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림사 대원 스님은 ‘불교와 과학의 이론’에 대해서,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이렇게 물질 만능으로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 인류에게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줄 수 없다고 법문한 적이 있었다. 요컨대 ‘과학기술이 제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인류는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없기에 불교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취지였다.
불교는 무엇보다 공 사상을 강조하는 가르침인데 공사상으로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얻는다는 것은 좀 모순적인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불자들이 공(空) 사상을 터득하는 것과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얻는 것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여쭤보았다.
이에 대원 스님은 공 사상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여러 대중이 다 함께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물질문명을 활용하기 때문에 공 사상을 깨닫지 못한 사람,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이 물질문명을 사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많은 사상가나 철학가들이 나름대로 이론적인 견해를 표현한 게 많지만 그러한 견해나 이론으로는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물질에 의해서 잠시 위로를 받거나 편안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영원한 편안함과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컴퓨터나 핸드폰, 텔레비전이 없는 시대에도 우리는 괴로웠고 핸드폰이나 컴퓨터가 눈부시게 발전한 이 시대에도 우리의 괴로움은 그대로 존속하고 있잖아요?
우리가 물질문명을 가지고 생활하는 속에서 공의 이치를 깨달은 가운데 물질을 수용하는 사람은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기에 별다른 불협화음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만인과 더불어 공유하며 편안하게 공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의 차원을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컴퓨터나 핸드폰이 있어도 그것을 악용합니다. 그걸로 사기도 치고 자기 이익을 취하며 그걸로 인해서 남을 죽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좋지 못한 일을 만들기 때문에 물질이 발전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함을 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자리를 바로 깨달은 사람, 그러니까 공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컴퓨터나 핸드폰이나 아무리 좋은 게 있어도 그걸 이용하되 서로 불행하거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만인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씁니다. 그래서 그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과학 물질로는 우리 중생의 악습과 개인적인 편리, 독단적인 편리 위주의 욕심을 가지고 물질을 사용하면 더욱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 사상을 깨닫고 자기 마음, 부처 자리를 바로 깨닫게 되면 모든 물건을 쓰되 다 함께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그렇기에 차원이 다릅니다.”
한편 스님은 법문을 통해 “재앙이 없는 편안하고 복된 나라가 되자면 우리 인류의 의식에 망념(妄念) 공해가 없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참마음을 바로 보고 참마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무아(無我)는 진(眞)과 망(妄)이 다 공(空)해서 공적영지(空寂靈知)한 것을 말합니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불교는 무아(無我) 사상을 가장 강조하는 종교이다. 『금강경』만 해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여의라고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應無所住] 그 마음을 내라[而生起心].’는 게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런 무아의 가르침과 대원 스님이 강조하는 ‘참나’는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 과연 무아와 참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런 질문에 대해 스님은 먼저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에 나오는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으로 운을 뗐다. 이 생멸문과 진여문을 이해하는 단초는 『열반경(涅槃經)』 사구게와 그에 얽힌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몇 겁 전, 부처님이 설산(雪山)에서 동자로 사실 때였다. 하루는 동자가 산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 게송을 읊었다.
“모든 것은 무상하니[諸行無常], 이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법이다[是生滅法].”
이 짤막한 게송에 마음 깊이 감동한 설산동자가 누가 그런 멋진 시를 읊었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인상이 험악한 나찰이 동자의 주변에 서 있었다.
“방금 전 ‘제행무상 시생멸법’이라는 게송을 당신이 읊었습니까?”
“그렇다.”
“제 생각으로는 그 게송이 거기서 그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 구절을 들려주십시오.”
“그러고 싶지만 지금 내 배가 너무 고파서 맨입으론 안 되겠다. 뜨끈뜨끈한 네 피를 마시면 모를까?”
설산동자는 나찰에게 자기 몸을 바쳐서라도 나머지 게송을 듣고 싶었지만 먼저 몸을 바치면 법문을 들을 수 없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법문을 들려준다면 몸을 바치겠노라 굳게 다짐하자, 나찰이 나머지 구절을 들려주었다.
“생멸에 집착하지 않으면[生滅滅已] 곧 고요한 열반 경지에 이르리라[寂滅爲樂].”
이때 설산동자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나찰이 불러준 사구게를 절벽에 적어놓은 뒤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어느새 인드라(제석천)의 모습으로 변한 나찰이 설산동자를 받아 사뿐히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여러 천신들이 모여 설산동자의 발에 절하면서 그토록 지극하게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구도의 정신과 서원을 찬탄하였다.
태어나면 죽고, 죽으면 다시 태어나 생멸(生滅)이 계속 이어지는 게 생멸문이다. 이에 비해 진여문은 생멸을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진여문은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우리 중생이 본래의 불성을 가지고 있는 진면목을 진여문이라고 하는데 이걸 ‘참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본래 무아 사상이며 이 무아 사상에는 ‘참나’이니 ‘거짓나’이니 이름을 붙일 게 없습니다. 무유정법(無有定法), 그러니까 고정된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세계가 바로 무아입니다.
그런데 이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방편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그걸 ‘참나’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지혜’라고도 합니다. 또 ‘각성’이니 ‘공’이니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르는 것은 방편일 뿐 실제 그 이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진리의 공사상이라는 건 그런 것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스님은 참나를 바로 깨닫고 나면 망(妄)이라는 걸 없애려 할 필요도 없다고 강조한다. 망 자체가 바로 다 진(眞)이기 때문이다.
“일체가 다 진이거든요. 그러니까 망상을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망(妄)이 불(佛)이며 불이 망입니다. 그 원리를 바로 깨닫고 나면 망상이라는 걸 따로 제할 것도 없고 진리라는 걸 따로 구할 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석인(石人)이 백 가지 잡된 것을 다 부숴버리고, 진흙소는 쇠로 된 가시수풀에서 잠을 잔다 하리라.”
학산 대원 대종사 법어집
· 집필자 : 이정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