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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법은 간화선을 위한 기초 수련

어느 해인가 대원 스님은 남방에서 수행하고 돌아온 교수 한 분과 수좌, 비구니 등 세 분의 방문을 받았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희는 오래전 선방에서 ‘이뭣고’라는 화두를 들며 수행했습니다만 아무리 화두를 타파하려고 해도 안 되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미얀마로 가서 공부하면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 준다고 하기에, 미얀마로 가서 10년간 관법을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사념처관(四念處觀)에서 무아라고 하는 것,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인가를 받았는데 그때 ‘한국인들은 이걸 모르고 있으니 제대로 전하라’는 분부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스님이 물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때 그들이 항의했다. “스님께서는 왜 일체가 없는데 ‘이뭣고’라는 대단한 화두를 내려서 생사람을 잡으셨습니까?” 대원 스님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미얀마에서 나라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라는 건 본래 없습니다.” 이때 스님은 곁에 있던 장군죽비를 들어 수좌 스님의 어깨를 쳤다. 수좌가 물었다. “스님, 왜 저를 때리셨습니까?” “방금 죽비를 맞고 왜 때렸느냐고 물었는데 그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때 수좌는 “어, 이게 아닌데…….” 하면서 중얼거렸다. 대원 스님이 다시 죽비로 때리고 물었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말하세요.” “거기서는 없다고 해서 인가를 받았고 이렇게 점검하는 건 없었습니다.” “무슨 딴소리를 합니까? 있는지 없는지 분명히 답하세요.” 스님은 세 번째로 죽비로 때린 뒤 다시 물었다. 이렇게 되자 죽비를 맞은 수좌는 엉엉 울고 난 뒤 큰절을 올렸다. “스님, 이제야 ‘이뭣고’ 화두를 들라는 뜻을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이뭣고’ 화두를 타파하겠습니다.” 이때 대원 스님이 말했다. “위빠사나에서도 알아차림이 지혜라고 했는데 그 알아차림은 남방이나 북방이나 똑같아요. 하지만 차원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어떤 주부가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놓고 한창 찌개를 끓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전화를 해 그 집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위태롭다고 알려줬어요. 그때 주부는 소스라치게 놀라 가스 불을 끄는 것도 잊은 채 밖으로 뛰어나가다가 마침 자기 남편이 들어오는 걸 보고 눈을 찡끗했어요. 그러면 위빠사나 수행법대로 하면 부인이 눈을 찡긋한 것뿐입니다. 차를 한 잔 마시면 마시는 것뿐이지요. 그런 게 위빠사나 수행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간화선 수행에서는 부인이 남편에게 눈짓하면 남편은 곧바로 부인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빨리 가스 불을 끄는 것이지요. 과연 어떤 알아차림이 수승합니까?” 대원 스님의 질문에 방문객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들은 알아차림이라는 것을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뿐, 없어지면 없어졌을 뿐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격 밖의 소식을 알아차린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눈을 찡끗했으면 그 의지를 바로 알아차려야지 위빠사나처럼 눈을 찡긋한 것뿐이라고 생각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야 남방의 관법과 북방 간화선의 알아차림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겠습니다.” 이때 대원 스님은 오조 홍인(五祖弘忍, 601-675) 대사와 육조 혜능(惠能)의 문답을 소개했다. 홍인 대사가 방아를 다 찧었는지 묻자, 혜능은 방아는 다 찧었지만 택미를 못했다고 답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보편적인 문답이지만 그 이면에는 큰 의지가 들어있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었다. 그렇기에 이 문답 속에 담긴 의지를 본인들끼리 척척 알아차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육조 스님이 택미를 못 했다고 답한 것은 스승의 의지를 모두 알아차렸지만 아직 마지막 점검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때 오조는 주장자로 땅을 세 번 탕탕 치고는 뒷짐을 진 채 돌아갔다. 그 자리에 있던 700명 대중은 그 모습을 보면서 ‘큰스님께서 왜 저렇게 주장자만 치고 말없이 돌아가셨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겼지만, 혜능은 이미 그 의지를 알아차렸다. “여러분이 수행했다는 남방의 위빠사나대로 하자면 주장자를 세 번 치고 뒷짐 지고 돌아간 것 뿐, 그밖에는 없다고 할 게 아닙니까? 하지만 육조는 그게 아니라 스승의 의지, 격 밖의 소식을 바로 알아차렸어요. 뒷짐을 지고 간 것은 뒷문으로 오라는 뜻이며 주장자를 세 번 친 것은 삼경(三更)을 뜻한다는 걸 알아냈던 겁니다.” 결국 ‘삼경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내 거처의 뒷문으로 오란 뜻’임을 알고 혜능은 그 시간에 그 장소로 갔다. 그때 기다리고 있던 오조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했다. 그러면서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너 같은 사람이 누가 또 있겠느냐? 네가 내 뜻을 바로 보고 뒷문으로 왔으니 너를 인가해 주겠다.”라고 했다. 따라서 이런 알아차림은 남방 위빠사나의 알아차림과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게 스님의 설명이었다.
학림사 대웅전에서 법문 중인 학산 대원 대종사
· 집필자 : 이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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