(保護任持)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찾은 본성(本性)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림이라는 것도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보림에 대한 대원 스님의 견해와 경험담을 여쭤보았다. “산에 올라가 봐야 다리가 길고 짧은 걸 알 수 있고, 물에 들어가 봐야 키가 큰지 작은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깨달음을 얻으면 그 깨달음이 현실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 이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게 생겼다고 합시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는 활로를 찾는 게 중요한데 우둔한 중생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그만 목숨을 잃게 됩니다. 반면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런 데서 바로 살 수 있는 활로(活路)를 열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를 모든 생활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육조 혜능 스님은 산적들이 모여 사는 굴에 들어가 10년간 살았습니다. 깨달음의 지혜가 현실화가 되는지 알아본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선사 같은 분은 거지들 무리에 들어가 그들을 보살펴 주고 세속의 모든 걸 겪어보면서 당신의 깨달음이 현실에 실현이 되는지 실험해 봤습니다. 보림이라는 게 그런 걸 말하는데 그런 수행을 실제로 해봐야 합니다.” 대원 스님은 1960년대 후반, 금오 선사와 정철우 선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한 수좌를 시험해 본 예화를 들려주었다. 당시 그 수좌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종단 내부에서 이름이 자자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두 선사가 그를 불러 법거량을 해보니 정말 지견(智見)이 났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선사들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네가 정말 깨달았는지 시험해 봐야겠다.” 두 선사는 수좌를 데리고 거지들이 모여 사는 다리 밑 소굴로 찾아갔다. 그러자 거지 대장이 물었다. “스님들이 여긴 뭣 하러 왔소?” “우리도 평생 신도님들 밥을 얻어먹고 있으니 당신들과 똑같은 거지라오, 그래서 기왕이면 여기서 당신들과 똑같이 얻어먹고 살려고 왔소.” 거지 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소. 우리가 어디 가서 한탕 털려고 하면 스님들도 따라가 털어야 하고 또 동냥질을 해서 다 함께 나눠 먹어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와 지낼 생각이오?” “그럴 각오를 하고 왔으니 무슨 일이든 하겠소.” 금오 선사 일행이 이렇게 답하자, 거지 대장은 당장 먹을 것을 털러 가자며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두 선사는 열외를 시켰다. “나이 먹은 두 스님은 여기서 기다리고 젊은 당신이나 갑시다.” 결국 두 스님은 그 소굴에 남게 되었고 수좌는 거지들과 길을 나섰다. 얼마 후 두 스님은 굴속에 남아 있던 거지 대장의 부인을 희롱하였다. 그러고는 줄행랑을 쳤다. 몇 시간 뒤 거지 일행과 수좌가 돌아오자, 거지 대장 부인이 울고불고하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뭐야? 그 중들이 당신을 희롱한 뒤 도망쳤다구? 그럼 젊은 너라도 대신 맞아야겠다.” 거지 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지들은 아무 죄도 없는 수좌를 포박한 채 흠씬 두들겨팼다. 그러고는 수좌를 들춰 엎고 소굴 근처의 똥 구덩이에 처박아 버렸다. 몇 시간이 지나 수좌는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금오 선사와 정철우 선사가 계신 곳으로 돌아갔다. “자네, 어떻게 살아왔나? 자네가 깨달았다더니 그래 거지소굴에 가보니까 자유자재가 되고 그곳에서 헤어날 만한 어떤 지혜가 나오든가? 그런데 몸은 왜 이 모양으로 똥 범벅이 되어 다 죽어가는가?” 수좌가 두 스승에게 따졌다. “아니 스님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저만 그렇게 곤경에 빠뜨려 놓고 그냥 가버리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시험을 본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깨달았다고 큰소리를 쳐놓고 그런 데서 벗어날 지혜도 없이 그게 뭔가? 현실성이 하나도 없이 이론적으로 깨달았다면 무슨 소용이 있어? 실전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제야 수좌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아이구, 큰스님들! 제가 아직 공부가 안됐습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대원 스님은 이런 예화를 들며 깨달음을 얻었으면 그 깨달음을 현실화시켜야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강조했다. “깨달음이 현실화가 되어야 합니다. 역대 조사들은 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 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금오 선사
· 집필자 : 이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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