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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록』을 강설하다

대원 스님은 근래(2023년 8월)에 상, 하권으로 이뤄진 『조주록 강설』을 펴낸 바 있다. 본래 『조주록』은 당나라 때의 선승인 조주(趙州, 778-897) 선사가 남긴 어록을 여산(廬山) 서현(棲賢) 보각선원(寶覺禪院)의 징시(澄諟) 선사가 1131년에 편찬한 것으로 『조주진제선사어록(趙州眞際禪師語錄)』을 줄여 부르는 말이다. 조주 선사는 선종 최고의 화두인 ‘무자(無字)’ 화두로 유명하다. 하루는 어떤 제자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여쭸다. 이때 조주 선사는 없다[無]고 말했다. 그때부터 제자는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셨다는데 왜 스님께선 없다고 하셨을까’라는 의문에 빠졌다. 결국 이때의 문답을 계기로 무자 화두가 생겨났다. 대원 스님은 『조주록』에 대해 “선의 골수요, 종문에서 최고 고준한 진리의 말씀”이라고 평가했다. 스님은 2016년부터 2022년까지 6년 동안 총 283회의 법회를 통해 『조주록』 525칙의 공안을 강설했으며, BTN불교TV 방송에 이 법회가 방영돼 선에 대한 안목을 바로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두 권의 두툼한 책으로 엮은 게 바로 『조주록 강설』이다. “조주 스님이 말씀하신 선의 차원은 어떤 이론이나 사상, 과학으로도 미치지 못하는 차원입니다. 불교라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심을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여러 번 강조한 것처럼 사마타[止, 寂靜], 위빠사나[觀]와 간화선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마타,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것은 적정하고 편안하게 안주하는 데 근본이 있습니다. 사마타, 위빠사나는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느끼고 알아차리는 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잡다한 여러 가지 생각이 밖으로 가지가 뻗어 나갑니다. 그걸 막으려면 일체 망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련해야 합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는 걸 차단하기 위해 단련해 나가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릴 뿐이지 그 외의 생각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단련해 나가면 나중에는 있는 그대로만 느끼고 알아차리는 것이 숙달됩니다. 그러면 잡다한 번뇌, 망상 따위가 없어져 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에는 고요한 안정에 들어갑니다. 고요한 안정에 깊이 들어가서 편안한 겁니다. 아주 편안하고 좋습니다. 그렇게 안주하다 보면 이 세상이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관계없습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이 혼자 안주해 머물러 있는 겁니다. 당나라 때 어떤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큰 산이 하나 솟아났기에 보았더니 흙이 좋았어요. 그래서 자꾸 파다 보니까 결국은 밑바닥이 드러났고 거기서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그에게, 어느 시대의 누구냐고 물었어요. 그 사람이 대답하길, 과거 가섭불 때부터 이 자리에 앉아 선정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몇 겁 전에 그 자리에 앉아 선정에 들었는데 그때의 평지가 산처럼 솟아올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몇 겁이나 앉아 있었지만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곳이 가장 편안한 곳이라 여겨 오랜 세월 깊은 선정 속에만 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문, 연각, 독각, 벽지불 등이 모두 적정, 무위의 세계에 안주하여 거기에만 집착했기에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겁니다. 다시 깨달음으로 가야 완벽하게 영원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하질 않았습니다. 익힌 습관에 깊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걸 선의 문중에서는 ‘죽은 물건’, ‘송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현실 세계로 나와서 무애자재하게 써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고 그렇게 하는 걸 싫어합니다. 시끄러운 것도 싫어하고 고요함 속에 안주해 있는 것이 영원히 편하기 때문에 그것만 좋아합니다. 그걸 본인들은 열반이라고 합니다만 우리가 볼 땐 소승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만이 적적하고 고요한 편안함에 머물러 있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니 바로 소승들이 하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사람들을 매우 꾸짖고 야단쳤습니다. 북방에서 수행하는 간화선은 위빠싸나 수행이 오히려 병통이 되기 때문에 그 자체를 완전히 부숴버렸습니다. 부산에서 서울을 가려면 대구, 대전, 수원 등을 거쳐야 하는데 그 중간 경유지를 무시하고 바로 서울로 가는 게 바로 간화선입니다. 간화선에서는 일체의 닦음과 알아차림, 고요한 세계에 안주하는 것, 소승이나 대승할 것 없이 일체를 싹 다 부숴버립니다. 모두 부정하고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를 바로 갖다 대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뭣고’입니다. 이게 무엇인고라는 차원에서는 돈오돈수다, 돈오점수다, 부처다, 조사다, 최상승이다, 소승이다, 대승이다 따위를 일절 부정합니다. 어떤 것도 거기에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뭣고입니다. 이뭣고는 바로 깨달음의 본분지를 딱 갖다 대주는 건데 거기에서 바로 알아차려서 깨닫는 사람은 ‘돈오돈수’라고 합니다. 바로 알아차려서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 알려줘도 멍청해서 무언가 깨닫지 못하면 생각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차선책으로 이뭣고에 대한 것을 깊이 의심해서 다시 참구하도록 하면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마타, 위빠사나는 격 안에서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간화선은 격 밖의 소식을 바로 알아차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격 밖의 소식을 바로 알아차리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것이 조사의 의지냐고 물었을 때 조사의 의지에 대해 일일이 설명한다면 그건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지, 선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조사의 의지냐고 물었을 때 스승이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고 “악!”하고 할을 했다면 그 외마디 소리로 답을 다 해 준 것입니다. 제자는 이것을 어떻게 알아차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마타, 위빠사나에서는 있는 그대로 볼 뿐이라고 하여 일체의 다른 생각에 가지가 뻗지 않도록 하는 단련이지만 간화선에서는 그게 아니고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본분지를 바로 갖다 대줍니다. 어떤 것이 조사의 깨달음이냐고 물었을 때 “악!”하고 소리를 지른다든지 “마른 똥 막대기다.”라고 한마디 해 주는 것이 바로 간화선이고 격외선입니다. 그렇기에 사마타, 위빠사나와 격외선, 간화선에서 똑같이 알아차림이라 말해도 그 차원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위빠사나에서 구구하게 뭘 닦고 올라가서 나중에 편안한 적정에 머물러 오랫동안 있다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조사 스님들은 구구하고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일러주고 바로 가르쳐 줍니다. 그게 직지(直指)입니다. 바로 가르쳐주면 바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처럼 대원 선사는 『조주록 강설』에 대해 설명하던 중 남방의 위빠사나와 북방의 간화선의 차이와 간화선 수행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러니까 간화선 수행은 스님의 포교 방법이자 중심 사상이라 볼 수 있다. “『조주록』은 그런 차원에서 강설한 것이라 거기에 다른 걸 붙이지 못합니다.”
조주록 강설
· 집필자 : 이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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