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당대의 선지식들과 나눈 법거량

선방 수좌들이 깨닫고 난 뒤 스승들을 찾아 뵙고 법거량을 하는 것은 깨달음의 차원에서 계합이 되는지 점검하는 절차이다. 법거량이라는 과정이 없으면 본인의 깨달음이 바르게 깨달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원 스님은 출가 후 은사를 비롯해 당대의 고승들로부터 많은 가르침과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은사였던 고암 스님은 평생 수행에 철저했으며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긴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암 스님은 대승 보살행을 밖으로 드러내서 행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승 보살행은 깨닫기 전에는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게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고암 스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공부하고 체험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용성(龍城, 1864-1940) 스님께 법거량을 하여 바로 전법을 받으셨지요. 그 후로는 밖으로 대승 보살행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 일생을 살아오셨습니다. 보통 깨달았다고 해도 어떤 분들은 그냥 담박하게 선 사상만 강조하고 사시면서, 밖으로 널리 보살행을 펼치는 걸 부정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과 사상은 우리가 깨달은 뒤로는 반드시 밖으로 대승 보살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통도사 경봉 스님께서는 깨달음과 대승 보살행을 병행해서 많은 분에게 포교하신 선지식이었습니다.” 스님은 은사이신 고암 스님에 이어 경봉 스님과 얽힌 일화를 들려주었다. 스님이 경봉 선사가 주석하던 통도사 극락암에 방부(房付)를 드리러 갔을 때였다. 대개 방부를 드리러 간 수좌들은 방부 드리러 왔다는 걸 말씀드리고 큰절을 올리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대원 스님은 큰절을 올리지 않은 채 먼저 경봉 스님이 계신 방 앞에 한발을 쑥 내밀어 보았다. 그때 경봉 스님은 “악!”하고 할을 했다. 대원 스님은 곧 두 발을 모은 뒤 차수를 하고 서 있었다. 그러자 경봉 스님이 물었다. “무엇인고?” 이때 스님은 자신을 소개하는 대신 “예! 낮은 것을 만나면 낮은 것을 밟고 높은 것을 만나면 높은 것을 밟습니다.”라고 답했다. 당대의 대선사와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좌의 선문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경봉 스님이 질책했다. “너는 어째서 높은 데서 낮은 것을 모르고 낮은 데서 높은 걸 모르느냐?” 대원 스님은 이 질문 속에 어떤 의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 ‘너는 높은 것을 밟고 낮은 것도 밟고 천하에 유아독존처럼 다 높기만 하지 어찌 굽히고 절을 할 줄 모르느냐?’는 뜻이 담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하에 법체 강녕하셨습니까?”라고 말하며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경봉 선사는 싱긋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대답 가지고는 방부를 받아줄 수가 없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대원 스님은 “그러십니까? 그러면 저는 스님이 앉으면 앉을 것이며, 스님이 서면 설 것입니다. 또 스님께서 누우시면 저도 누울 것이고 스님의 일거일동을 저도 그대로 따라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때 경봉 선사는 “나는 이름도, 모양도 없거늘 네가 무엇을 보고 나와 똑같이 따라 한단 말이냐?”라고 물었다. 대원 스님은 그처럼 난감한 질문을 받고도 머뭇거리지 않고 “저도 스님과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경봉 선사의 의지에 계합하는 요긴한 답변이었다. 이에 경봉 선사는 눈을 번쩍 뜨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대원 스님이 여쭸다. “스님, 제가 한 말씀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말해보거라.” “관(關)에서 스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점검을 받고서야 통도사 극락암에 방부를 드리게 되었다. 하루는 ‘암두도자(巖頭渡子)’ 공안을 두고 경봉 선사와 선문답이 있었다. 암두 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뒤 뱃사공 일을 하던 중 아기를 안고 있던 여인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자 여인이 아기를 강물에 집어 던졌다는 내용이 암두도자 공안이다. 경봉 선사가 이 화두에 대해 물었다. 당시 대원 스님은 선방에서 입승을 보던 중이었다. “입승이 만약 암두 선사 입장이었다면 여인의 질문에 어찌 대답할 것인고?” “저라면 배도, 삿대도, 여인도, 아이도 다 던져버리고 툭툭 손 털고 춤을 추고 떠나가겠습니다.” 이 답변을 듣고 경봉 선사가 물었다. “입승은 누구한테 이 화두를 점검하고 얘기한 적 있는가?” “예. 지난날 고암 스님과 혼해 스님, 향곡 스님께 점검받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한 가지 더 묻겠다. 조주의 무자십종병(無字十種病)에 걸리지 않는 일구를 일러보아라.” “안괘공(眼掛空)이요, 수확영검(手攫靈劍)입니다. 눈은 하늘에 걸어놓고 손으로는 신령스러운 칼을 잡았습니다.” 이 답변을 듣고 난 경봉 스님은 밝게 웃고는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과 사진을 잘 안 찍는데 너는 나랑 한 장 찍자.”
경봉 스님과 극락암에서
대원 스님이 경봉 선사에 이어 회고한 고승은 금오 선사였다. “금오 스님께서는 공부하는 수좌를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공부하는 수좌를 만나면 그 사람이 안목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가장 관심을 가지고 묻고 엄격하게 경책하시는 것으로 유명한 분이었지요. 옆자리에 주장자를 놓고 경책하시기 때문에 대개는 그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절을 하거나 서 있을 수도 없어요. 주장자로 한 대 맞을까 봐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원 스님은 용감하게도 금오 선사 근처로 다가섰다. “넌 어디서 왔느냐?” 이럴 때 대답을 잘해야만 했다. 곧이곧대로 어디 어디서 왔다고 답하면 “이놈아!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냐?”며 한 대 때릴 것이고, 대답을 우물쭈물하면 “그런 것도 모르느냐?”고 때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원 스님이 오히려 되물었다. “스님께서는 저를 어디에서 보셨습니까?” 이렇게 되자 금오 선사는 놀라면서 “어허! 그래? 그러면 하나 묻겠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응무소주’라 했거늘 너는 머무른 바가 없다면 어디에서 머무르고 사느냐?”라고 물었다. 이때 대원 스님은 절을 한 번 올리고 세 걸음 뒤로 걸어간 뒤 차수(叉手)한 채 답했다. “저는 이와 같이 머물고 삽니다.” 이런 답변을 듣고 난 금오 선사는 크게 웃으면서 시자인 월탄 스님에게 분부했다. “여기 아주 귀한 수좌가 왔으니 차 한 잔 대접하여라.” 금오 선사가 차를 대접한 수좌는 대원 스님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금오 선사는 납자들을 아주 철저하게 다스렸다는 게 스님의 회고였다. 그 다음으로 떠올린 분은 동화사 조실을 지낸 전강(田岡, 1898-1975) 스님이었다. 전강 선사의 수행도 철저하여 깨달음을 얻은 뒤로 많은 수좌들을 가르쳤다. 대원 스님도 전강 스님 회하로 가서 많은 걸 보고 깨달았다. 특히 수좌들이 공부에 대한 것을 물으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전광석화와 같이 대답해 주신 게 인상에 오래 남는다고 하였다. 대원 스님이 처음 전강 선사를 찾아갔더니 무슨 화두를 드느냐고 물었다. “저는 화두가 없습니다.” “화두가 없이 수좌가 되나?” “그러면 스님께서 화두 하나 주십시오.” 이렇게 청했더니, 전강 선사는 조주의 무(無)자 화두를 말했다. “어떤 학인이 조주 선사에게 여쭙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했더니 조주선사가 ‘무(無)’라고 했다. 어째서 무라고 했는지 참구해 보아라.” 이때 대원 스님은 “그것은 조주 스님의 화두가 아닙니까? 조주 스님의 화두는 놔두고 스님의 화두를 하나 내려주십시오.”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전강 선사는 “어허! 이 사람이?”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무!” 하고 말했다. “아, 이제는 스님의 화두가 맞습니다.” 그때 전강 선사의 시자가 다가와 말했다. “지금 큰스님을 뵙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나중에 얘기하고 오늘은 이만 마치는 게 좋겠습니다.” 결국 그날 대원 스님은 법거량을 끝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의정부 쌍용사에서 전강 스님을 다시 뵙고 공부에 대한 것을 여쭙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성철 선사와 절친했던 향곡(香谷, 1912-1978) 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일도 대원 스님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향곡 스님은 그 어느 스님들보다 조사의 공안에 능수능란한 분이셨습니다. 다른 스님들의 경우엔 같은 답을 하시긴 해도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향곡 스님은 공안에 대해 명쾌하게 말씀을 잘해주셨고 선지가 출중하셨습니다.” 한편 성철 스님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이 시대의 선지식으로 추앙받고 있다. 과연 대원 스님은 성철 선사에게 어떤 가르침과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을까? “성철 스님께서는 선에만 집착하지 말고 교와 선을 두루 갖춰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 대원 스님이 성철 선사를 찾아 뵙고 인사드렸을 때였다. 경을 다 봤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답했더니, “그러면 이제부터는 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성철 스님께선 참선을 해서 이론적으로 배운 것을 실질적으로 체험하고 증득(證得)해야 한다는 걸 여러 번 강조하셨습니다. 증득하지 못하면 안 된다, 그냥 이론으로만 알아서는 안 되고 철견을 통해 증득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지요.” 이는 성철 스님이 평소에 강조했던 ‘책 읽지 말라’는 말씀과 일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성철 스님은 출가 전은 물론 출가 후에도 불서를 비롯해 과학이나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수많은 책을 섭렵했고 법문할 때는 그런 이론을 막힘없이 인용하며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원 스님도 간화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조사들이 남긴 선어록을 강의하고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그렇다면 성철 스님이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대원 스님은 책 읽지 말라면서도 책들과 가깝게 지냈으니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여쭤보았다. “한로축괴(韓盧逐塊)요, 사자교인(獅子咬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흙덩이를 개한테 던지면 그것이 먹을거리인가 하고 쫓아가 냄새를 맡지만 사자에게 던지면 그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참선하여 깨달음의 안목이 열린 분이 책을 보면 글을 읽고 어떤 이론을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의 깨달음의 세계를 음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책을 읽으면 문자와 이론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실질적인 체험, 철견으로 깨달아야 하는데 그게 소홀해져서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 초학자들이 공부할 때는 깨달아서 눈이 열리기 전에는 책이나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화두에만 전념할 뿐이지 다른 것에 관심을 두면 공부에 도움이 안 되고 지장이 된다는 것이지요. 만약 깨닫고 안목이 생긴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도 다른 병통이 없이 깨달음의 세계를 스스로 수용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게 성철 스님의 가르침입니다.”
고암 상언 대종사와 퇴옹 성철 대종사
· 집필자 : 이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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